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 유럽, 4차 산업혁명 이끌 '스마트팩토리' 집중
공동연구소 설립 잇단 '러브콜' … '헬름홀츠'와 협력
국내 연구기관·기업들 유럽시장 진출 '가교역할' 주력
EU환경규제 확대 발맞춰 '나노안전 협력센터' 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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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2부> (3)글로벌로 나아가는 한국 과학기술
대한민국은 월남전 파병 대가로 미국의 원조를 받아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과학기술 역사를 열었다. 50년이 지난 현재 한국은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해 베트남에 'V-KIST(베트남 키스트)' 설립을 지원하는 등 세계 속에 '과학기술 한류'를 확산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대전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등 60여 개 국가 및 국제기구의 과학기술분야 대표들이 참석한 '세계과학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 10년간 과학기술혁신 정책의 지침인 '대전선언문' 채택을 주도하는 등 세계 과학기술계에서 위상을 높였다.
한국 정부는 전 세계 47개국과 과학기술협력협정을 맺고 있으며, 1만8000여 명에 달하는 재외 한인 과학기술자들이 미국과 유럽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세계 최빈국에서 과학 강국으로 성장한 우리 경험과 기술을 전수받고자 손을 내밀고 있고, 기후변화 등 전 지구적인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공동연구에도 참여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글로벌 연구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전략을 마련하고, 과학 외교 확대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도 남아있다. 한국이 세계 과학기술계에서 지평을 넓히기 위해 어떤 경험과 노력이 필요할지 알아보기 위해 1996년 국내에서 가장 먼저 해외 현지에 거점을 마련한 'KIST 유럽연구소'를 방문했다.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잘란트주 자브리켄. 이 도시에 위치한 잘란트대학교 캠퍼스에는 막스플랑크 정보공학연구소, 프라운호퍼 비파괴시험연구소 등 유럽의 유명 연구소들이 밀집해있다. 연구소들을 지나 KIST 유럽연구소에 도착하자 앞뜰에 '과학대장군'과 '환경여장군'이라고 쓰인 두 개의 장승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유럽과 한국의 과학기술을 연결해 환경 분야에 특화된 세계적인 연구소가 되겠다는 목표를 상징한다.
국내 1호 해외연구소인 KIST 유럽연의 20년은 '시행착오와 극복의 역사'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걷다 보니 가는 길마다 걸림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동안 방향을 잡지 못해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존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지난해 연구소는 초심으로 돌아가 존재 이유부터 다시 물어 '국가출연연구소 및 산업계의 유럽 진출을 지원하는 개방형 연구거점기관'이라는 새 비전을 세웠다. 분산됐던 연구 분야를 다시 환경 영역에 집중하고, 차세대 연구 분야로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스마트팩토리'를 선정했다. 또 현지 거점의 강점을 살려 유럽의 여러 연구기관과 손잡고 국내 연구기관과 기업들을 지원하는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최귀원 KIST 유럽연구소장은 "20년 동안 자리를 지킨 KIST 유럽연구소에 대한 신뢰와 한국 과학기술의 잠재력에 대해 유럽 연구소들이 높은 관심을 갖고 먼저 손을 내밀고 있다"며 "설립 20주년을 맞아 KIST 유럽연구소를 유럽 연구자와 산업계에 더 많이 알려 나가겠다"고 말했다.
◇ '자브리지 프로그램' 실패로 배운 교훈=1996년 당시 국내 연구개발 활동은 해외 선진 원천기술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도입하고 활용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논의 끝에 KIST는 선진 기술의 원천지로 직접 진출해 적극적인 국제 협력 시스템을 갖추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1996년 2월 KIST 유럽연은 '현지 연구를 통한 원천기술의 조기 확보'와 '유럽연합(EU) 국가들과의 기술교류 및 공동연구를 통한 과학기술 국제화 촉진' 임무를 갖고 잘란트대 창업센터 건물 한켠을 임대받아 문을 열었다.
직원 3명으로 시작한 KIST 유럽연은 1997년 금융위기 등 위기를 겪으면서도 인력과 투자를 늘려 2000년 제1연구동, 2008년 제2연구동을 설립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2009년엔 본격적인 협력연구를 통해 세계적인 연구로 도약한다는 목표로 '자브리지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연구소가 위치한 '자브리켄'과 한국과 유럽 간 협업 연구의 가교역할을 한다는 뜻의 '브리지'를 합친 이름의 자브리지 프로그램을 통해 연구소는 미세전자제어기술(MEMS) 분야의 세계 석학인 안드레아스 만츠 교수를 영입해 '연구개발담당 소장'으로 임명하고, 바이오메디컬 연구에 연간 100만유로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야심찬 시도였지만, 잦은 소장 교체와 연구방향 혼선 등으로 인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프로그램은 결국 5년 만에 막을 내린다. 이후 연구결과를 두고 투자를 한 만큼 성과가 없다는 정부 지적이 쏟아졌고, 연구소의 존재 자체가 위기에 놓였다.
당시 KIST 본원에서 의공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최 소장은 "2014년 6월 자브리지 프로그램 최종 평가를 할 때 자문을 위해 KIST 유럽연을 처음 방문했다"며 "와서 보니까 답답했다. 세계적인 연구센터가 되는 것이 목표였는데, KIST 본원의 연구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 같았다. 본원이 잘하는 분야를 꼭 유럽에서 해야 하는 지도 의문이었다"고 말했다.
위기 수습을 위해 2014년 12월 부임한 최 소장에게 주어진 숙제는 연구소의 존재 이유와 목적부터 다시 찾는 것이었다. 최 소장이 실패의 교훈에서 찾은 해답은 '개방형 연구'와 '산업계 지원'이라는 두 가지 전략이다.
◇ 20년 만에 유럽 과학기술계 중심으로= 현재 KIST 유럽연은 비영리 공익 유한책임 회사의 법인 형태로, 인턴사원 30여 명을 포함해 약 100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 중 소장과 경영지원부장만 본원 파견 인원이고 나머지는 모두 현지 채용이다. 외양만 보면 독일에 위치해 현지 법에 따라 운영되는 '독일 연구소'지만, 연구소 예산은 대부분 한국 정부가 지원하고 국내 기준으로 기관 평가도 받는다.
이런 애매한 정체성 때문에 그동안 연구소는 현지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최 소장은 "유럽에서는 KIST 유럽연을 한국 정부가 투자하는 회사로 취급한다"며 "연구자들이 독일이나 유럽에 과제를 신청하면 연구내용이 좋아도 한국 회사에 지원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며 마지막에 선정이 안 돼 연구비 마련에 애를 먹었다"고 설명했다.
최근 연구소 바로 앞에 위치한 헬름홀츠신약개발연구소(HIPS)가 공동 연구소 설립을 제안,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생겼다. 20년을 버텨온 KIST 유럽연에 대한 신뢰와, 높아진 한국 과학기술의 위상 덕분에 주변 연구소들이 연달아 손을 잡자고 먼저 나서고 있는 것. KIST 유럽은 올해부터 HIPS와 공동 연구분야를 찾아 연구를 시작할 계획이다.
최 소장은 "독일에서 국내 연구기관이 해외 연구기관의 현지거점과 공동 투자해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공동 연구소가 헬름홀츠연구회 산하로 들어가면 우리 연구소가 독일 공공연구소로 활동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KIST 유럽연이 유럽 과학기술계의 중심에 들어갈 기회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 '개방형 연구' 새길 연다= KIST 유럽연구소의 목표는 외부 협력을 강화해 '개방형 연구거점기관'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독일 자브리켄은 유럽 중심부에 위치해 일일생활권 내에 유럽 20여 개 주요 도시가 있고, 특히 연구소가 위치한 잘란트대학교 캠퍼스 내에는 프라운호퍼, 막스플랑크, 헬름홀츠, 라이프니츠 등 독일 4대 연구회에 소속된 15개 연구센터가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를 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국내 연구기관과 기업이 유럽의 연구소들과 협력하는 가교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KIST 유럽연 내에 '스마트 팩토리 공동연구실'을 연 데 이어 올해는 한국화학연구원이 연구소를 연다. 또 20주년을 맞아 재외 한인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각종 학회를 자브리켄에 유치해 국내외 과학자들에게 KIST 유럽연의 개방형 연구를 소개할 계획이다.
최 소장은 "올해 기관고유사업 예산 중 35%를 외부 기관과 협력하는 과제에 지원하고 내년에는 50%까지 늘릴 계획"이라며 "유럽 연구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해 공동연구는 물론 한국 출연연과 유럽 연구기관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KIST 유럽연과 잘란트대학의 공동 연구조직인 전기화학공동연구실험실의 김상원 박사는 "연료전지와 이차전지 분야에서 잘란트대 화학과 롤프 헴펠만 교수와 협력해 에너지 연구에 최적화된 첨단 연구실을 꾸려 협력 연구를 하고 있다"며 "헴펠만 교수와 함께 작성한 연구제안서가 독일 연구재단(DFG) 과제로 선정돼 3년간 총 21만 유로의 연구비를 받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KIST 연료전지연구센터와 긴밀한 공동연구를 하고 있으며 유럽 연구기관과의 연구협력 범위를 확대해 미래 녹색·재생에너지 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올해 KIST 유럽연은 제1연구동과 제2연구동 사이 부지에 연면적 2400㎡(727평) 규모의 게스트하우스 건립을 추진한다. 개방형 협력연구를 위해 KIST 유럽연을 찾는 국내 연구소 관계자와 산업계 인력들을 위한 숙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또 연구소 직원들과 주변 독일 연구기관 연구자들이 함께 이용하는 카페테리아를 만들어 주변 연구기관과 자연스러운 교류가 이뤄지게 할 계획이다.
◇ '연합체' 만들어 유럽 진출 기업 지원= 개방형 연구와 함께 KIST 유럽연구소의 또 다른 목표는 유럽 진출을 원하는 기업들을 지원하는 일이다.
현재 KIST 유럽연구소와 KIST 본원, 프라운호퍼의공학연구소(IBMT)가 국내 바이오 소재 전문 기업 바이오액츠와 공동 창업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 진출을 추진하던 바이오액츠는 지난해 KIST 유럽연구소에서 열린 우수기술연구센터(ATC)협회 CEO 워크숍에서 협력 기회를 만들었다. 400여 개 중소·중견기업이 참여하는 ATC협회는 매출의 10%를 수출로 올리고 3∼5%를 R&D에 투자하는 기업들로 구성됐다. 유럽 진출에 장벽을 느끼던 회원사들은 KIST 유럽연을 알게 돼, 지난해 국가과학기술연구회와 MOU를 맺고 KIST 유럽연 내에 '글로벌허브랩(GHL)'을 구축했다. 이곳에선 KIST 유럽연의 연구 인프라와 네트워크를 활용해 유럽 진출을 원하는 국내 기업에 기술지원을 해준다.
유럽에 나와 있는 여러 산업 지원기관들을 협의체로 묶어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진흥공단 인큐베이터센터에 들어온 기업이 기술이나 규제를 뚫어야 할 상황이 생기면 KIST 유럽연구소에서 주변 연구기관과 연결해 해결방안을 찾고, 제품을 출시하면 KOTRA 마케팅 자문을 받는 식이다.
최 소장은 "잘란트주 경제진흥공사와 주변 연구소들이 ATC와의 협력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앞으로 국내 기업의 현지 진출이나 연구소와의 협력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 환경규제 연구·지원에 특화= 특히 연구소가 강점을 가진 분야는 환경규제 지원이다. 2007년 6월 EU는 연간 1톤 이상 제조·수입되는 모든 물질에 대해 위해성에 따라 등록·평가·허가·제한을 받도록 한 화학물질 관리규정인 'REACH' 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화학제품을 EU에 수출하려면 REACH 규제를 통과해야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관련 대응 연구를 전담하는 기관이 없었다.
기업들은 현지에서 REACH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응 연구를 시작한 KIST 유럽연구소에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50개 기업과 함께 4개 대표물질을 등록했다. 생산 중인 화학제품의 절반 정도를 유럽에 수출하는 삼성정밀화학은 KIST 유럽연에 공동기술센터를 설립해 자체 개발한 고분자 물질의 규제대응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앞으로 EU는 REACH 같은 환경규제를 화장품, 나노물질 등으로 확대할 전망이다. 이에 발맞춰 KIST 유럽연구소는 지난해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스위스 재료시험연구소, 국내 나노안전 평가기관과 연계해 규제 대응과 인증지원을 할 '유럽연합(EU) 나노안전 협력센터'를 열었다.
최 소장은 "EU 규제가 단일 물질 중심에서 혼합물 등으로 점점 복잡해지는 만큼 대응 연구가 중요하다"며 "연구소가 주도하고 KIST 본원과 화학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 국내 출연연과 EU 연구기관을 연결해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한편 산업체를 지원하는 환경규제 대응 플랫폼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선진 과학기술 '돋보기' 역할= '유럽의 기관차'로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는 독일은 한국이 저성장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배울 점이 많은 나라다. 유럽 최대 응용과학 연구기관 '프라운호퍼'와 기초과학 연구기관 '막스플랑크'로 대표되는 과학기술과, 약 1300개 글로벌 강소기업 '히든챔피언'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산업구조는 국내에서도 '한국형 프라운호퍼'와 '한국형 히든챔피언' 등의 정책으로 투영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이 이름만 빌려왔을 뿐, 국내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외양만 빌려왔을 뿐 어떻게 이들이 작동하는지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우리 식으로 재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변재선 KIST 유럽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한국은 소수 전문가의 시각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전체 시스템이 아니라 원하는 방향에 맞춰 해외 시스템을 취사선택해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며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배경이나 한국과의 차이점을 심층 분석해 제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연구소가 최근 국내에서도 관심이 높은 스마트팩토리 연구를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독일이 주도하는 제조업 혁신 전략인 '인더트스리 4.0'의 연구현장 중심에 직접 참여해 국내에 정확한 피드백을 제공하겠다는 목표다.
최 소장은 "REACH 규제 관련 기업 지원 전담기관이 없었던 것처럼 현재 스마트팩토리 전략도 세밀한 분석이 부족한 것 같다"며 "독일은 기업이 필요한 기술을 연구하고 직접 테스트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연구분야만 나열하고 있어 어떤 현장에서 어떤 요소를 자동화할지 구체적인 계획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인더스트리 4.0을 주도하는 독일 인공지능연구소(DFKI)에서 30개 기업과 연구소가 컨소시엄을 만들어 테스트베드를 구축하고 있는데 여기에 직접 참여할 계획"이라며 "외부에서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이제 연구소가 유럽 과학기술계 핵심에 직접 들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브리켄(독일)=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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