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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의 정치사기]홍범도 장군을 더 이상 정치에 끌어들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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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의 정치사기]홍범도 장군을 더 이상 정치에 끌어들이지 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연합뉴스>

최근 독립군 대장인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육군사관학교는 홍 장군의 '소련 공산당' 이력과 '자유시 참변' 연관 의혹을 명분으로 이전 결정을 내렸다. 이를 둘러싼 갑론을박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진영논리에 충실한 이념 싸움만 가득하다. 홍 장군이 살았던 시대의 국제정세와 개인사정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분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시 참변과 홍범도=일단 논란이 되고 있는 지점부터 살펴보자. 홍 장군은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끝난 이듬해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함께 러시아령 자유시로 갔고, 이곳에서 자유시참변을 겪는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이르쿠츠크파)가 상하이파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고 몰살시킨 사건이다. 국방부는 홍 장군이 이와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학계의 시각은 다르다. 자유시 참변 연구의 권위자인 윤상원 전북대 교수의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 논문에 따르면, 홍 장군은 참변 소식을 듣고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고 통곡했다. 이는 실제 참변에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는 점을 방증한다.

참변을 처리하는 재판위원으로 활동할 때도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다만 재판자체가 이르쿠츠크파가 상하이파를 처벌하는 성격을 지녀 한계가 있었다. 결국 홍 장군은 참변 이후 군사지휘권으로부터 소외됐다. 윤 교수는 논문을 통해 "이후 장군으로서 여정을 끝마치게 된다"며 "홍범도 개인에게는 무척 불행한 일"이라고 평했다.

◇홍범도가 공산당에 가입한 이유=사실상 민간인이 된 홍 장군은 1923년 이후부터 이만(달네레첸스크), 스파스크-달리늬 진동촌, 한카이, 수청 등 연해주 지역을 돌며 집단 양봉업 농장에서 활동했다. 1937년까지 무려 14년이다.

이런 와중에 그는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다. 정부 여당은 이를 두고 "'독립투사 홍범도'도 맞지만 '공산당원 홍범도'도 지울 수 없는 사실"이라며 육사와 국군이 홍 장군을 추앙하는 게 온당치 않다는 주장을 한다. "스스로 공산주의 이념에 경도돼 있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홍범도 일지'와 '홍범도 자필 이력서' 등에 나온 입당 사정을 보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홍범도 장군 연구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이런 사료를 토대로 쓴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과 고려인 사회' 논문에 따르면, 홍 장군의 입당은 와구통 이만농촌의 한인 소비에트 회장 김용환이 주선한 것이라 한다.

다만, 사료의 한계로 입당 과정이 자세히 나와있진 않다. 만 60세가 된 1929년부터 연금생활에 들어갔다는 기록을 봤을 때, 연금을 타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 당시 홍 장군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부인과 딸이 있었다.

이후 홍 장군은 원동 각지의 도시와 농촌 고려인구락부, 군부대, 피오네르(소년단) 부대를 다니며 강연활동을 하며, 우수리스크에 주둔하고 있던 제76연대의 명예군인으로 적군기념일에 단골손님으로 초대받았다. 당시 홍 장군의 항일투쟁 역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덕이다. 강연 역시 공산당의 사상교육보단 항일 투쟁을 중심으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 장군은 1937년 9월 소련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공화국 사나리크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소도시 크즐오르다에 정착했다.
당시 홍 장군의 생활은 여유롭지 않았다. 3개월 간 90루블을 받고 병원의 경비로 일하기도 했다. 홍 장군의 사정을 안 지인들이 그에게 월 50루블을 받을 수 있는 수직원(수위장) 자리를 만들어줬다. 이 때문에 홍 장군은 연금(80루블)과 합하여 여유로운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결국 민간인 홍범도의 생애는 다른 고려인들과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홍범도는 빨치산(?)=홍 장군은 1941년 6월 독소전쟁 발발 때 '레닌 기치' 신문에 '이전 빠르찌산 - 홍범도' 명의로 '원쑤를 갚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글을 통해 지난 1919년 10월 수이푼 지역에서 6명의 러시아 빨치산들과 연합투쟁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조국' 소련을 위해 전선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국방부는 이를 두고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 빨치산으로 참가한 의혹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1920년대의 빨치산은 우리가 아는 빨치산과 개념 자체가 다르다. 프랑스어인 빨치산은 '동지' 또는 '당파'라는 뜻의 'parti'에서 유래된 말로 비정규군을 의미한다. 당시 홍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들은 조사표에 '의용병'이나 '빨치산'으로 참가했다고 기재했다.

홍 장군은 2년 뒤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 해 소련은 미국, 영국과 프랑스와 함께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 중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이다.

◇홍범도 흉상 이전은 정치이념 투쟁=그렇다면 홍 장군의 흉상 이전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저 홍범도가 무슨 당적을 지녔고, 단편적인 행동을 중심으로 판단한 것처럼 보인다. 홍 장군과 관련된 사료를 기반으로 한 다각도의 역사 해석은 배제되고, 소련 공산당을 지금의 반공 북한 체제 혹은 스탈린 체제와 연결시키는 오류도 범한다. 홍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을 두고도 '적극적인 공산주의자'라는 식의 해석을 첨부한다. 사료가 아닌 오로지 진영논리에만 입각해서 바라보는 인간상이다.

그러나 역사는 사실에 대한 명제의 진위를 놓고 다투는 학문이다. 최대한 사료와 구술에 근거한 본원적 주장과 검토가 교차하면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이념과 계급적인 제약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에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더 이상 저급한 정치투쟁의 장에 역사를 끌어들이지 마라.

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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