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드룬 슈리 지음
장혜경 옮김
이마고 출판사/268쪽/1만2000원
슬픈 영화의 아름다운 여주인공은 백혈병을 앓고, 순진한 소녀는 몹쓸 혈우병에 시달리며, 천재 시인은 각혈을 한다. ’피’하면 떠오르는 이런 통속적 장면들은 피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오히려 제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피는 생명의 원천수이자 긍정적 삶의 상징이다. 하지만 몸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것은 고통과 두려움을 부르는 근원이 된다. 인간은 태초부터 이 비릿한 붉은 액체에 매료되었다. 피는 죄를 사하기 위해 신전에 바치는 제물이었고, 건강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영약이었으며 동시에 탐욕적인 성적 매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구드룬 슈리의 ‘피의 문화사’는 시대와 민족, 종교와 신화, 예술과 문화 즉 인간의 모든 정신세계 영역에서 혈흔을 다각도로 추적한다. 글쓴이는 서문에서부터 ‘딜레탕티즘’을 강조하며 자신의 자유로운 아마추어적 진술을 옹호한다. 그녀는 철학적인 진리애, 탐정에 버금가는 예민한 감각, 과감한 발상들을 문화사 저술의 덕목으로 내세우며, 모든 범주의 문화사를 넘나든다.
불타는 예술혼의 말로를 장식하는 각혈, 동화 속 백설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붉은 피 세 방울, 신들을 위해 흘려진 제물의 피, 야쿠자가 나누는 ‘사이비 형제의 피’, 피로 얼룩진 전쟁터 등 피는 인간사 곳곳에 스며 있다. 책 속에서 보여주는 피의 숨은 의미와 상징은 내가 가졌던 상식을 뛰어넘는다.
저자는 살아있는 뱀파이어라 자부하는 영국의 기인 빅터 D와 의욕적인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 영국인은 피를 빨리는 자를 희생자가 아닌 채권자라 부른다. 뱀파이어는 채권자에게 피를 담보로 불멸을 대여해주는 것이다. 이 인터뷰는 조금 희극적이긴 하지만, 매체에 재현된 뱀파이어의 통속적인 이미지를 둘러싼 공방은 흥미롭게 보인다.
만약 누군가가 이 책을 학문의 지표로 삼고자 선택했다면 다소 당황할 수도 있다. 아카데미적 서술에서 벗어난 작가의 자유로운 서술방식 안에, 실존 인물과 허구 인물들은 동일선상에 놓이고 객관적인 사료들은 저자의 도발적 상상력 아래 재구성된다.
‘피’에 대한 전모가 책 안에서 밝혀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책은 피에 대한 얘기로 가득하다. 작가는 자신이 피에 대한 모든 얘기를 다 펼쳐놓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 못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피에 대한 논의로 수다스럽다. 책의 어디를 펼쳐도 앞뒤 내용의 인과관계를 덜 고려한 새로운 ‘피’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구드룬 슈리은 빅터 D 와의 인터뷰에서 “피에 관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이 많다”라며 피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준다. 그의 집착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도 거리낌없이 넘나든다. 하지만 글쓴이가 단순히 피의 흔적만을 기술한 것은 아니다. ‘피’에 대한 방대한 정보는 다른 문화와의 연결고리로 이어져나간다. 그 고리를 풀어나가는 열쇠도 꽤 논리적이고 해학적이다. 그래서인지 유혈낭자한 이 책은 읽는이에게 그리 불쾌하다거나 어둡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원래의 빛깔에 가공된 외피적 지식론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이끌어내는 의식적인 담론이라고 한다면야 달리 이론을 제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장혜경 옮김
이마고 출판사/268쪽/1만2000원
슬픈 영화의 아름다운 여주인공은 백혈병을 앓고, 순진한 소녀는 몹쓸 혈우병에 시달리며, 천재 시인은 각혈을 한다. ’피’하면 떠오르는 이런 통속적 장면들은 피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오히려 제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피는 생명의 원천수이자 긍정적 삶의 상징이다. 하지만 몸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것은 고통과 두려움을 부르는 근원이 된다. 인간은 태초부터 이 비릿한 붉은 액체에 매료되었다. 피는 죄를 사하기 위해 신전에 바치는 제물이었고, 건강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영약이었으며 동시에 탐욕적인 성적 매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구드룬 슈리의 ‘피의 문화사’는 시대와 민족, 종교와 신화, 예술과 문화 즉 인간의 모든 정신세계 영역에서 혈흔을 다각도로 추적한다. 글쓴이는 서문에서부터 ‘딜레탕티즘’을 강조하며 자신의 자유로운 아마추어적 진술을 옹호한다. 그녀는 철학적인 진리애, 탐정에 버금가는 예민한 감각, 과감한 발상들을 문화사 저술의 덕목으로 내세우며, 모든 범주의 문화사를 넘나든다.
불타는 예술혼의 말로를 장식하는 각혈, 동화 속 백설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붉은 피 세 방울, 신들을 위해 흘려진 제물의 피, 야쿠자가 나누는 ‘사이비 형제의 피’, 피로 얼룩진 전쟁터 등 피는 인간사 곳곳에 스며 있다. 책 속에서 보여주는 피의 숨은 의미와 상징은 내가 가졌던 상식을 뛰어넘는다.
저자는 살아있는 뱀파이어라 자부하는 영국의 기인 빅터 D와 의욕적인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 영국인은 피를 빨리는 자를 희생자가 아닌 채권자라 부른다. 뱀파이어는 채권자에게 피를 담보로 불멸을 대여해주는 것이다. 이 인터뷰는 조금 희극적이긴 하지만, 매체에 재현된 뱀파이어의 통속적인 이미지를 둘러싼 공방은 흥미롭게 보인다.
만약 누군가가 이 책을 학문의 지표로 삼고자 선택했다면 다소 당황할 수도 있다. 아카데미적 서술에서 벗어난 작가의 자유로운 서술방식 안에, 실존 인물과 허구 인물들은 동일선상에 놓이고 객관적인 사료들은 저자의 도발적 상상력 아래 재구성된다.
‘피’에 대한 전모가 책 안에서 밝혀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책은 피에 대한 얘기로 가득하다. 작가는 자신이 피에 대한 모든 얘기를 다 펼쳐놓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 못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피에 대한 논의로 수다스럽다. 책의 어디를 펼쳐도 앞뒤 내용의 인과관계를 덜 고려한 새로운 ‘피’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구드룬 슈리은 빅터 D 와의 인터뷰에서 “피에 관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이 많다”라며 피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준다. 그의 집착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도 거리낌없이 넘나든다. 하지만 글쓴이가 단순히 피의 흔적만을 기술한 것은 아니다. ‘피’에 대한 방대한 정보는 다른 문화와의 연결고리로 이어져나간다. 그 고리를 풀어나가는 열쇠도 꽤 논리적이고 해학적이다. 그래서인지 유혈낭자한 이 책은 읽는이에게 그리 불쾌하다거나 어둡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원래의 빛깔에 가공된 외피적 지식론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이끌어내는 의식적인 담론이라고 한다면야 달리 이론을 제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