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기술 KIST 전산실서 '싹' … 70년대엔 '전산화 붐'
전화적체 해결위해 240억·1300명 투입 'TDX 국산화'
세계첫 CDMA·지상파 DMB·와이브로 성과로 이어져
ETRI 중심 '초지능·초연결·초실감' 기술개발에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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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 2부 > (12) IT강국으로 도약
최근 타계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1980년 대표작 '제3의 물결'을 통해 인류가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거쳐 20∼30년 안에 '정보화혁명'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견대로 현대인의 일상은 정보통신기술(IT)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게 됐다. 전 세계는 인터넷이란 거대한 통신망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와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의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고, 최근에는 손 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을 통해 다시 한 번 '모바일 혁명'을 체험하고 있다.
제3의 물결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던 한국에도 밀려왔다. 정보화 혁명이 촉발한 첨단 기술 전쟁을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한 우리나라는 1986년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전전자교환기 'TDX' 국산화,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반도체 개발, 1995년 세계 최초 디지털 이동통신시스템 'CDMA' 상용화 등 굵직한 기술 개발 성과를 통해 IT 산업 강국으로 도약했다. 이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인프라를 갖추고 반도체, 스마트폰 등의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 기술을 가진 나라로,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KIST 전산실에서 싹튼 'IT'= 우리나라 IT 기술의 태동은 1966년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 종합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연구조직을 구상하던 최형섭 KIST 초대 소장은 전산실장 자리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컴퓨터 이용 연구가 KIST가 맡아야 할 중요한 분야로 꼽히긴 했지만, 당시 국내엔 전공자조차 없을 정도로 생소한 영역이었다. 더구나 KIST 설립을 위한 기술용역을 맡은 미국 바텔기념연구소는 산업 실태조사를 통해 앞으로 한국에 상당한 정보화 수요가 있을 것이고, KIST 전산실이 직접 컴퓨터를 운용해 주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놨다. 전산실 구성을 시작으로 앞으로 이런 많은 일을 도맡아 해야 할 전산실장을 영입하는 일은 최 소장에게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최 소장은 전산실장 자격으로 '컴퓨터에 대해 해박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고, 수학적 사고에 능하며, 미국 등 선진국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자'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자리에 앉힐 사람을 수소문했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한 사람은 당시 공군사관학교 항공역학 교관이었던 성기수 대위였다. 그는 1958년 공군 장교로 임관하면서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나 역사상 최단기간인 2년 만에 석·박사학위를 취득해 천재로 소문난 인재였다. 하버드대 유학 당시 컴퓨터를 접하고 가능성을 눈여겨봤던 성 박사는 최 소장의 권유에 해외 교수직을 포기하고 KIST 전산실장 자리를 선택했다.
한국의 컴퓨터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가진 성 박사는 1969년 미국 컨트롤데이터(CDC)로부터 초대형컴퓨터 'CDC 3300'을 도입했다. 국내에 도입된 12번째 컴퓨터인 CDC 3300은 '포트란' '코볼' 등 고급언어를 알아듣는 한국 최초의 컴퓨터로, 당시 국내에 있던 컴퓨터 중 최고의 성능과 용량을 자랑했다. 당시만 해도 일반 국민들에겐 생소했던 컴퓨터는 마치 '요술지팡이'처럼 보였기 때문에 CDC 3300의 설치는 사회적으로 큰 관심이 쏠렸고, 성 박사는 여러 곳에 불려다니며 컴퓨터에 대한 이해와 정보시대의 도래에 대한 강연을 도맡아 했다.
당시만 해도 대다수 학자는 컴퓨터가 고도의 과학기술 분야 계산에나 쓰이는 기술로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KIST 전산실이 1970년 한글 라인 프린터 개발에 성공하고 서울시 전화요금고지서 발급업무와 대학입학 예비고사 채점업무 등을 전산화하며 이런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당시 전화요금 업무는 사람이 주판으로 계산해 손으로 쓴 고지서를 사용자에게 보내고, 요금을 받으면 다시 일일이 손으로 계산하는 식이었다. 이런 업무를 컴퓨터가 정확하고 신속하게 대신하는 것을 보게 되자 1970년대 들어 정부와 대학, 민간기업 등에 '전산화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KIST 전산실은 1975년 말까지 100여 건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이 중 약 70%가 전산화를 위한 연구였다.
이후 KIST 전산실은 1976년 전산개발센터, 1984년 시스템공학연구소 등으로 확대됐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 'GIONS(Game Information On-line Systems)' 개발을 통해 국내 IT 기술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또 같은 해 국내 최초의 슈퍼컴퓨터 '크레이 S2'를 도입해 이듬해 태풍 '베라'의 진로를 정확히 예측, 강력한 컴퓨팅 기술의 필요성을 국민들이 느낄 수 있게 해줬다.
◇ IT강국 자신감 얻은 'TDX' 개발= 지금은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지만 3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전화 한 대 값이 집 한 채 값과 맞먹었다. 1955년 전화가입자는 3만9000명으로 인구 1000명당 2대꼴이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도입된 전화는 갈수록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전화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전화를 사고팔거나 전·월세를 놓아주는 '전화상'이 서울에만 600여 곳이나 성업했다. 전화를 둘러싼 부조리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전기통신법을 개정해 1970년 8월 31일까지 가입된 전화는 매매할 수 있도록 하되, 그 후 새로 가입된 전화는 금지했다. 전자를 '백색전화', 후자를 '청색전화'라고 불렀는데 당장 전화가 필요한 사람은 비싸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백색전화를 살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전화값은 더 뛰어 백색전화 한 대 값이 260만원까지 치솟았다. 서울 시내 50평짜리 집값이 230만원 안팎이었던 걸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한 가격이었다.
이렇게 전화가 귀했던 건 통화를 연결해주는 교환시설 부족 때문이었다. 사람 손으로 일일이 전화를 연결해야 하는 기계식 교환기로는 늘어나는 전화 수요를 더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방안은 전자식 교환기 개발이었다. 당시 전자식 교환기 개발은 세계적 추세였고, 미국, 일본, 캐나다, 스웨덴 등은 이미 상용화를 마친 상황이었다.
정부는 전화 적체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 후반부터 벨기에와 미국으로부터 새로운 전자식 교환기를 도입했다. 외산 교환기로 인해 통신 환경은 한결 나아졌지만, 장비 수입과 기술이전료로 인한 연간 5000억원에 달하는 외화 유출로 경제적 손실이 막대해 장기적으로 교환 기술의 국산화가 절실했다.
1981년 한국전기통신연구소는 정부에 연구개발 기간 5년, 연구 참여인력 1300여 명, 연구비 240억원을 투입해 '시분할 전전자교환기(TDX)'를 개발하는 'TDX 개발 계획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당시 개발을 담당할 전기통신연구소의 전체 연간 연구개발비가 24억원 수준이었고, 군 장비 개발을 위한 사업을 제외하고는 단일 프로젝트가 10억원을 넘는 사례조차 드물었다. 단일 품목 개발에 240억원의 연구비를 투입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극소수 선진국만이 갖고 있던 전자교환기술을 우리나라 기술 수준으로 개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결국 정부는 전기통신연구소 연구원들로부터 "연구원 일동은 TDX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한다"는 비장한 각오가 담긴, 훗날 'TDX 혈서'로 불리게 된 서약서를 받고 TDX 개발 계획을 확정했다.
TDX 개발은 국내외 보유기술과 자원을 총동원한 범국가적 국책프로젝트로 추진됐다. 연구소가 개발을 맡고 참여업체는 기술을 전수받아 개발에 필요한 생산 업무를 하는 공동개발 형태로 진행됐다. 처음 시도되는 대형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개발과정은 어려움의 연속이었지만, 참여 업체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연구진은 기계식 교환기와 아날로그 교환기 제작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전자식 교환기를 개발·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1986년 3월, 전북 무주, 경북 고령, 경기도 전곡, 가평 등 4개 지역에서 국내 기술로 개발한 'TDX-1'으로 2만4000회선을 동시에 개통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10번째로 전자교환기를 개발·생산하는 국가 반열에 올라섰고,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16년간 총 1076억원의 예산과 3146명의 연구 인력을 투입한 범국가적 국책과제인 TDX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 연구자들과 산업계는 핵심 통신장비를 우리 기술로 만들었다는 자신감과 함께 세계 최초 디지털 이동통신기술 'CDMA' 상용화와, '내 손안의 TV'를 실현한 지상파 DMB 기술 개발, 국제표준으로 선정된 휴대인터넷 '와이브로' 개발 등 독자적인 IT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는 초석이 됐다.
◇ 5G 통신과 4차 산업혁명= 1982년 5월 15일,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사이에 인터넷이 연결됐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두 번째로 인터넷을 사용한 국가가 됐다.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길남 박사는 "우리가 사용했던 인터넷망인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은 미국과 견줘도 전혀 뒤지지 않는 기술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한국은 1986년 인터넷 주소(IP)를 할당받아 도메인을 공식 등록했고, 1994년에는 코넷 서비스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인터넷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통신과 이동 통신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산업과 경제는 글로벌 경기 침체와 조선 등 주력산업의 경쟁력 위기,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에 낀 '넛크래커' 상황 등으로 안갯속을 걷고 있다. 이런 산업과 경제 위기를 탈출할 기회는 인공지능, 빅데이터를 접목한 IT 인프라를 바탕으로 금융, 에너지, 바이오헬스 등 모든 산업분야가 융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4차 산업혁명'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최근 세계 산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자동차, 사물인터넷(IoT) 등 첨단 기술은 결국 강력한 통신 인프라가 바탕이 된다. 이에 우리나라는 기존 4세대 통신보다 2000배 이상 빠른 '5세대(5G)' 통신 인프라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정부는 2018년 열리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세계 최초로 5G 시범서비스를 진행할 계획이다. 5G 통신은 최대 전송속도 20Gbps, 지연시간 1㎳(0.001초), ㎢당 100만개의 사물이 연결될 수 있는 서비스를 말한다. 올림픽에 5G 시범망이 구축될 경우 경기 중계를 위한 초고화질(UHD) 방송과 홀로그램, 가상현실(VR) 등 대용량 초실감 콘텐츠와 자율주행차 운행정보 등 대용량 콘텐츠를 자유롭게 전송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국내 IT 원천기술 개발을 이끌어 온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 위한 '초지능·초연결·초실감' 기반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모든 사물과 인간이 연결되는 '초연결' 기반 기술로는 고속 이동 중에도 기가급 통신이 가능한 '이동 무선백홀 기술(MHN)'과 10㎝ 이내 근접거리에서 기가급 대용량 데이터를 순간 무선 전송하는 차세대 근접무선통신 '징(Zing)' 기술 등이 대표적이다. 초연결을 가치 있는 서비스로 만들기 위한 '초지능' 기술로는 언어지능 '엑소브레인(Exo Brain)'과 시각지능 '딥뷰(Deep View)' 등을 개발하고 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콘텐츠를 경험하는 '초실감' 기술로 세계 최초 360도 컬러 홀로그램과 울트라 와이드 비전(UWV) 시스템을 선보이기도 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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