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말 뿐인 `규제혁신 아우토반`

[DT현장] 말 뿐인 `규제혁신 아우토반`
    입력: 2019-02-06 17:55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DT현장] 말 뿐인 `규제혁신 아우토반`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매년 설 연휴마다 반복되는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귀경·귀성길 교통지옥을 피할 수 있을지였다. 올해의 경우 5일, 6일 귀경길이 예년보다 정체가 심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일찍 다녀오는 방식으로 교통정체를 피할 수 있었다. 실시간 교통정보를 바로바로 보여주는 스마트폰 내비게이션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너무 잘 뚫리는 고속도로 덕분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최근 몇몇 보험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자동차 보험료 할인 행사 때문이었다. 규정속도 등 교통법규를 준수하면 자동차 보험료를 일정 수준 할인해주는 내용이다.시골에서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보니 안전운전 점수는 할인 기준점에서 조금 모자랐다. 그래서 출발하기 전에 266㎞의 주행거리에서 규정 속도를 완벽하게 지키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문제는 길이 너무 안 막히다 보니 주변 차들이 모두 속도를 더 냈고, 규정속도를 준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부 차들은 왜 속도를 더 내지 않느냐는 듯 헤드라이트를 번쩍였고 위협적으로 끼어드는 차들도 있었다. 서울 시내로 진입하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만성 정체에 시달리는 동부간선도로가 모처럼 한산했다. 이 때문에 주변 차들은 규정속도 시속 80㎞ 이상의 속도로 주행했다. 어두운 밤길에 사방에서 번쩍번쩍 차들이 위협하니 진땀이 났다.

하지만 꿋꿋이 속도를 지켰고, 그 결과 할인 대상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는데 성공했다.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법규를 잘 지켰지만 대신 주변 상황에는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차가 질주하는 선진국에 추월당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과속하는 차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는 달릴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차에게 달릴 기회를 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 뚫린 아우토반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도 없는 규제에 발목이 묶여 혁신의 속도를 높이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 기업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는 안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밥그릇 지키기와 시샘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실제로 한국무역협회가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글로벌 스타트업 전시회에서 해외 업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미국을 100점으로 놓았을때 우리 스타트업의 경쟁력 점수는 55점에 불과했다.

문제는 전문가들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수년 전부터 '네거티브 규제'를 비롯해 규제혁신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체감하는 기업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필요성은 알고 있지만, 매번 이해관계나 정쟁의 벽에 막혀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격의료나 핀테크, 작년 말부터 이어진 택시업계와 카풀 업계 간의 갈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에 세계 최고 수준인 노동 관련 규제도 한몫을 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이 발표한 '2019년 경제자유지수'(Index of Economic Freedom)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난해 노동규제 자유도 58.7점으로 180개국 가운데 97위를 차지했다. 최근의 상황 등을 고려하면 올해는 100위권 밖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충분하다. 혁신기업들은 안팎으로 신사업 규제와 노동규제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는 혁신 스타트업이 성장할 토양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고 대기업들은 국내보다 외국에서 신사업의 기회를 찾고 있다. SK텔레콤 등이 동남아 최대 차량공유 기업인 그랩과 손잡은 것이나 NHN엔터테인먼트가 제3인터넷은행 참여를 포기한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물론 규제를 모두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스피드광의 '꿈의 도로' 아우토반에서도 트럭과 같은 대형차는 속도제한이나 통행 차단 등 안전을 위한 규제가 있다. 하지만 반도체 등 주력 제조업이 점점 경쟁력을 잃어가고 다음 성장동력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규제혁신 아우토반'은 국가 생존의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최소한의 규제만 두고, 꿈을 가진 젊은이들이 4차 산업혁명의 왕복 10차선 도로에서 빠르게 달리는 모습을 올해는 꼭 보고싶다.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comja7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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