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전쟁 피해 한국 온 러시아 난민, 100년 전에도 있었다](http://contents.dt.co.kr/images/202210/2022102702102269061001[1].jpg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전쟁 피해 한국 온 러시아 난민, 100년 전에도 있었다")
1920년 8월 동아일보 첫 기사 실린 뒤 연일 신문에
당시 상황 잘 묘사… 전쟁 최대 피해자는 역시 백성
지난 9월 말 러시아에서 '부분적 동원령'이 발령되자 징집 대상자들이 해외로 탈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요트를 타고 동해안을 통해 한국 입국을 시도하는 러시아인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일부만 입국이 허가되고 대부분은 입국이 거부됐다고 한다. 러시아 국민들이 우리나라로 피난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00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러시아 피난민 기사는 1920년 8월 31일자 동아일보에 처음 보인다. '지다(智多; 러시아 남동부 치타(州)의 주도인 치타) 방면의 피난민'이란 제목의 기사다. "시베리아의 형세가 날로 험악하여 도저히 마음을 놓고 살 수가 없고 더욱이 이번 지다에서 일본이 철병(撤兵)을 하므로 그 곳에 있는 우리 동포가 많이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피란하여 오는데, 21일 우리 동포 40여명이 청진항에 하륙(下陸; 육지로 내림)하였는데, 그 중에는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부인을 동반한 사람까지 있더라."
이렇게 첫 피난민이 온 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러시아 난민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살펴보자.
1922년 10월 25일자 매일신보에 '해삼위에서 경성에 피난 온 노국(露國) 사람'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지난 22일 밤에 원산에 입항한 포염(浦鹽;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식 한자명)의 피난민 300여명 중 남자 132명과 여자 50명은 23일 오전 10시 7분에 원산발 열차로 그 날 밤 5시 50분에 경성에 도착하였다. 일행 중에는 꽃도 오히려 부끄러워할 만한 소녀들도 있고 아이도 있으며 늙은이도 있고 (중략) 이들 182명 대부분은 포염에서는 지식계급 또는 유산계급에 속한 자들인데, 나라가 없고 집까지 잃고는 지금 와서 일개 가련한 표박(漂迫)의 신세가 된 사람들인데, 배를 타고 올 때도 1등 선객으로 된 자는 겨우 10명에 불과하고 기타는 모두 3등 선객으로 궁핍한 정경은 말할 수가 없다. 일행은 극도의 굶주림과 피곤한 모양으로 서로 붙들고 울며 오늘날 붙일 데 없는 신세가 된 것을 무한히 한탄하며 의기(意氣)가 더욱 상한 것을 보더라도 그들의 심정은 어떠하다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들은 왜 한반도로 피난을 왔을까.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내전이 발생했다. 혁명파인 적군(赤軍)과 반혁명파인 백군(白軍) 및 외국 간섭국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다. 결국 적군이 승리했고, 패한 백군과 그 가족들이 피난민이 되어 한반도로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경성을 경유해 다시 중국의 하얼빈, 펑톈(奉天, 오늘날의 선양), 상하이 등으로 건너갔다.
당시 경성에 도착한 러시아 피난민들은 큰 화제를 모았다. 러시아 피난민에 대한 기사는 연일 신문에 실렸다. 하지만 전쟁을 피해 나라를 떠난 피난민의 생활이야 뭐라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당시 함경도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들의 처지는 무척 딱했다고 한다. 고등어를 갖다주자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그것을 날 것으로 먹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 문학계에 '소냐' 라는 이름의 작품들이 나온 것도 이런 러시아 피난민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비참한 노국(露國) 피난민과 냉정한 경성 관민'이란 제목의 1922년 10월 26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그들의 몸에는 모두 모피(毛皮)의 방한(防寒) 의복을 걸쳤는바 그 모양은 한없이 처량스러웠다. 이 같은 정상(情狀)을 목도(目睹)한 경성 사람들은 누구나 동정을 표함이 없이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마찬가지로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불쌍한 피난민들에게 끓인 물을 구하여 주는 이가 없어서 정거장 세면소(洗面所)의 물을 먹고 있었음은 한층 비참하였다더라."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전쟁 피해 한국 온 러시아 난민, 100년 전에도 있었다](http://contents.dt.co.kr/images/202210/2022102702102269061001[2].jpg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전쟁 피해 한국 온 러시아 난민, 100년 전에도 있었다")
같은 날 동아일보 기사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해삼위를 떠나 그제 24일 오후 5시 25분 남대문 도착 경원선 열차에도 남녀 50명이 경성에 들어와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근심의 빛이 가득하였으며, 오히려 어떤 사람은 상당한 금전을 가졌으나 대개는 졸지에 피난을 오느라고 가정 집물(什物)과 집과 전답을 내버리고 다만 몇몇 가지의 행장(行裝)과 몇십원 밖에 되지 아니하는 여비를 가지고 정처 없이 외국의 땅을 밟게 되었으므로, 고달프고 초췌한 모양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줌의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한다."
수학여행 중에 러시아 피난민에 대한 상황을 견학했다는 이채로운 기사도 눈에 띈다. "함흥공립상업학교 생도 23명은 지난 9일 오전 9시 반 도착 열차로 원산에 온 노국 피난민의 상황을 견학하고, 10일은 축항(築港) 등 기타 시내 일반을 견학하고 다시 갈마(葛麻)와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순람(巡覽) 후 동일 오후 4시 7분 발 열차로 함흥에 돌아왔다더라."(1922년 11월 14일자 동아일보)
사람만 전쟁의 여파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동물 역시 전쟁의 아픔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21년 7월 3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세상의 부귀영화는 물 위의 거품'이란 제목의 기사다. "러시아 황실의 위엄이 세계를 떨칠 그 때에 장엄한 동국(冬國)의 마구간에서 곱게 기르던 말 40여 두는, 로마노프 황실의 비참한 말로(末路)와 같이, 일본 사람의 손에 팔려서 멀고 먼 조선으로 나와 조선의 마종(馬種)을 개량코자 한다는데 (중략) 한때 호강을 무진(無盡; 무궁무진)하던 그 말(馬)도 일조(一朝)에 주인을 잃고 눈물이 두 눈가를 적시지 않을 새가 없이 신세의 처절함을 한탄하며 조선에 나오게 되어 그 씨를 조선말(朝鮮馬)에 옮겨 주게 되었으니, 이것저것 영귀(榮貴; 부귀영화)하던 일은 하룻밤 꿈에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우리도 그 말과 같은 신세나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바이다."
풍선을 누르면 가장 약한 곳이 터진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이는 역시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다. 이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전쟁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잃는다. 100년 전 조국을 떠났던 러시아인들이 다시 조국을 떠나고 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니 가슴이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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