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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이주용 KCC정보통신회장 “IT산업 일본 앞선 것 보람”

대학 연구소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시작 … IBM SW 개발자로
"IT 기술 육성 사명감" … IBM 회장에 한국진출 요청 편지도
국내 1호 SI기업 한국전자계산 설립 컴퓨터 활용분야 이끌어
SW 개발·주민등록 정보화 등 '최초' 기록 쓰며 IT 역사 일궈 

임성엽 기자 starleaf@dt.co.kr | 입력: 2017-10-10 18:00
[2017년 10월 11일자 9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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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이주용 KCC정보통신회장 “IT산업 일본 앞선 것 보람”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20년 넘게 매일 회사로 출근해 오전 시간을 보낸다. 80세가 넘은 고령임에도 매일 오후 피트니스센터에서 1시간 이상 운동을 할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행복했다"는 한 마디로 지난 50년의 세월을 정리했다.


■ DT 초대석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


팔순을 넘긴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책상 쪽으로 걸어가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50년도 더 전, IBM 미국 본사 최초 한국인 직원으로 근무하던 때를 얘기하던 그가 가져온 건 그 시절 IBM 사원증이었다. 'CHU YONG LEE'라고 이름이 타이핑된 사원증은 긴 세월을 거치며 빛이 바래고 귀퉁이마다 헤져 있었다. 특이하게 키와 몸무게, 눈과 머리카락 색깔이 사원번호, 사회보장번호와 적혀있고, 맨 아래에는 이 회장의 사인이 돼 있었다. 사진 속, 젊은 시절의 이 회장은 지금 KCC정보통신을 이끌고 있는 이상현 부회장과 꼭 닮아 있었다.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 부회장이 "아직도 보관하고 계셨군요"하며 놀라워했다. 빛바래고 낡은 사원증은 이 회장이 "행복한 날들이었다"고 회고한, 50년 역사의 시작을 상징하는 표지물과 같았다.

지금부터 50년 전인 1967년, 우리나라는 경제기획원 통계국이 미 IBM으로부터 'IBM 1401' 컴퓨터를 도입하면서 전자정부 역사를 시작했다. 같은 해, 국내 1호 시스템통합(SI) 기업도 탄생했다. 현 KCC정보통신이다.

이주용 회장은 당시 한국생산성본부 소속 한국전자계산소장으로 근무하며 국내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들여왔다. 우리나라 정보기술(IT) 산업 역사를 처음 연 주인공인 것. 그는 이후 '최초' 기록을 연이어 써갔다. 1967년대 한국은행 외환관리 전산화 시스템을 처음 맡아 개발했고, 소프트웨어(SW) 개발도 국내 처음으로 시작했다. 1976년에는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을 국내 최초로 맡아 진행했다.

지난달 21일 서울 염창동 KCC정보통신 본사에서 만난 그는 50년 전의 일들을 날짜까지 또렷하게 기억했다.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한국 IT산업의 역사이자, 본인 삶의 역사를 풀어놨다.


대담=안경애 IT중기부장

-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과 정보화의 역사를 써오셨다. 12일 KCC정보통신 창립 50주년 행사도 앞두고 있는데 지난 50년을 돌아본 소감이 궁금하다.

"사실 우리나라 정보기술(IT) 산업이 이렇게까지 성공적으로 성장할 줄 몰랐다. 특히 우리나라가 IT 부문에서 일본을 앞서 왔다는 데 대해 자부심이 있다. 현재 IT산업만 본다면 모든 부분에서 일본보다 앞서 있는데 이는 사실 간단한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 일본의 기술에 의지해 성장한 산업이 많은데, IT산업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게 보람된다. 지금의 국내 IT산업이 존재하는데 미약하나마 뿌리를 심었다는 점이 뿌듯하다."

50년 전 우리나라 IT 기술력은 미국은커녕 일본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무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도 되지 않던 때, SW와 하드웨어(HW)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이런 척박한 현실을 보며 이 회장은 한국에 맞는 IT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의지를 굳혔다. 그런 그가 컴퓨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경남 울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미국 미시간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경제학. 그런 그는 우여곡절 끝에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인 IBM에 입사했다.

- 대학을 1958년에 졸업하고 1960년에 IBM에 입사했는데 당시 스토리가 궁금하다.

"큰 꿈을 품고 미시간대학으로 유학을 갔지만, 막상 졸업해도 취업이 쉽지 않았다. 같은 해 졸업한 졸업생 중 95%가 취업에 성공했는데, 학교 성적 상위 20%에 드는 나는 서른 곳의 회사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하는 수 없이 재학 중에도 가끔 하던 골프장 접시닦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같이 졸업한 친구들이 골프를 치러 와서 얼굴을 알아보고 말을 거는 바람에 그마저 잘렸다. 그 골프장에서는 직원이 고객과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울분과 설움이 북받쳐 올라 그 길로 미시간대 주임교수 집을 찾아갔다. 취업이 안 되는 이유가 외국인이기 때문인지를 따져 물었다. 생각에 잠긴 그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다음날 오후 2시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그러곤 미시간대학 내 사회과학연구소 전산실 연구원 일을 소개하며 '월급 따지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이 회장이 컴퓨터와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됐다. 1958년 여름, 그는 사회과학연구소에 설치된 'IBM 650' 컴퓨터를 매일 밤 운영하는 오퍼레이터 일을 시작했다. 당시 미시간대에서도 유일하게 한 대 있는 컴퓨터였다. 경영대학원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한 학기에 5~10분 정도밖에 쓸 수 없던 컴퓨터를 매일 들여다보며 테스트할 기회였다.

컴퓨터 오퍼레이터에 그치지 않고 기계어부터 시작해 프로그래밍도 익혔다. 당시 첨단 기술인 컴퓨터 운영능력으로 무장하자 취업 인터뷰를 한 기업마다 서로 오라고 러브콜을 보냈다. 프로그래밍 능력 덕분에 IBM 입사 길도 열렸다. 기계어부터 실력을 갈고닦은 그는 IBM 입사 후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런 그는 IBM 내에서도 '잘 나가는' SW 개발자 자리를 박차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덴마크 주재 근무가 변경돼 여행차 방문한 고국의 현실을 마주하고서다.

- 국내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당시 한국 상황을 보고 쇼크를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78달러밖에 안 된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국민들은 모두 똑똑한데 이렇게 못살고 가난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1·2차 산업혁명 당시 쇄국 정책을 썼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일본은 당시 방직기 등 서양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메이지 유신에 성공했는데 우리나라는 최신 기술과 산업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아 이렇게 가난한 것이라고. 컴퓨터를 통한 3차 산업혁명에선 일본보다 앞서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IT와 컴퓨터 산업을 일으켜 이 분야만큼은 일본에 앞서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날로 이 회장은 젊은 패기를 앞세워 이러한 생각을 담은 편지를 당시 IBM 회장이던 왓슨에게 보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에는 진출하면서 한국 시장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도 따져 물었다.

- 편지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궁금하다.

"당시 IBM은 대만과 필리핀 시장에도 진출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국내 IT 산업이 성장하려면 당시 글로벌 100대 기업 중 5위이던 IBM이 꼭 우리나라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도 출범 초기여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는 등 경제 부흥에 몰두했기 때문에 IBM이 한국 정부도 돕고 시장에 진출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IBM 한국지사 대표가 된 이 회장은 국내에 컴퓨터 산업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던 시절, 크고 작은 사업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는 현 KCC정보통신 설립의 계기가 됐다.

- IBM 한국 대표를 맡은 당시 상황은 어땠는지.

"IBM 한국 대표로 활동한 것은 실질적으로 1963년이었다. 그런데 SW 개발 전문가이긴 하지만 컴퓨터가 산업과 사회에 어떻게 활용되고 각 현장을 바꿀 수 있는지 지식이 많지 않던 터라 어려움이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미국행을 선택했다.

그리곤 SW 개발이 아니라 컴퓨터 활용분야를 익힐 수 있는 IBM 계열사를 선택했다. 바로 서비스, 지원, 제품 수리, 컨설팅 등을 주로 하는 비주력 계열사인 SBC였다. 그곳에서 농업, 제조업 등 각 산업 영역에서 컴퓨터가 어떻게 현장을 바꿀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었다. 체득한 경험과 지식을 갖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1967년 한국생산성본부 소속 한국전자계산소(KCC) 소장으로 취임한 이 회장은 후지쯔 컴퓨터인 '페이콤222'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컴퓨터를 활용하기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프로그래머 채용을 제대로 지원받지 못 하는 등 어려움이 따르자 독립해 직접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가 바로 KCC정보통신의 전신인 한국전자계산이다.

-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는지.

"불신하는 문화가 어려웠다. HW는 눈에 보이지만 SW는 무형물이다. 그렇다 보니 SW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풍토가 심했다. IT 중에서도 HW는 눈부시게 성장한 반면, SW가 뒤따르지 못한 중요한 이유다. 그나마 그런 환경 속에서 SW가 이 정도 성장한 것을 보면 놀랍다.

관료적인 조직시스템도 어려운 점 중 하나였다. 국내에서는 어떤 직업이든 업무 분야에서 경력이 쌓이면 '장'자가 붙는다. 모든 기업체가 관료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 SW 전문가를 양성해 놓고 '장'으로 진급하는 순간 프로그래머 직무는 사라지고 관리자 역할을 한다. 사업을 하면서 모든 직원이 관리자로 올라가려고 하는 점이 굉장히 힘들었다. 한 자리에 오래 근무하지 않는 문화도 문제다."

주민등록 전산화, 새마을호 승차권 정산발매, 태국철도청 SW 수출 계약 등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KCC정보통신은 '국내 최초' 기록들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 회장은 다소 이른 감이 있는 1993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 이상현 부회장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1993년 은퇴했는데, 좀 이른 감이 있지 않나.

"트렌드 변화가 빠른 IT업계에서 쉰 살은 사업상 물러나야 하는 나이가 맞다. 사실 대표이사직을 던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다. 1989년에 회사에 노조가 설립됐다. 당시 회사는 각종 시스템 구축과 수출로 한창 성장하고 있었다. 성장의 열매를 직원들과 나누기 위해 인센티브와 별도로 1985년에 이익분담금 제도를 도입했다. 연말 회사 회계마감 후 이익금 중 절반을 이익분담금으로 만들어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물론 기여도에 따라 차등을 줬다. 첫해에만 30억원의 이익금 가운데 15억원을 직원들에게 돌려줬다. 당시 30억원은 엄청난 액수였다. 그런데 금액에 차등을 두자 이에 반발하는 이들이 노조를 설립, 회사가 갈등에 휘말렸다."

당시 이 회장의 실험은 혁신적이었다. 회사에 기여한 공로대로 지급하는 성과급에 더해 회사의 이익을 직원들과 고스란히 나누는 시도를 한 것. 당시 300명의 직원 중 기여도가 높은 이들은 이익금 공유로만 연말에 서울에서 아파트를 살 수 있을 정도로 파격적인 액수였다. 그러나 노조는 이익금을 모두 똑같이 분배받는 균등 분배와 이 회장의 대표이사직 사퇴를 요구했다. 이 회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노조가 요구한 균등분배가 오히려 더 큰 갈등을 불러온 것이다. 고 성과자에 대한 역차별 문제와 이로 인한 근무의욕 저하가 주원인이었다. 이후 직원들이 노조를 스스로 폐쇄했고 현재까지 KCC정보통신에서 노조는 없다.

- 파격적인 시스템이었는데 갈등은 어떻게 봉합됐나.

"전 직원이 나서서 쫓아내는 바람에 노조가 발붙일 데가 없었다. 이익배당금 제도는 직원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점에서 참 좋은 시스템이었다. 갈등은 노력하고 개선해 나갔으면 됐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한 만큼 자기들이 인센티브를 받아간다는 믿음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 우리 IT산업의 중요한 역사를 써왔다. 아들과 25년씩 경영하며 회사도 성공적으로 성장했다. 지금 돌아보면 어떤 삶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지.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보고 나서 과거를 생각해보고, 앞으로의 미래도 생각해보면 참 만족스럽다. 나는 굉장히 행복한 사내였다."

[초대석] 이주용 KCC정보통신회장 “IT산업 일본 앞선 것 보람”


○ 이주용 회장은…

◇학력

- 1958년 6월 미국 미시간대학 경제학부 졸업

- 1960년 6월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 2년 수료

◇경력

- 1960년 7월 미국 IBM사 입사

- 1963년 2월 IBM사 한국대표

- 1967년 1월 한국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 소장 취임

- 1968년 1월 서울대학교 상과대 경영대학원 강사

- 1985년 4월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 대표이사

- 2004년 9월 KCC정보통신주식회사 회장

정리=임성엽기자 starleaf@dt.co.kr
사진=유동일기자 eddie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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