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고도화 위해 조선·전자 등 6대 전략산업 선정 집중지원
대덕연구단지·한국과학원 설립 고급 과학기술 인력 양성
첫 고유모델차 '포니'·쌀 자급 이끈 '통일벼' 대표적 성과
1977년 수출 100억달러… 세계 최빈국서 수출강국 도약
대덕연구단지·한국과학원 설립 고급 과학기술 인력 양성
첫 고유모델차 '포니'·쌀 자급 이끈 '통일벼' 대표적 성과
1977년 수출 100억달러… 세계 최빈국서 수출강국 도약
■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2부> (4)기술자립 기반 마련한 1970년대 과학기술
1970년 한국의 수출 1·2·3순위 품목은 섬유류, 합판, 가발이었다. 주로 값싼 노동력에 의존한 경공업 제품을 중심으로 산업을 발전시키던 한국은 1970년 초 위기를 맞았다. 나라 밖에서는 '오일쇼크'가 전 세계 경제를 강타했고, 선진국의 보호무역 강화로 국제 무역환경은 갈수록 나빠졌다. 국내에서도 점차 증가하는 임금 때문에 가격경쟁력이 약해지면서 더는 노동집약적인 공산품으로 수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화'와 '전 국민 과학화'를 선언했다. 정부는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기 위해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 등 6대 중화학공업 분야를 전략산업으로 선정해 집중적으로 자원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선 보다 선진화된 과학기술 역량이 필수적이었나, 당시 국공립연구소나 대학 등은 이런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 기업의 연구개발(R&D) 활동 역시 본격적인 산업기술을 개발하기엔 너무 영세한 상태였다. 정부는 시급히 요구되는 기술과 자본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확보하도록 하는 한편, 민간기업의 기술 확보를 지원하기 위한 전략으로 정부출연연구소(출연연) 설립을 추진해 중화학 공업 육성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비롯한 출연연은 산업 발전의 '싱크탱크' 역할을 맡아 철강, 조선, 자동차 등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마련했고, 1973년 설립된 한국과학원(현 KAIST)은 산업 발전을 이끌 고급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중화학 공업시대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한국은 1977년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며 세계 최빈국에서 수출 강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중화학 공업화' 선언과 대덕연구단지 설립=1971년 국가 경제개발의 목표가 '중화학 공업화'로 정해지자 과학기술 계획도 이에 맞춰 기획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발표된 '제3차 과학기술개발 5개년 계획'에서 정부는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중화학 공업화를 이끄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했다.
중화학 공업화를 위한 기술 혁신 정책을 이끌 리더로 1971년 과학기술처 장관에 최형섭 KIST 초대 소장이 임명됐다. 최형섭 장관은 연구개발(R&D) 체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여러 연구기관이 한 데 모인 연구단지를 구상했다. 같은 해 KIST를 중심으로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개발연구원, 한국과학원, 원자력연구소 등으로 구성된 '서울연구개발단지(홍릉연구단지)'가 발족됐다. 이어 최 장관은 조선공업을 지원하기 위한 선박연구소와 해양 개발을 위한 해양연구소 등 산업기술 분야별 '5대 전략기술연구소'를 설치하려 했지만, 서울에는 더 이상 이 연구소들이 들어설 공간 여유가 없었다.
1973년 1월 17일. 최 장관은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선박, 기계, 석유화학, 전자 등 전략산업의 기술개발을 담당할 연구기관을 단계적으로 설립하고, 이를 한데 모은 '제2 연구단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보고했다. 보고를 마치자 박 대통령은 제2 연구단지 건설 계획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각 부처 장관 등이 참석한 '제2 연구단지 건설계획안 보고 회의'가 열렸다. 연구단지 계획 수립과 건설은 과기처가 주관하고 관계부처 간 업무 조정은 총리가 담당키로 했다. 연구단지가 들어설 장소는 3개 후보지 중 충남 대덕으로 결정됐다.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철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우수한 두뇌가 집결하기에 좋은 위치이며, 전국 산업기지와 연결이 편리해 기술 지원이 쉽다는 이유였다. 1973년 5월 28일, 마침내 '대덕연구학원도시 기본계획'에 대한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졌다. 이어 새로 설립할 출연연의 육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특정연구기관 육성법'이 제정됐다.
이후 대덕연구단지는 KIST와 함께 우리나라 과학기술 활동의 거점이 됐다. 1976년 9월 한국표준연구소가 첫 삽을 뜬 뒤, 1970년대 말까지 한국화학연구소, 한국선박연구소 등 5개 정부출연연구소가 대덕연구단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럭키중앙연구소 등 3개 민간연구소와 충남대학교가 입주해 공조체계를 갖췄다. 출연연은 정부 지원으로 설립·운영됐지만 법적으로는 재단법인 형태를 갖추고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한국의 대표적인 연구체제로 자리 잡았다. 출연연의 설립은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 있던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이 국내로 돌아오는 주된 통로가 돼 국내의 전반적인 연구 수준을 높이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고급인재' 양성 위한 한국과학원 설립=1967년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젊은 물리학자 정근모 박사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며 '후진국에서의 두뇌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란 논문을 제출했다. 이 논문에서 정 박사는 개발도상국에서 인재를 기르고 활용하려면 최고 수준의 교육과 연구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특수 이공계 대학원 설립 청사진을 제시했다.
2년 뒤 정 박사는 자신의 주장을 실현할 기회를 맞았다. 그가 미국에 넘어와 활동할 수 있도록 후원해준 존 한나 미 미시건대 총장이 미국국제개발처(USAID) 처장에 선임된 것. 한나 처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미국은 해외 교육사업에 투자하는 대신 교육기관을 만들어서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방침을 밝힌다. 이를 본 정 박사는 그를 직접 만나 자신의 논문을 소개했고, 논문 내용에 크게 공감한 한나 처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써 한국이 원한다면 특수 이공계 대학원 설립을 지원하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1970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동향 보고 회의에서 특수이공계 대학원 신설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고, 정 박사는 1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대통령 앞에서 직접 자신이 쓴 논문 내용을 브리핑했다. 같은 해 4월 8일 마침내 한국과학원 설립이 결정됐다.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 설립과 자문을 위해 전 스탠퍼드대 부총장이었던 프래드릭 터만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국내에 파견됐다. 그 결과 1970년 12월에 나온 것이 과학원 설립의 청사진이 된 '터만 리포트'였다. 당시 뉴욕 브루클린공대 교수였던 정근모 박사는 터만 조사단의 일원으로 리포트 작성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1971년 4월 한국과학원은 서울 홍릉의 서울연구개발 단지 내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40여 명의 교수를 확보해 1973년 9월 정식 개강한 한국과학원은 국내 과학기술계는 물론 교육계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당시 교육계는 한국과학원에 '대학'이란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게 할 정도로 견제가 심했다. 문교부 대신 과학기술처 산하의 독립적인 기관으로 설립된 한국과학원은 기존의 교육법과 교육공무원법 적용을 받지 않아 자율적인 학사 운영과 신축성 있는 교육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정부는 한국과학원에 출연금을 지원하되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아 자율성을 보장했다. 학생들은 병역특례를 포함한 다양한 혜택 속에 영재교육을 할 수 있었다. 또 산업 인력을 재교육하는 산학제를 통해 산학협동을 쉽게 만들었다. 교수들은 자동차 엔진 부품 개발, 반도체 설계와 제작, 맥주 발효법 연구 등 실용적인 내용의 연구를 수행했다. 학생들 역시 산업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교육과 연구에 집중했다.
1975년 한국과학원은 92명의 석사를 배출했다. 터만 보고서에서는 과학원의 석사과정 졸업생 규모가 1978년 100명 정도가 적정할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국내 고급 인력 수요가 터만 보고서의 추정을 훨씬 앞지르기 시작했고, 한국과학원은 1978년 142명을 배출한 데 이어 1986년까지 4038명의 석박사를 배출하며 국내 이공계 고급 인력 양성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잘 먹고 잘사는' 시대 만든 과학기술=1966년 설립된 KIST가 맡은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공업발전계획을 세우는 일이었다. 당시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선 능력 있는 공업 관련 연구기관이 반드시 필요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유능한 과학기술자들이 모인 KIST는 산업화 '싱크탱크' 역할을 맡아 경제개발계획 추진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과 정책 조사 연구 등을 수행했다. 그 결과 장기에너지 수급대책에 관한 연구를 시작으로 기계공업, 조선공업, 자동차공업 등의 중기계공업 육성계획과 포항종합체철 건설계획 및 확장사업 등 1970년대 이뤄진 중화학 공업 발전의 큰 틀이 KIST에서 나왔다. 지난해 '광복 70년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에 꼽힌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 '포니'와 현대중공업이 국내 최초로 건조한 26t급 초대형 유조선 등이 KIST의 제안에서 시작된 대표적인 1970년대 과학기술 성과다.
한국이 '보릿고개'로 표현되는 식량난을 극복하고 쌀 자급을 이룰 수 있었던 '통일벼' 개발도 1970년대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농촌진흥청이 1971년 개발한 통일벼는 한국인들이 주식으로 삼고 있는 '자포니카'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재배하는 '인디카'의 잡종으로,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통일벼 재배면적이 크게 확대된 1977년에는 쌀 생산량이 수요량을 앞질렀으며, 이후 다른 농작물의 품종개발과 재배기술 발전에 토대가 됐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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