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화의 지리각각] 러 월경지 `쾨니히스베르크` 칸트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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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화의 지리각각] 러 월경지 `쾨니히스베르크` 칸트의 눈물
우크라이나 사태는 무력충돌이냐 강력한 대러시아 경제제재냐 갈림길에 섰다. 대화와 평화의 길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듯하다. 이번 갈등의 핵심인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불가입을 미국과 서방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서면답변 요구에 미국은 지난 26일 거부 의사를 담아 전달했다. 가만히 있을 러시아가 아니다. 러시아는 최근 카자흐스탄 소요를 평정한 것처럼 때가 됐다고 생각할 때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08년 조지아 침공과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병합이 그랬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야심은 집요하다. 마음먹은 건 꼭 한다.

서유럽과 러시아, 그 중간의 동유럽 지도를 들여다보면 러시아가 왜 서방을 두려워하는지 짐작이 간다. 서방과 러시아간에는 소련 시절 동유럽 공산권 국가라는 완충지대가 있었다. 지금은 동유럽의 발틱3국,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토회원국이 돼 있다. 우크라이나마저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는 벨라루스를 제외하고 서쪽과 남쪽에서 나토에 포위당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1812년) 이후 지난 200년간 끊임없이 서방의 침략을 경험한 러시아로서는 안심할 수가 없다. 문화적으로도 러시아는 서방의 멸시를 받아오지 않았나. 러시아인의 DNA에 뿌리 박혀 있는 서방 콤플렉스를 푸틴은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전략적 요충지 칼리닌그라드

이런 때에 유사시 결정적 역할을 할 지역에 관심이 모아진다. 러시아의 월경(越境) 영토 칼리닌그라드다.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본토와 떨어져 동쪽으로 발틱3국의 리투아니아, 남쪽으로 폴란드, 서북쪽으로는 발트해에 둘러싸인 러시아의 서단 영토다. 면적도 1만5000㎢로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합친 것만큼 돼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땅이다. 육지로 러시아에서 칼리닌그라드로 가려면 2개국을 경유해야 한다.

본토로부터 떨어져 고립된 이 지역이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러시아에 전략적 요충지로 떠오르는 이유는, 러시아 입장에서 나토의 전선을 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후미에서 나토군을 위협할 수 있다. 러시아는 이미 이곳에서 폭격기와 군함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칼리닌그라드에는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자리 잡고 있다.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가 보유한 몇 안 되는 부동항 중 하나다. 특히 발틱해의 길목에 위치해 서방이 발틱3국과 핀란드 등으로 무력을 전개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다. 폴란드에 대해서도 벨라루스와 협공을 취할 수 있는 위치다.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칼리닌그라드의 지정학적 가치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추억

우크라이나사태에서 칼리닌그라드에 새삼 눈길이 가는 것은 이러한 전략적 가치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국제정치상으로 독특한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칼리닌그라드는 사실 전쟁의 산물이자 국제정치의 격변이 낳은 월경지다. 칼리닌그라드는 원래 독일의 영토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포츠담회담 결과 동북쪽 영토를 폴란드와 소련에 할양해야 했다. 발트해 연안 북쪽은 폴란드에, 칼리닌그라드는 소련이 가져졌다. 빼앗기기 전 칼리닌그라드의 이름이 쾨니히스베르크다. 소련은 러시아혁명의 유공자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 1946년 이렇게 개칭했다. 독일색을 지우기 위해 다양한 작업도 벌여나갔다.

러시아의 역외 영토가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1990년 리투아니아가 소련 해체로 독립하면서다. 리투아니아와 러시아가 각각 독립국이 되면서 러시아와 칼리닌그라드는 떨어지게 됐다. 소련해체와 베를린장벽 붕괴, 독일통일(1990년 10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칼리닌그라드의 독일 반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통일에 방해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칼리닌그라드 반환 이야기를 막았다.

'왕의 산'이란 의미인 쾨니히스베르크는 실은 독일의 전신이나 마찬가지인 프로이센의 세거지였다. 16세기 이후 18세기 초까지 약 270년간 쾨니히스베르크는 프로이센이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기기 전까지 수도였다.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긴 후에도 프로이센 국왕들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갖는 등 특별한 애정을 가졌다. 이런 프로이센인(독일인)들의 사랑은 1차 세계대전으로 영토를 할양해야 할 때 쾨니히스베르크를 지키고 폴란드 북부 단치히 지역을 내준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쾨니히스베르크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이후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점령할 때까지 20년간 독일의 월경 영토였다.

이러한 쾨니히스베르크의 독특한 역사적 지리적 곡절은 이곳이 중세 이래 교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한자동맹의 주요 도시로서 유럽의 동서남북, 해로와 육로가 만나는 결절지점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는 신교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할거지의 경계에 위치함으로써 민족적 쟁투의 무대가 된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길게는 500년 가까운 독일인의 정신적 문화적 고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점도 쾨니히스베르크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쾨니히스베르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나고 살며 한 번도 멀리 떠나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칼리닌그라드주의 칼리닌그라드시에 가면 칸트의 동상과 그가 산책했다는 '칸트의 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수많은 관광객이 인식론과 도덕론의 획을 그은 이 불세출의 철학자를 만나기 위해 이 도시를 찾는다. 하지만 서방과 러시아간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에 칸트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평화, 그것도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순수이성비판' 이상으로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영구평화를 염원했던 칸트의 고향

칸트가 살았던 18세기는 유럽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다. 큰 전쟁만 해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슐레지엔 장악을 놓고 벌인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이 있다. 지긋지긋한 전쟁의 참상을 목도한 칸트는 어떻게 하면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래서 1795년 말년에 나온 논문이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이다. 한마디로 칸트는 전쟁을 인간이 행할 수 있은 최고의 악으로 규정했다.

칸트는 전쟁을 막는데 인간 이성과 도덕적 실천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구조적인 평화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칸트는 평화조약안을 제안했다.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국가간 비밀조약 금지, 영토의 강제병합 금지, 상비군의 점진적 감축 및 폐지, 전쟁을 위한 재정비축(전쟁 국채 발행) 금지, 내정간섭 금지, 상대방을 속이거나 암살 등 비열한 적대행위 금지 등이다. 칸트는 이를 확보하기 위한 조건으로 모든 나라가 민주공화정이어야 하고, 국가간 평화수호의 연맹을 결성하며, 우호 증진을 가져올 각국 시민간 교류활성화 등을 제시했다.

칸트의 주장이 평화가 탁상의 연구와 이론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현실주의자들의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평화를 향한 구체적 국제관계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은 가치가 있다. 실제로 그와 같은 구상은 100여년 후 1차 대전 후 국제연맹, 2차 대전 후 국제연합(UN), 그리고 유럽연합(EU)라는 형태로 현실화됐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항구평화를 위한 실행적 조건으로 제시한 민주공화정으로의 이행은 20세기에 '민주주의체제의 국가끼리는 전쟁을 피하는 국가이성이 작동한다'는 '민주평화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려는 이때 칸트의 영구평화를 향한 염원이 새삼 더 도드라져 들리는 것 같다. 칸트가 지하에서 쾨니히스베르크의 폭격기 굉음을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서방과 러시아는 위대한 철학자의 말에 잠시라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규화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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