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사종)와 함께 송도를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그의 부모가 누구이며 아내가 있고 없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답니다. 곧 쓰러질 백옥(평민들의 누추한 집)이라도 그와 함께라면 하늘이 곧 이불이고 땅이 바로 베개일 테니까요. 그 역시 흔쾌히 나의 뜻을 받아들였지요. 어떤 이는 이때 내가 그에게 딱 육 년만 동거를 하자고 했다하고, 또 어떤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집에서 삼 년, 내 집에서 삼 년을 살기로 약조했다고 떠든다면서요.
이런 소문은 내 삶을 숫자로 묶어 조롱하려는 것이므로 논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양곡과의 만남도 한 달이란 기간에 맞추지 않았던가요. 양곡이 한 달 만에 황모(황진이) 곁을 떠나면 양곡이 이긴 것이고 황보가 양곡을 한 달 넘게 붙들면 황모가 이긴 것이라니, 이 얼마나 치졸한 일입니까. 이사종과의 동거도 마찬가집니다.
속 깊은 사랑을 가리는 숫자놀음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지요. 나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와 대부들의 애꿎은 돌팔매질입니다. 남자가 즐기는 것은 논할 만하지만 여자가 즐기는 것은 말할 수 없다고 믿는 속 좁은 인간들. 그들의 눈에는 내가 목강(음란한 여인의 대명사)의 환생으로 보였을 테지요”(소설 ‘나, 황진이’ 중에서)
나, 진이(眞e)는 역사소설 ‘나, 황진이’의 작가 김탁환 교수(건양대)를 만났습니다.
조선 중기 문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온 김 교수는 ‘나, 황진이’에서 16세기 중조때의 여류시인 황진이의 참모습을 온전히 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지요. ‘나, 황진이’는 초판이 발간 사흘만에 동이나 재판 인쇄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무릇 고금을 막론하고 남성들은 ‘(남자보다) 뛰어난 여자’를 잘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황진이라고 하면 으레 ‘미모와 기계(교묘한 꾀)가 뛰어났던 송도(오늘날의 개성)의 명기(名妓)’로만 생각하지요. 아니면 빼어난 용모로 뭇 남성들과 ‘놀아난’ 색정녀쯤으로 알까요.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김 교수의 ‘나, 황진이’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황진이 관련 소설, 기록이나 오페라 등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황진이는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사교클럽을 운영하며 빅토르 위고, 쇼팽, 리스트 등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조르주상드, 19세기 말~20세기 초 사회주의 혁명의 탁월한 이론가이자 행동가였던 폴란드인 로자 룩셈부르크, 아니면 독일인으로 태어나 독일의 전체주의와 유대인의 시오니즘 모두를 비판하면서 20세기 정치철학사의 한 획을 그은 한나 아렌트에 견줄 수 있는 여류 지식인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아직은 소수설이지만, 머지 않아 다수설로 자리잡을 것”이라면서 황진이에 관한 야사의 허구성을 하나하나 짚었습니다.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 등에는 황진이가 당시 선전관이란 관직에 있었던 이사종과 며칠을 지낸 뒤 6년간의 계약결혼을 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또 임방(1640~1724)의 수촌만록(水村漫錄)에는 평소 ‘여색에 빠지면 남자가 아니지’라고 말했던 양곡이 친구들에게 “내가 이 계집(황진이)과 더불어 30일만 함께 지내고 30일이 지나면 즉시 헤어지겠네. 만약 이 기한이 지나서 하루라도 더 머문다면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좋네”라고 호언장담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양곡은 황진이와 헤어지기 전날 황진이의 시 한 수를 듣고는 “에라! 내가 사람이 아니지”라고 눌러앉았다는 것이지요.
“황진이의 사랑을 한낱 숫자놀음으로 왜곡했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사랑하면 만나 같이 살고 헤어졌던 황진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아마도 ‘독해 불능’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황진이의 입을 통해 이 같은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김 교수가 더욱 기막혀 하는 것은 지족선사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황진이가 30년 동안의 면벽수도 끝에 ‘생불’이라 불렸던 지족사의 주지스님인 지족선사를 유혹해 파계승으로 전락시켰다는 얘기이지요.
“한마디로 황진이에 대한 ‘모독’입니다.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찾아간 때는 나이가 3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족사는 바다가 내려다보일 정도로 산 꼭대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30대 중반의 여인이 거문고를 들고 고승을 유혹하러 산사를 찾아간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황진이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백두산·금강산·지리산 등지를 돌아다니는 방황 끝에 다시 송도로 들어와 ‘스승’을 찾아 돌아다닌 것으로 보입니다. 지족선사를 찾아갔지만 스승으로 모시지 않고, 꽃못(화담·서경덕이 제자들을 가르친 곳)을 찾아가 서경덕의 문하에 들었던 것이지요”
남성 중심의 야사는 30대 중·후반의 ‘늙은 황진이’를 인정하지 않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게 김 교수의 분석입니다.
여기서 김 교수가 황진이를 조선 중기의 걸출한 철학자이자 문인이었던 서경덕(1489~1546)의 문하생으로 본 것은 참으로 탁월한 시각입니다. 훗날 성리학 주기파의 선구적 존재로 알려진 서경덕은 임진왜란(1592~) 이전 조선 중기의 다양한 학풍을 개방적으로 소화해낸 인물입니다.
실제 서경덕의 제자들은 무척 다양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동인의 영수가 된 허엽(허성·봉·난설헌·균 형제의 아버지) 등 정통관료,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과 같은 도교인, 서얼, 스님 등 다양한 출신들이 서경덕의 제자였습니다. 기생 출신인 황진이가 서경덕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던 데서 개성을 중심으로 한 서경덕 학파의 개방적 학풍을 엿볼 수 있지요.
김 교수는 소설에서 황진이를 통해 서경덕을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화담 서경덕)께선 나보다 더 당신의 뜻에 반하는 이들까지 놀랍게도 넉넉히 품어주셨습니다. 초엽(앝은 술잔)같은 물음도 버리시는 법이 없었지요. 꽃못의 깊이는 헤아릴 길이 없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랍니다”
황진이가 프랑스의 조르주상드에 비견될 수 있는 이유는 서경덕 문하에서 황진이가 했을 법한 역할 때문입니다. 서경덕은 돈과 권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상가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대부분 돈 벌이와는 별 상관이 없었지요.
“황진이는 당시 송도의 거상들과 많은 교류를 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서경덕 학파의 대모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10대 시절 서경덕 문하에 들어왔을 때 황진이가 30대 후반이었으니 황진이는 화담파의 ‘대모’로서 전국에서 몰려온 문하생들을 먹여살리는 일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 교수는 황진이에게서 ‘탈주(脫走)’의 이미지를 봤다고 말했습니다. 굴레를 벗어 자유롭고자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체험하고 탐구하려는 호기심이 강한 여성이란 것이지요.
“신을 벗어 양손에 하나씩 쥐어봅니다. 맨발의 자유로운 지혜를 얻기 위함이지요. 발바닥에 닿는 흙과 돌의 감촉이 도끼로 뒤통수를 맞은 듯 쩌릿쩌릿합니다”
신을 신고는 맨발의 느낌을 알 수 없습니다. 혹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사대부의 갑옷을 입고 황진이를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소문은 내 삶을 숫자로 묶어 조롱하려는 것이므로 논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양곡과의 만남도 한 달이란 기간에 맞추지 않았던가요. 양곡이 한 달 만에 황모(황진이) 곁을 떠나면 양곡이 이긴 것이고 황보가 양곡을 한 달 넘게 붙들면 황모가 이긴 것이라니, 이 얼마나 치졸한 일입니까. 이사종과의 동거도 마찬가집니다.
속 깊은 사랑을 가리는 숫자놀음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지요. 나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와 대부들의 애꿎은 돌팔매질입니다. 남자가 즐기는 것은 논할 만하지만 여자가 즐기는 것은 말할 수 없다고 믿는 속 좁은 인간들. 그들의 눈에는 내가 목강(음란한 여인의 대명사)의 환생으로 보였을 테지요”(소설 ‘나, 황진이’ 중에서)
나, 진이(眞e)는 역사소설 ‘나, 황진이’의 작가 김탁환 교수(건양대)를 만났습니다.
조선 중기 문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온 김 교수는 ‘나, 황진이’에서 16세기 중조때의 여류시인 황진이의 참모습을 온전히 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지요. ‘나, 황진이’는 초판이 발간 사흘만에 동이나 재판 인쇄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무릇 고금을 막론하고 남성들은 ‘(남자보다) 뛰어난 여자’를 잘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황진이라고 하면 으레 ‘미모와 기계(교묘한 꾀)가 뛰어났던 송도(오늘날의 개성)의 명기(名妓)’로만 생각하지요. 아니면 빼어난 용모로 뭇 남성들과 ‘놀아난’ 색정녀쯤으로 알까요.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김 교수의 ‘나, 황진이’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황진이 관련 소설, 기록이나 오페라 등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황진이는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사교클럽을 운영하며 빅토르 위고, 쇼팽, 리스트 등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조르주상드, 19세기 말~20세기 초 사회주의 혁명의 탁월한 이론가이자 행동가였던 폴란드인 로자 룩셈부르크, 아니면 독일인으로 태어나 독일의 전체주의와 유대인의 시오니즘 모두를 비판하면서 20세기 정치철학사의 한 획을 그은 한나 아렌트에 견줄 수 있는 여류 지식인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아직은 소수설이지만, 머지 않아 다수설로 자리잡을 것”이라면서 황진이에 관한 야사의 허구성을 하나하나 짚었습니다.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 등에는 황진이가 당시 선전관이란 관직에 있었던 이사종과 며칠을 지낸 뒤 6년간의 계약결혼을 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또 임방(1640~1724)의 수촌만록(水村漫錄)에는 평소 ‘여색에 빠지면 남자가 아니지’라고 말했던 양곡이 친구들에게 “내가 이 계집(황진이)과 더불어 30일만 함께 지내고 30일이 지나면 즉시 헤어지겠네. 만약 이 기한이 지나서 하루라도 더 머문다면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좋네”라고 호언장담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양곡은 황진이와 헤어지기 전날 황진이의 시 한 수를 듣고는 “에라! 내가 사람이 아니지”라고 눌러앉았다는 것이지요.
“황진이의 사랑을 한낱 숫자놀음으로 왜곡했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사랑하면 만나 같이 살고 헤어졌던 황진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아마도 ‘독해 불능’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황진이의 입을 통해 이 같은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김 교수가 더욱 기막혀 하는 것은 지족선사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황진이가 30년 동안의 면벽수도 끝에 ‘생불’이라 불렸던 지족사의 주지스님인 지족선사를 유혹해 파계승으로 전락시켰다는 얘기이지요.
“한마디로 황진이에 대한 ‘모독’입니다.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찾아간 때는 나이가 3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족사는 바다가 내려다보일 정도로 산 꼭대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30대 중반의 여인이 거문고를 들고 고승을 유혹하러 산사를 찾아간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황진이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백두산·금강산·지리산 등지를 돌아다니는 방황 끝에 다시 송도로 들어와 ‘스승’을 찾아 돌아다닌 것으로 보입니다. 지족선사를 찾아갔지만 스승으로 모시지 않고, 꽃못(화담·서경덕이 제자들을 가르친 곳)을 찾아가 서경덕의 문하에 들었던 것이지요”
남성 중심의 야사는 30대 중·후반의 ‘늙은 황진이’를 인정하지 않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게 김 교수의 분석입니다.
여기서 김 교수가 황진이를 조선 중기의 걸출한 철학자이자 문인이었던 서경덕(1489~1546)의 문하생으로 본 것은 참으로 탁월한 시각입니다. 훗날 성리학 주기파의 선구적 존재로 알려진 서경덕은 임진왜란(1592~) 이전 조선 중기의 다양한 학풍을 개방적으로 소화해낸 인물입니다.
실제 서경덕의 제자들은 무척 다양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동인의 영수가 된 허엽(허성·봉·난설헌·균 형제의 아버지) 등 정통관료,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과 같은 도교인, 서얼, 스님 등 다양한 출신들이 서경덕의 제자였습니다. 기생 출신인 황진이가 서경덕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던 데서 개성을 중심으로 한 서경덕 학파의 개방적 학풍을 엿볼 수 있지요.
김 교수는 소설에서 황진이를 통해 서경덕을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화담 서경덕)께선 나보다 더 당신의 뜻에 반하는 이들까지 놀랍게도 넉넉히 품어주셨습니다. 초엽(앝은 술잔)같은 물음도 버리시는 법이 없었지요. 꽃못의 깊이는 헤아릴 길이 없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랍니다”
황진이가 프랑스의 조르주상드에 비견될 수 있는 이유는 서경덕 문하에서 황진이가 했을 법한 역할 때문입니다. 서경덕은 돈과 권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상가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대부분 돈 벌이와는 별 상관이 없었지요.
“황진이는 당시 송도의 거상들과 많은 교류를 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서경덕 학파의 대모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10대 시절 서경덕 문하에 들어왔을 때 황진이가 30대 후반이었으니 황진이는 화담파의 ‘대모’로서 전국에서 몰려온 문하생들을 먹여살리는 일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 교수는 황진이에게서 ‘탈주(脫走)’의 이미지를 봤다고 말했습니다. 굴레를 벗어 자유롭고자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체험하고 탐구하려는 호기심이 강한 여성이란 것이지요.
“신을 벗어 양손에 하나씩 쥐어봅니다. 맨발의 자유로운 지혜를 얻기 위함이지요. 발바닥에 닿는 흙과 돌의 감촉이 도끼로 뒤통수를 맞은 듯 쩌릿쩌릿합니다”
신을 신고는 맨발의 느낌을 알 수 없습니다. 혹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사대부의 갑옷을 입고 황진이를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