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사 라디오 기판 개발이 첫 연구 KAIST 통합·이전 결사적으로 막아"
"대학 전산과 없던 시절 IT인재 산실 연구자 권한 주고 50년전략 맡겨야"
"생계형R&D 매달려선 큰일 못해내 국가에 필요한 미래기술 도전할 것"
"대학 전산과 없던 시절 IT인재 산실 연구자 권한 주고 50년전략 맡겨야"
"생계형R&D 매달려선 큰일 못해내 국가에 필요한 미래기술 도전할 것"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1부ㆍ끝> (5) 'KIST의 과거와 미래' 좌담회
지난 10일 설립 50돌을 맞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지금까지 이공계 대학교수 800여 명을 포함해 약 4500명의 연구자가 산·학·연으로 진출해 우리나라 과학기술 인력의 저수조 역할을 했다. 특히 초기 KIST 연구자들이 당시 대학교수의 서너 배 월급을 받으면서 외부 간섭 없이 오로지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었던 연구환경은 지금도 연구자들 사이에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다. 이런 KIST의 연구환경은 국내외에서 최고의 인재들을 불러 모았으며, 이들은 지난 50년 KIST가 약 600조원에 달하는 경제·사회적 파급효과를 창출하며 우수한 성과를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KIST의 50년의 세월 안에는 영광의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에 의해 원치 않는 통합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겪기도 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 역시 저성장 기조와 치열한 첨단 기술 경쟁 속에 KIST에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안겨줄 전망이다. KIST가 앞으로 성공적으로 나아갈 방안을 찾기 위해 1967년 110번째로 KIST에 들어가 평생을 함께한 김은영 KIST 전 원장과 1968년 141번째로 KIST 들어가 전산개발실장 등을 역임하고 학계에 진출한 안문석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그리고 현재 KIST의 수장인 이병권 원장이 만나 KIST의 과거를 되짚어보고 미래를 얘기했다.
<참석자>
김은영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안문석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이병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안경애 디지털타임스 생활과학부장(사회)
▷사회=초기 KIST는 국내외 과학기술 인재를 모으는 데 각별한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두 분은 어떻게 KIST와 인연을 맺게 됐나.
▷안문석=1968년 KIST 전산실 창립 멤버로 참여하게 됐다. 1967년 서울대학교에서 해외 유학을 다녀오면 교수로 임용하는 프로그램에 뽑혔다. 당시 한 연구소 인턴을 하고 있는데 성기수 박사가 컴퓨터를 하는 것을 봤다. 그걸 보고 관심을 갖다가 성 박사가 1967년 말에 KIST에 전산실을 만들 때 같이 가자고 해서 학교를 뿌리치고 창립 멤버로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 왜 교수 자리를 차고 가냐는 얘기를 많이 했지만, 앞으로는 KIST가 중심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KIST에서 주로 정부 쪽 전산화를 담당했고, 유학을 갔다가 1977년 다시 돌아와 전산개발실장을 맡아 소프트웨어 개발을 총괄했다. 이후 KIST가 KAIST와 통합되면서 전처럼 자유롭고 신바람 나는 연구 분위기가 없어져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만 36세였는데 고대에서 정교수 자리를 줬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처우였는데, KIST에서 성과를 많이 내서 그런 것 같다. KIST는 마음의 고향이고, KIST에서의 경험이 인생의 바탕이 되고 있다.
▷김은영=독일에서 1966년 박사 학위를 따고 1967년 1월에 귀국했다. 원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공과에 교수 발령이 예정돼 있었는데, 다른 학과 교수들의 견제를 받아 6개월을 강사로 생활했다. 당시 독일에는 KIST 설립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최형섭 소장을 만났는데 KIST 이야기를 하면서 당장 오라고 했다. 당시 KIST에는 고분자 전문가가 없어 당장 연구를 못 하게 되면 바텔연구소라도 보내주겠다고 했다. 1967년 10월 2일에 발령을 받고 1969년 1월부터 6개월간 바텔연구소에 가서 당시 금성사가 의뢰한 라디오 인쇄회로 기판을 만드는 연구를 했다. 당시만 해도 금성사가 조그만 라디오를 조립 생산하고, LG화학이 치약과 플라스틱 가공 공장 하나씩 갖고 바가지 등을 생산하던 시대였다. 기업들이 연구개발(R&D)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주력 부품은 전부 일본에서 수입하고 중소기업은 외국에서 잘 팔리는 것을 그대로 모방해서 파는 것이 전부였다.
▷사회=KIST 설립 초창기의 분위기나 연구환경은 어땠는가.
▷안문석=KIST 초창기 당시에는 대학에 전산과가 없어 우리가 교육반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가르칠 사람이 없어 학생 중에서 조교를 임명해 강의를 시키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KIST 전산실은 한국 정보통신기술(ICT)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대학보다도 이쪽에서 인재를 더 많이 양성했다. 앞으로 KIST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도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다.
▷김은영=전자통신연구소는 초창기 KIST의 핵심 파트였다. 이 연구소가 대덕에 내려가 현재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가 됐다. 반도체와 전자교환기(TDX) 등이 모두 KIST에서 시작된 연구다.
▷안문석=KIST가 굉장히 성공한 연구소라는 것은 스핀오프 된 전문연구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중요한 전문연구소는 대부분 KIST에서 발전한 곳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인기 있는 연구 분야를 다 분리하면서 연구 인력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한동안은 KIST에 공동화 위기가 왔다. 하지만 지금 보면 오히려 기회였던 것 같다. 종합적·융합적 연구가 중요해진 만큼 다시 KIST가 중심에 서서 전문연구소들을 이끌고 종합 연구를 하는 체계로 가야 한다.
▷사회=당시 KIST의 사람과 연구기관을 키워내는 역량은 어디서 나왔는가.
▷안문석=KIST를 생각하면 박정희 대통령과 최형섭 소장의 역할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최 소장 경영철학이 아주 중요하다. 첫 번째 연구소는 감사를 받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KIST 육성법 제정 당시 최 소장이 연구소가 감사를 받기 시작하면 연구원들이 감사 대비만 해야 한다고 박 대통령에게 말했더니 국회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법을 어떻게 다시 바꿀 수 있느냐고 했다. 최 소장이 그러면 자신이 관두겠다고 하자 박 대통령이 직접 국회에 가서 어떻게 해보라고 지시했다. 개정안을 들고 가서 최 소장이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야당에 한 의원이 호의적으로 도와줘 공표도 되기 전에 다시 법을 바꿔 육성법을 통과시켰다. 그 이후로 KIST에 있는 동안 한 번도 감사를 받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방만하게 경영을 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철저하게 책임과 권한을 줬다. 최 소장은 늘 직원들을 모아놓고 연구는 좋아 미쳐서 하는 것이지 돈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지금 생각하기에도 연구는 영수증 내고 감사하고 그래서는 안된다. 당시 KIST 회계는 연구비의 5% 안에서는 맘대로 쓰도록 경비 처리를 해줬다. 팀장이 연구를 총괄하고 위촉 연구원도 마음대로 데려왔다. 연구를 잘하는 연구실은 금방 규모가 커졌다. 또 한 가지는 반드시 기업과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KIST에 오면 3년 간은 연구비를 지원해줬다. 이 기간 안에 기업체와 계약이 이뤄져야 계속 지원을 해줬기 때문에 연구원들이 기업체를 직접 찾아다녔다. 마지막 철학이 KIST 연구원들은 절대 유학을 안 보낸다는 것이었다. 가장 훌륭한 유치 과학자를 모셨으니 그분들 밑에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KIST에서 재직 중에 유학을 간 첫 번째 연구원인데, 이 일로 최 소장과 엄청나게 싸웠다.
▷사회=잘 나가던 KIST에도 위기가 있었다는 데 어떤 일이었나.
▷김은영=전두환 정권이 들어서 KIST와 KAIS(현 KAIST)를 통폐합했는데, 당시 KAIS는 설립된 지 5년 밖에 안돼 교수도 모자라는 상황이었고 KIST는 규모가 컸다. 이 둘을 통합하면서 KAIS 교수에게 원장을 시키고 이 중 몇 명은 장관으로 가서 계속 그쪽 중심으로 몰아갔다. 덩치가 컸던 KIST가 끌려다니고 있는데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서 사랑을 받던 기관이 홀대를 받는다. 더 큰 위기는 KAIST가 커지면서 공간이 부족해 대덕으로 가야 했는데, KIST를 데려가려고 했다. 1985년에 구체적인 이전 계획이 나와 KIST 부지를 벌써 어느 기관이 차지할지까지 나눠놨다. 당시 조정부장을 맡았었는데, 이 계획을 막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결국 전 대통령에게 KIST는 남는 것으로 도장을 받고 나서야 연구소로 돌아갔다. 만약 이때 KIST가 같이 내려갔다면 KAIST 옆 조그만 부지에 남아 연구 분야를 다른 전문연구소에 다 나눠주고 공중분해 될 뻔했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막았다. KIST가 분리된 후 하향 곡선이 다시 상승 곡선으로 바뀌었는데, 만약 통합 없이 계속 올라갔다면 엄청난 연구소가 됐을 것이다.
▷안문석=1981년 고려대로 가게 된 이유는 통폐합 이후 분위기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조직은 두 개인데 한 사람이 원장과 소장을 겸직하도록 임명을 해놨다. 좀 있으니 감사원에서 감사를 나왔다. 왜 정부에서 돈을 받고 감사를 안 받느냐는 것이었다. 막상 감사를 나오니 일을 열심히 한 사람만 욕을 먹고 오히려 일을 안 하던 사람은 멀쩡했다.
▷김은영=이 일 때문에 1980년부터 KIST 연구인력이 학계로 엄청나게 빠져나갔다. 김대중 정권 때는 연구원 정년을 61세로 낮췄다. 당시 대학교수와 교원도 정년을 같이 낮춘다고 했다가 반발에 부딪혀 못했다. 연구원들은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나면 40대에 가까운데, 정년이 낮아지니 실제로 20여 년 밖에 일을 못 한다. 다음 노무현, 이명박 정권에서도 정년을 계속 환원해주겠다고 했지만, 부분적으로 우수 연구자만 65세까지 늘리는 것에 그쳤다. 일본과 미국은 정년이 65세고, 유럽은 기한이 없다. 더구나 연구원들은 연금 혜택도 없다. 이런 환경에는 아주 우수한 사람들이 오기 힘들다. 연구는 인재가 가장 중요한 데, 혹시 연구원에 오더라도 연구결과가 좋으면 학교로 빠진다. 이번 정권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해 매우 아쉽다.
▷안문석=과학기술이 발전하기 위해선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생태계가 끝난 느낌이다. 연구는 사람이 하는 건데, 좋은 사람이 오려면 그럴만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과거 석사로 KIST에 왔는데 서울대 교수보다도 월급이 많았다. 이렇게 대우를 해주고 권한을 주면 책임감 있게 일을 한다. 당시에는 24시간 연구실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 모두 자발적으로 연구했다.
▷김은영=1969년 당시에는 연말이 되면 청와대에서 직접 봉투를 보내왔다. 당시 월급이 3만원 정도였는 데, 10만원씩 들어있었다. 연구원들의 사기가 안 오를 수가 없었다.
▷안문석=당시에는 KIST 출입증을 갖고 있으면 위반을 해도 교통순경들이 눈 감아줄 정도였다. 옳은 사례는 아니지만 그만큼 국민들에게 나라를 구할 사람들이란 대접을 받았다는 의미다. 우리나라가 먹고 살 길은 과학기술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다시 해야 한다. 생각만 바꾸면 된다. 연구소를 일반 기관처럼 규제하거나 감시하지 말고 믿고 신바람 나는 분위기로 만들어주면 얼마든지 다시 갈 수 있다.
▷이병권=연구자들은 자긍심을 먹고 산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출연연의 자율을 중시하는 시각이 매우 중요하고, 출연연 역시 그런 기대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한다. 이런 생태계가 생겨야 하는데, 아직 많이 아쉬운 상황이다.
▷사회=KIST 설립 초기에도 이슈는 자율적인 연구환경과 기업과의 협업, 인재 확보였고, 이 문제들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숙제로 남아있다.
▷안문석=KIST는 성공적인 기관 형성 사례로 외국 박사논문도 KIST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많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KIST가 새마을운동과 함께 굉장히 주목받는 연구 주제다.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 연구소를 다시 만들기는 힘들다. KIST가 중심이 돼 우리나라 연구의 어젠다를 세팅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전문가들이 모여 50년 앞을 내다보고 전략을 짜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KIST를 제대로 된 두뇌집단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병권=KIST가 그동안 국가 발전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 어떻게 기여할지 생각하면 주변 환경이 설립 당시와 많이 달라졌다. 기업은 스스로 성장동력을 만들어내고 있고, 대학도 연구수준이 매우 높다. 그런 가운데 KIST가 어떤 역할을 해나가야 할지 많은 고민이 있다. 과학기술이 각 나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기 다르다. 캐나다같이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는 우리같이 치열하게 안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이 생존이다. 지금까지 잘해왔지만,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많이 바뀌었다. 과거 보호하고 육성하던 것들이 지금은 관리만 남고 비용으로 생각한다. 많은 국민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KIST가 큰 기술, 미래 기술에 도전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실제로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KIST도 여전히 많은 구성원이 '생계형 R&D'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큰일을 하기는 어렵다. KIST는 다른 기관과 달리 거의 내부에서 원장이 나왔다. 큰 틀에서 연속성을 갖고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출연연이다. 치매 조기진단 기술을 개발한 것도 7∼8년 선행연구를 한 뒤 약 3년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가능했다. 다른 기관에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고 KIST니까 가능하다고 얘기한다. 앞으로 규모가 작은 연구는 하지 않겠다고 전임 원장들부터 계속 얘기하고 있다. 금액도 5000만원에서 점점 올라가 올해는 2억원 이하는 안 하려 한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큰일에 집중하고, 힘들어도 실현했을 때 파급력이 큰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연구원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정책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이 70%는 이런 일에 집중하고, 30%는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마지막으로 KIST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안문석=연구는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맞다. 연구자는 돈보다 연구가 좋아야 한다. '일 만 시간의 법칙'을 기억하라. 그 분야에 만 시간을 지내면 뭘 해도 제일 잘한다. 그런 생각으로 한국의 미래 50년이 KIST에 있다는 자긍심을 갖고 한 분야에 오랫동안 매진했으면 좋겠다.
▷김은영=연구자는 한 우물을 파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한 연구는 보고서로 끝난다. 주변 사람에게 욕을 먹더라도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이 결국 좋은 성과를 낸다. 먹고 살기 위해 이것저것 하면 시간과 돈만 낭비하고 좋은 결과가 안 나온다. 다른 일에 관심 두지 말고 연구에 전념하라. 그럼 연구 수명도 길어지고 나중에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연구자는 연구만 하는 게 좋다.
정리=남도영기자 namdo0@dt.co.kr
사진=유동일기자 eddie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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