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진이(眞e)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열차(TSR: Trans―Siberian Railway)를 탔습니다. 매년 1억5000만명이 이용하는 TSR은 100여년전 유배길을 떠나는 러시아인, 광산에 일하러 가는 노동자들이 주 승객이었다지요. 스탈린 체제하의 사할린 동포들에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던 한 맺힌 기찻길이기도 합니다.
TSR은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총 길이가 9300여㎞. 현대식 열차로도 꼬박 6박 7일이 걸리고, 두 번 왕복하면 세계를 한바퀴 돈 셈이랍니다.
부산아시안게임 이후 남·북한 화해 무드가 더욱 무르익어 한반도 종단철도(TKR)가 TSR와 연결되면,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겠지요. 그 날을 고대하며 러시아 아무르강 연안의 하바로프스크로 향했습니다. 진이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기는 2회에 나눠 싣겠습니다.
■8월 21일 시베리아로 가는 길목, 하바로프스크
아시아나항공(OZ) 572편으로 3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가깝다니. 마음의 거리가 물리적 거리보다 멀었나 봅니다. 서울과의 시차는 2시간.
시원스런 레닌 광장과 제정러시아 때 세워진 고풍스런 건물을 지나 인뚜리스트 호텔 앞에 차가 섭니다. 차에 탄 채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낯익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텔 앞 건물과 도로 공사장에선 북한 사투리를 쓰는 대여섯명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구나. 가슴이 뭉클합니다. 첫 만남이 북녘 동포라니. 잠시 후 호텔 방으로 향하면서 가슴에 배지를 단 또 다른 북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숙소가 제 옆방이군요. 인사를 건넸지만, 한 번 쳐다보더니 대꾸없이 돌아섭니다.
콤소몰 광장으로 나왔습니다. 광장과 동상이 많다고 하더니, 소문대로입니다. 눈을 감으니 혁명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군요. 꼭대기가 유난히 파란 교회가 있습니다. 외화벌이로 나온 북한 동포들이 많다던데, 그 교회도 북한 사람들이 지었다고 합니다.
아무르강에 가면 저녁 시간에 꼭 유람선을 타세요. 낙조가 멋집니다. 여름의 러시아는 밤 9시가 넘어야 해가 집니다. 유람선 2층에서 하늘과 강을 보는 게 지루해져 1층에 내려갔더니 꼬마부터 할머니까지 온가족이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습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춤을 춥니다. 러시아인들은 참으로 춤을 좋아하는군요.
■2일째, 횡단열차에 오르다
레닌 광장과 중앙시장을 둘러봤습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인 레닌 광장에선 아침부터 결혼식 사진을 찍는 신혼 부부들이 보기 좋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이혼율이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합니다. 20대 초반의 조혼(早婚)으로 인한 생활고와 남편의 음주벽이 주된 이혼 사유라나요. 그래도 저 사람들은 오랫동안 행복하길 빌어봅니다.
시장에는 역시 생기가 넘칩니다. 철갑상어·훈제연어·연어알... 식품점에는 한글 브랜드가 또렷한 ‘초코파이’와 컵라면 ‘도시락’이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러시아의 컵라면 소비량은 1억5000만개. 한 청년이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도시락’은 상표가 아니라 라면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까만 고려인 아주머니들, 정육점에서 고기를 파는 그림처럼 예쁜 러시아 처녀들, 쉬는 시간에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웨이트리스 아가씨 등 시장 사람들은 각양각색입니다.
횡단열차를 타려고 하바로프스크 역에 갔습니다. 역 구내 여기 저기에 북한 인공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북한 사람들이 많이 보이네요. 오늘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하바로프스크에 온다는군요. 김 위원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뒤 이날 하바로프스크를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오후 3시 30분 횡단열차에 올랐습니다. 바이칼 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까지는 3336㎞. 약 60시간, 2박 3일이 걸린다는군요. 열차가 출발합니다. 가슴이 설렙니다. 차창 밖으론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흰 자작나무가 산을 빼곡이 채우고 있네요. 나무는 지난해 하바로프스크가 우리나라에 수출한 전체 물량의 50%를 넘게 차지한다고 합니다. 천혜의 땅입니다. 그림 같은 풍경을 안주로 삼아 40도가 넘는 보드카 한잔을 입에 털어넣고 기차 바퀴의 덜컹거리는 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을 청합니다.
■3일째, 열차안에서.
열차 속의 시간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하염없이 달리니까요. 벽안의 23세 청년 알렉스와 꼴리야를 만났습니다. 모스크바에 사는 동생을 찾아가는 알렉스와 그의 친구 꼴리야는 직업이 없지만 마음은 여유로워 보입니다. 처음에는 무뚝뚝해 보였지만 한 걸음 다가가니 금새 마음의 빗장을 열고 자기 얘기를 합니다. 무척 살갑습니다. 머리를 빡빡 깎은 꼴리아는 영어는 못하지만, 눈빛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통하나 봅니다.
횡단열차에서의 식사는 중간 중간 역에 서는 장을 이용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집에서 직접 만든 ‘피로슈키’(고기나 채소를 싸서 기름에 튀긴 만두)와 찐 감자, 도시락(컵라면)과 1.5ℓ짜리 패트병에 맥주를 담아 팝니다. 싸고 맛도 좋습니다. 열차 중간의 식당칸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호주의 여행정보지 ‘론리 플래닛’은 이 식당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식만을 먹는 곳이 아니라 카드도 하고 수다도 떠는 사교장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구요. 주변을 둘러보니, 삼삼오오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서빙하는 식당 아줌마 타타레노바에게 100루블(약 4000원)을 줬더니 즉석에서 멋들어지게 바이올린을 켭니다. 식당칸을 여러번 드나들었더니 타타레노바가 우리를 보고 미소도 지어줍니다.
다른 ‘쿠페’(4인용 객실)를 들여다보니 보드카와 맥주를 마시며 여유있게 카드놀이를 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긴긴 시간 열차를 타고 갈 때 꼭 챙기는 것이 술이랍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한 잔씩 권하면서 이런 저런 놀이와 얘기를 즐기지요. 따분할 것 같았던 열차안 생활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술이 곁들여지면서 즐거움으로 채워집니다. (하편에 계속)
TSR은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총 길이가 9300여㎞. 현대식 열차로도 꼬박 6박 7일이 걸리고, 두 번 왕복하면 세계를 한바퀴 돈 셈이랍니다.
부산아시안게임 이후 남·북한 화해 무드가 더욱 무르익어 한반도 종단철도(TKR)가 TSR와 연결되면,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겠지요. 그 날을 고대하며 러시아 아무르강 연안의 하바로프스크로 향했습니다. 진이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기는 2회에 나눠 싣겠습니다.
■8월 21일 시베리아로 가는 길목, 하바로프스크
아시아나항공(OZ) 572편으로 3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가깝다니. 마음의 거리가 물리적 거리보다 멀었나 봅니다. 서울과의 시차는 2시간.
시원스런 레닌 광장과 제정러시아 때 세워진 고풍스런 건물을 지나 인뚜리스트 호텔 앞에 차가 섭니다. 차에 탄 채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낯익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텔 앞 건물과 도로 공사장에선 북한 사투리를 쓰는 대여섯명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구나. 가슴이 뭉클합니다. 첫 만남이 북녘 동포라니. 잠시 후 호텔 방으로 향하면서 가슴에 배지를 단 또 다른 북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숙소가 제 옆방이군요. 인사를 건넸지만, 한 번 쳐다보더니 대꾸없이 돌아섭니다.
콤소몰 광장으로 나왔습니다. 광장과 동상이 많다고 하더니, 소문대로입니다. 눈을 감으니 혁명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군요. 꼭대기가 유난히 파란 교회가 있습니다. 외화벌이로 나온 북한 동포들이 많다던데, 그 교회도 북한 사람들이 지었다고 합니다.
아무르강에 가면 저녁 시간에 꼭 유람선을 타세요. 낙조가 멋집니다. 여름의 러시아는 밤 9시가 넘어야 해가 집니다. 유람선 2층에서 하늘과 강을 보는 게 지루해져 1층에 내려갔더니 꼬마부터 할머니까지 온가족이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습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춤을 춥니다. 러시아인들은 참으로 춤을 좋아하는군요.
■2일째, 횡단열차에 오르다
레닌 광장과 중앙시장을 둘러봤습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인 레닌 광장에선 아침부터 결혼식 사진을 찍는 신혼 부부들이 보기 좋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이혼율이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합니다. 20대 초반의 조혼(早婚)으로 인한 생활고와 남편의 음주벽이 주된 이혼 사유라나요. 그래도 저 사람들은 오랫동안 행복하길 빌어봅니다.
시장에는 역시 생기가 넘칩니다. 철갑상어·훈제연어·연어알... 식품점에는 한글 브랜드가 또렷한 ‘초코파이’와 컵라면 ‘도시락’이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러시아의 컵라면 소비량은 1억5000만개. 한 청년이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도시락’은 상표가 아니라 라면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까만 고려인 아주머니들, 정육점에서 고기를 파는 그림처럼 예쁜 러시아 처녀들, 쉬는 시간에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웨이트리스 아가씨 등 시장 사람들은 각양각색입니다.
횡단열차를 타려고 하바로프스크 역에 갔습니다. 역 구내 여기 저기에 북한 인공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북한 사람들이 많이 보이네요. 오늘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하바로프스크에 온다는군요. 김 위원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뒤 이날 하바로프스크를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오후 3시 30분 횡단열차에 올랐습니다. 바이칼 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까지는 3336㎞. 약 60시간, 2박 3일이 걸린다는군요. 열차가 출발합니다. 가슴이 설렙니다. 차창 밖으론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흰 자작나무가 산을 빼곡이 채우고 있네요. 나무는 지난해 하바로프스크가 우리나라에 수출한 전체 물량의 50%를 넘게 차지한다고 합니다. 천혜의 땅입니다. 그림 같은 풍경을 안주로 삼아 40도가 넘는 보드카 한잔을 입에 털어넣고 기차 바퀴의 덜컹거리는 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을 청합니다.
■3일째, 열차안에서.
열차 속의 시간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하염없이 달리니까요. 벽안의 23세 청년 알렉스와 꼴리야를 만났습니다. 모스크바에 사는 동생을 찾아가는 알렉스와 그의 친구 꼴리야는 직업이 없지만 마음은 여유로워 보입니다. 처음에는 무뚝뚝해 보였지만 한 걸음 다가가니 금새 마음의 빗장을 열고 자기 얘기를 합니다. 무척 살갑습니다. 머리를 빡빡 깎은 꼴리아는 영어는 못하지만, 눈빛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통하나 봅니다.
횡단열차에서의 식사는 중간 중간 역에 서는 장을 이용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집에서 직접 만든 ‘피로슈키’(고기나 채소를 싸서 기름에 튀긴 만두)와 찐 감자, 도시락(컵라면)과 1.5ℓ짜리 패트병에 맥주를 담아 팝니다. 싸고 맛도 좋습니다. 열차 중간의 식당칸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호주의 여행정보지 ‘론리 플래닛’은 이 식당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식만을 먹는 곳이 아니라 카드도 하고 수다도 떠는 사교장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구요. 주변을 둘러보니, 삼삼오오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서빙하는 식당 아줌마 타타레노바에게 100루블(약 4000원)을 줬더니 즉석에서 멋들어지게 바이올린을 켭니다. 식당칸을 여러번 드나들었더니 타타레노바가 우리를 보고 미소도 지어줍니다.
다른 ‘쿠페’(4인용 객실)를 들여다보니 보드카와 맥주를 마시며 여유있게 카드놀이를 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긴긴 시간 열차를 타고 갈 때 꼭 챙기는 것이 술이랍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한 잔씩 권하면서 이런 저런 놀이와 얘기를 즐기지요. 따분할 것 같았던 열차안 생활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술이 곁들여지면서 즐거움으로 채워집니다. (하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