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전투는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아세아의 제왕처럼 행세하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보기 좋게 후려친 통쾌한 전투였다. 인민혁명군은 조선총독부 당국이 치안유지가 잘된다고 장담하던 국내에 들어가 1개 면 소재지의 통치기관들을 일격에 소탕해버림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주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타격을 받은셈이였다"
식량 결핍으로 인한 방화를 저질러 부상 1명 민간인 여아 등 2명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진 '보천보 전투'를 위와 같이 묘사한 북한의 '세기와 더불어' 8권 세트가 원전 그대로 국내에 출간됐다. 출판사 측에서는 "국내에서 충분히 소개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지만 북한이 김일성 주석을 항일무장투쟁사로 미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논란이 될 전망이다.
출판계 등에서 나온 내용을 종합하면 21일 도서출판 민족사랑방은 지난 1일 김일성을 저자로 한 '세기와 더불어 항일회고록 세트' 책을 출간했다. 800여 개의 국내 출판사가 조합원으로 가입한 출판인 단체 한국출판협동조합을 통해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출판사로 등록한 민족사랑방은 사단법인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이자 북한 관련 무역 등을 하는 중소기업인 남북교역 주식회사 대표인 김승균 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출판을 두고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정치권에서는 역사 왜곡 서적이자 일방적인 체제 선전물을 연구의 측면이 아닌 대중에게 보급하는 목적이라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실제 북한 전문가들은 '세기와 더불어'를 여러 김일성 미화 서적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자 핵심이 되는 책으로 꼽는다. 북한에서 운영하고 있는 '우리민족강당' 홈페이지에서도 '세기와 더불어'를 상단에서 소개하고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세기와 더불어' 내용을 보면 "우리는 보천보 전투를 통하여 일제란 칼로 내려치면 동강이 나고 불을 지르면 짚검불이나 북데기처럼 타 번지는 일종의 페기물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성일보를 비롯한 국내의 주요신문들은 일제히 인상적인 표제를 달고 보천보 전투 소식을 전하였다"고 했으나 당시 동아일보는 호외판에서 보통학교 등을 습격한 방화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1명이 부상당했다고 전했고, 후속 보도에서는 사건의 원인을 '식량 결핍'에 의한 것으로 보도하는 등 일제의 피해는 거의 없었던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런 내용들을 근거로 법조계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 가능성도 제기한다. 대법원에서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판례가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김일성이 숨진 직후인 1994년 8월 도서출판 가서원이 '세기와 더불어'를 국내에서 출판하려 했다가 출판사와 인쇄소가 압수 수색당하고, 출판사 대표가 구속된 사례도 있다.
나아가 일각에서는 8권의 가격이 25만원에 이르는 이 책의 저작권료가 결국 북한으로 흘러들어 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적절치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한의 북한 서적 등에 대한 저작권료는 북한의 저작권 사무국인 민족화해협력위원회가 남한의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에 포괄적인 사전협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놓은 상황이다. 지난 2005년부터 2008년까지는 약 7억 9000만원의 저작권료가 북한에 지급됐으며 이후 2009년부터 2017년까지는 5·24조치로 대북 저작권료가 법원에 공탁돼 14억 6000만원에 이르고 있다.
한 북한 관련 전문가는 디지털타임스에 익명을 전제로 "A 국가와 B 국가가 전쟁 중인데, B 국가가 만든 이적 표현물이자 체제선전물을 A 국가가 출판하는 개념에 가깝다. 객관적으로 심각하게 우려되는 부분이 아니냐"며 "북한의 주체사상을 성경으로 빗대서 볼 때, '민족과 더불어'가 신약성경이라면 '세기와 더불어'는 구약성경"이라고 했다.임재섭기자 yjs@d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