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타임스

 


[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용병은 전쟁 영웅인가, 전쟁터의 개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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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바빌론 함무라비법전 '용병대가' 규정
중세엔 간난했던 스위스, 용병 주요 배출국
교황청-스위스용병 관계 특별, 현재도 유지
네팔 구르카 용병, 영국군으로 한국전 참전
전후 美 블랙워터, 러 바그너그룹이 대표적
[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용병은 전쟁 영웅인가, 전쟁터의 개들인가
우크라이나 전쟁은 용병이 주역으로 활동한 첫 전쟁일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러시아 용병업체 바그너그룹이 대표적 사례다.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체첸 부대도 전쟁터에 본격 등장할 전망이다. 정규군은 그저 바라만 보고, 싸움은 프로급 '회사원 전사'들이 벌이는 형국이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용병, 그들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가장 오래된 직업

용병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다. 용병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의 파라오는 외국인 용병을 고용해 영토를 확장하고 적을 물리쳤다. 기원전 1800년경 바빌론 시기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에는 '용병의 대가'에 대한 규정이 들어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도 용병을 고용했다. 정작 로마는 용병 때문에 망했다. 로마 황제들은 국방의 임무를 게르만족 용병에게 맡겼다. 서기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는 서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서로마제국에 자리잡은 게르만 민족은 각자의 왕국을 세웠다.

중세 시대에 접어들자 용병은 더 흔해졌다. 기사들이 용병의 중추가 됐다. 중세 시대 가장 유명한 용병으로 스위스 용병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다. 많은 스위스 남성들이 생계를 위해 용병으로 일했다. 그들은 뛰어난 전투력과 충성심으로 유명했다. 많은 유럽국가들이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특히 스위스 용병과 교황청의 관계는 유명하다.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스위스 용병 150명을 고용해 바티칸을 경비하도록 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교황청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1527년 교황과 갈등을 빚던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바티칸을 침략해 대약탈을 자행했을때 스위스 용병들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면서 교황 클레멘트 7세를 도피시켰다.

이 사건 이후 스위스 용병들이 교황청 경비를 맡는 전통이 생겼다. 현재 바티칸에는 약 130명의 스위스 근위대가 근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용병과 고용주 간의 관계다.

카톨릭 구교와 프로테스탄트(신교) 간의 30년 전쟁은 용병들의 주무대였다. 당시 용병들은 주로 가난한 농민이나 도시 노동자 출신이 많았다. 스코틀랜드 남성들도 4만여명 참전해 가족들을 먹여살렸다. 용병들은 윤리의식이 없었다. 싸우는 척하며 돈만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노략질을 일삼아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전쟁터였던 독일은 만신창이가 됐다.

◇목숨 걸고 싸운다

이후 유럽국가들은 용병 고용을 줄이기 시작했다. 각 나라에서 상비군이 창설되면서 용병들이 설 무대가 줄어든 것이다. 그렇다고 용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용병들은 중요한 군인이었다.

미국 독립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독일 용병들을 대거 고용했다. 독일 용병 약 3만명이 참전했다. 이들은 주로 프로이센, 헤센, 브라운슈바이크 등 독일의 여러 주에서 모집됐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 일부 독일 용병들은 미국에 정착했다. 약 3000명 정도가 미국의 남부와 중서부에 정착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세기 들어서도 용병은 여전히 활용됐다. 대표적인 것이 네팔 구르카 용병이다. 구르카족은 네팔 중서부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몽골계 소수 부족이다. 구르카족은 1814년 영국-네팔 전쟁에서 '쿠크리'(khukri)라 불리는 구부러진 단검 하나를 들고 영국군 부대를 전멸시켰다. 이들의 활약을 본 영국 정부는 구르카족을 영국군의 정식 용병으로 채용했다.

이후 영국의 식민지 쟁탈전의 최선봉에는 구르카 용병대가 있었다. 이들은 제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도 참전해 영국군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 2010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도 투입됐다. 2018년 6월 1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에서 구르카 용병들이 경호를 맡으면서 다시 한번 관심을 모이기도 했다.


구르카 용병과 함께 세계적으로 이름난 용병이 프랑스 외인부대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루이 필리프 1세는 1831년 외국인들로 구성된 5개 용병부대를 만들어 알제리에 파병했다.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용병부대가 창설된 것이다.
이후 프랑스가 참전한 거의 모든 전쟁에 투입됐다. 1863년 4월 멕시코에서 벌어진 카메론전투는 이들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외인부대원 65명은 멕시코군 2000명과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였다. 결국 3명만 살아남아 '전설'이 됐다. 현재 외인부대는 프랑스 육군의 사단급 특수부대다. 전 세계 약 140개국 출신 8500여명으로 이뤄져있다. 외인부대에 들어가 의무 복무기간 5년을 마치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할수 있다.

코사크 용병도 빼놓을 수 없다. 코사크족들은 18세기 후반 자치를 보장받는 대가로 러시아 제국의 용병 역할을 했다. 그들은 러시아 차르에 충성했던 기병(騎兵)들이었다. 1905년 1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은 이들과 관계가 깊다. 겨울궁전 경비를 맡고있던 코사크 기병들은 경찰과 군대의 무차별 사격에 흩어지는 시위대의 등 뒤에 무자비하게 칼을 꽂았다. 광장은 피바다로 변했다. 이는 러시아 혁명의 불을 당겼다.

◇회사원으로 바뀐 전사들

현대에 들어서도 용병은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민간군사기업(PMC, Private Military Company)으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냉전 종식으로 미국과 소련이 군비 축소에 나서자 군인 출신 실업자들이 대거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용병업체로 몰려들었다. 민간군사기업들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 용병산업은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급성장했다. 대표적인 업체가 미국의 '블랙워터'다. 1997년 해군특전단(네이비실) 출신들이 설립했다. '블랙워터' 직원들이 2007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민간인 14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져 나쁜 이미지가 박히자 회사 이름을 '지(Xe) 서비스'로 바꿨다. 2011년에는 '아카데미'로 다시 개명했다.

미국에 블랙워터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바그너그룹이 있다. 러시아 군정보기관 정찰총국(GRU) 소속 특수부대 출신인 디미트리 우트킨이 2014년 설립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 시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현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인 억만장자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수장을 맡고 있다.

◇용병이 나쁜 이유

용병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돈을 벌기위해 싸운다. 고용주가 지시하는 대로 싸우는 군인들이다. 돈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어떤 편이든 싸울 수 있다. 이로 인해 전쟁이 확산되고, 전쟁의 참상을 키운다.

그렇다면 용병은 없어져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쉬운 대답은 없다. 용병은 국가나 정부에 소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전쟁범죄를 저질러도 국가나 정부의 책임이 없다. 이로 인해 용병은 국가나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전투력도 강하고, 정규군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경비도 적게 든다.

때문에 용병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존속할 것이다. 게다가 위상은 더 강화될 것이다. 실제로 용변은 정규군의 빈자리를 채우는 존재에서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조직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고 윤리적 문제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부패한 앙골라 정부에 대항해 싸웠던 앙골라 반군을 일거에 궤멸시킨 이들도 용병이었다. 그래서 첩보소설의 대가 프레데릭 포사이스는 1974년 용병을 다룬 작품을 내놓으면서 '전쟁의 개들'(Dogs of War)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전쟁이 돈벌이 수단이 되면 안 된다. 돈 받고 싸우는 용병의 승리 뒤에는 가난한 패자들의 통곡과 눈물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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