[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허백련은 어떻게 조선화단의 新星이 됐을까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  
  • 입력: 2022-07-06 18:41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허백련은 어떻게 조선화단의 新星이 됐을까
日 식민지 문화정책 일환으로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

신진들도 수상해 이름 알려 … 입상 못한 출품작도 주목

가격평가 등 차별 있었지만 한국미술 발전에 많은 기여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가 개최됐다. 약칭으로 조선미전(朝鮮美展), 선전(鮮展)으로 불렸다. 일제가 무단통치(武斷統治)에서 문화통치(文化統治)로 정책을 바꾸면서 내놓은 미전(美展)이었다. 1944년까지 23회를 계속해 열리면서 한국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한국 화단(畵壇)을 일본풍으로 물들이게 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조선미전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로 이어졌다. 100년 전 조선미술전람회를 구경해 보자.

1922년 1월 21일자 매일신보는 조선미전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를 1922년 5~6월경에 경성에서 개설할 터인데, 요즘 이 취지(趣旨)를 주지(周知)케 하여 출품 권유를 장려함을 각 도지사에게 통첩(通牒)하였다더라."

이어 5월 21일자 매일신보는 '미술은 문명의 근원되는 진화점(進化點)'이란 제목의 기사를 내고 조선미전을 미화하고 있다. "조선미술전람회가 6월 1일부터 열리게 되어 어떤 곳을 막론하고 대인기, 대환영으로 출품 준비에 야단들이다. 미술은 문명의 근원되는 진화점이고 그 나라의 문명을 대표하는 것인데, 조선은 아직도 미술적 사상이 박약하여서 깊이 연구하지 않는 것이 일대 통폐(通弊)라 하겠다. (중략) 총독부가 미술전람회를 개최하여 문화의 발전을 재촉한다는 것은 깊이 감사치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즉 문화정치의 다대한 중요점을 깨닫는 동시에 제1회로 개최 준비는 실로 미술에 목마른 이 때에 기꺼운 소식이며, 우리의 크나큰 공부거리인 즉, 하루바삐 개최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 후 조선미전 심사위원 발표 기사가 나온다. 이도영(李道榮), 서병오(徐丙五), 이완용(李完用), 박영효(朴泳孝), 박기양(朴箕陽), 김돈희(金敦熙), 정대유(丁大有) 등이다.

드디어 1922년 6월 1일 조선미전이 열렸다. 6월 1일자 매일신보를 보자.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는 예정과 같이 6월 1일부터 개회할 터인데, 당일은 특히 초대일(招待日)로 하여 조선의 주요한 사람 약 3천명을 초대하여 마음대로 관람케 하고, 6월 2일 이후 21일까지는 일반에 관람케 한다는데, 관람료는 어른이 10전, 학생 아이는 반액이며 학생 단체견학은 5전이라 하며, 다만 매주 월요일을 감상일(鑑賞日)로 하여 관람표 50전을 징수하고 특히 동호자에게 감상의 편의를 주기로 하였다는데, 근래 미술전람회가 점증(漸增)하였지마는 이번 전람회는 실로 전 조선 기타 일본 각처의 유명한 미술 대가(大家)를 망라한 전람회일 뿐 아니라, 그 규모도 대규모적이 되어 오늘날 이 미술전람회는 가치있는 미술을 장려함으로써 문화통치에 대한 철저를 계도하고자 하여 총독부에서 고심으로 이번에 연구하여 주최하는 것이더라."

제1회 조선미전의 조선인 수상자들은 다음과 같다. 동양화 부문에서 허백련(許百鍊)이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로 1등 없는 2등상을 차지했다. 3등은 심인섭(沈寅燮)과 김용진(金容鎭), 4등은 김은호(金殷鎬)와 이용우(李用雨)가 수상했다. 서예 부문에선 오세창(吳世昌)이 전서(篆書)로 1등 없는 2등을 차지했다. 3등은 김영진(金寧鎭)과 현채(玄采), 4등은 김용진(金容鎭), 안종원(安鍾元), 이한복(李漢福)이 수상했다.

허백련은 당시 경성 서화계에서 명성이 없었던 터라 큰 주목을 받았다. 오세창의 경우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전시회 구경을 왔다가 그의 작품을 보고 감탄을 연발했을 정도였다.

6월 2일자 동아일보는 허백련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허백련 씨는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면 동외리에 사는 당년 32세 된 청년화가로, 헌종(憲宗) 시대 어전(御殿) 서화가로 유명한 소치(小痴) 허련(許鍊)의 종손(宗孫)으로, 어렸을 때부터 그 종조부 문하에서 사군자 등을 배우다가 1913년에 일본 교토(京都) 입명관(立命館)대학에 입학하였다가 (중략) 이번 조선미전에 엿새 동안 하경산수(夏景山水)와 추경산수(秋景山水) 두 폭을 그려 출품하였던 바, 우연히 두 장이 다 감사(監査)에 합격되었고 추경산수 한 폭은 2등이라는 상을 얻게 된 것은 천만 의외의 일이라 하더라."

입상은 못했지만 경성 대정권번(大正券番)의 기생인 김릉해(金綾海)도 큰 관심을 모았다. "본래 평양 출생으로 지금 경성부 내 대정권번의 기생으로 금주(錦珠)라는 기명(妓名)을 가지고 화류계의 한 사람이 되어 지금으로부터 6년 전부터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씨에게 서화를 배우는 바, 사군자(四君子)와 송학(松鶴) 등을 잘 그리며 그밖에 글씨가 유명하여 이전 조선공진회와 기타 각 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빈빈(頻頻)히 포상을 받았으며, 또 가무(歌舞)의 능란함은 물론이고 거문고와 양금(洋琴; 피아노)의 선수이므로, 월전(月前)에 특별히 선택되어 동경 평화박람회에 출연하였던 일도 있더라." (1922년 5월 24일자 매일신보)

조선미전 역시 조선인 차별로 뒷말이 많았다. 1922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세상에 고르지 못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마는 (중략) 매겨놓은 정가(定價)라는 것도 참 놀랄만 하다. 2등으로 당선되었다는 허백련의 '추경산수' 한 장이 겨우 100원밖에 아니된다 하여 (중략) 등급 참여도 못한 일본인 모(某)여사의 양화(洋畵) 한 장은 1,300원이라고 한다."

100년 전 열렸던 조선미술전람회는 문화행사가 드물었던 당시엔 특별한 볼거리였다. 그러면서 한국 미술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만큼 부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총독부가 주도한다는 점을 들어 전람회 참가를 거부하는 조선인 예술가들도 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폐해는 있었지만 조선미술전람회가 재능있는 신진들을 발굴하면서 한국 미술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허백련은 어떻게 조선화단의 新星이 됐을까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가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