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인문학] 감성을 위한 `현상학` 들여다보기](http://contents.dt.co.kr/images/201512/2015120402102251607001[1].jpg "[디지털인문학] 감성을 위한 `현상학` 들여다보기")
누구나 인간의 삶에서 감성(sense)과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 감성이 없다면 어떠한 체험도 불가능할 것이며, 감정이 없다면 삶 전체가 이를테면 건조한 보고서 같은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하루의 삶을 가만히 생각해보라. 얼마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느낌들과 감정들 속에서 또 하루를 보냈는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이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아마도, 진정으로 이성적으로 살아가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전제한 주장이었을 것이다. 주지하듯 감성과 감정의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많은 학문적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주제였다. 서양철학의 '파토스'와 '정념' 개념, 동양철학의 '정(情)', '심(心)'에 대한 논의가 이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감성과 감정은 다양한 실증적 학문들, 예컨대 심리학, 생리학, 인지과학, 의학, 생물학, 나아가 사회학, 경제학, 언어학 등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특히 19세기 이래 자연과학적 방법을 따르는 학문들은 감성과 감정의 차원을 인간 신체의 물질적-물리적 변화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각적 지각과 감정 상태를 신체 기관이나 물질적 요소들의 미세하고 복잡한 작동기제와 변화 양상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감성과 감정을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으로서 느끼고 이해하는 일과 이들을 자연과학적-물리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독일의 현대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가 강조했듯이, 인간이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며 느끼고 지각하는 '푸름'과 이를 빛의 파장 공식으로 수량화시킨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전자는 살아있는 인간이 경험하는 생생한 '현상'인 반면, 후자는 이 생생한 경험을 빛의 자극과 파장이라는 객관적-물리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얻은 '수식'인 것이다. '현상'은 물리적 자극이 아니며, '경험'은 수학적 공식이 될 수 없다. 인간의 느낌이나 감정도 마찬가지다. 한 인간이 생생하게 느끼는 구체적인 감정 상태는 감정의 육체적 증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감정의 느낌 자체는 결코 혈압, 맥박, 호르몬 분비의 변화로 온전히 이해될 수도, 또 그러한 변화로 환원될 수도 없다. 물론 감정 상태와 육체적인 변화가 서로 아무런 인과론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서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가령, 우리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하고 처방도 받는 것이다. 하지만 두 차원이 신체적, 물질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두 차원이 동일한 차원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감성과 감정의 고유한 모습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어떻게 하면 감성과 감정의 살아있는 모습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까. 이때 반드시 필요한 사유의 방법이 바로 현상학(phenomenology)이다. 현상학 하면, 흔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상학은 결코 난해한 사상이나 복잡한 이론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느껴졌다면, 지금까지 현상학을 독자들에게 소개한 학자들의 잘못이 크다. 왜냐하면 필자의 생각에 가장 탁월한 현상학자들은 아주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시인과 문필가, 예술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간혹 시인과 문필가, 예술가들의 작품이 매우 난해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 우리는 이들의 작품을 읽고 감상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작품이 우리에게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길 때, 그것은 상당 부분 그 작품이 인간의 감성과 감정의 미묘한 뉘앙스를 대단히 섬세하고 명료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현상학적 방법도 마찬가지다. 현상학은 인간에게 다가온 현상 자체를, 즉 인간이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지각하는 구체적인 경험 자체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술하고자 한다.
물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존재한다.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편견과 선입견들이다. 선입견의 한 예로 어떤 사람이 느끼는 '슬픔'의 감정을 생각해보자. 일상적으로 우리는 감정을 한 사람의 마음의 상태, 즉 한 사람이 자신만의 내밀한 '마음(영혼 혹은 의식)속에 갖고 있는' 특별한 질적인 상태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이 사람의 비밀스러운 마음(영혼 혹은 의식) 속에 직접 들어갈 수 없는 한, 다른 사람이 그가 느끼는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을 뒤로 물리고, 조금만 천천히 슬픔의 '느낌 상태' 자체에 주목해보라. 슬픔의 느낌이 정말 저 알 수 없는 마음(영혼, 의식)이라는 '비밀의 방 속에' 있는가. 도대체 그 방이 정말 보이는가. 그 방이 정말 있기는 있는가. 몸으로 느끼는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오히려 슬픔이 나의 몸 전체의 느낌을 '감싸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나의 몸 전체의 느낌이 슬픔에 '젖어들고', 슬픔에 '사로잡혔다고' 표현하는 것이 현상의 진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그렇다. 현상학적으로 볼 때, 슬픔은 내가 내 안 어딘가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슬픔이 나를 찾아왔고, 나를 자신의 압박하는 힘 속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현상의 진실에 들어맞는다.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은 저절로 밖으로 향한 자신의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이렇게 일상적인 '영혼(의식)의 형이상학'과 '주체-중심적인' 선입견을 중지시켰을 때, 비로소 슬픔의 현상, 슬픔의 존재 양상 자체가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리고 탁월한 시인과 문필가, 예술가들은 대부분 감성과 감정의 생생한 존재 양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바로 뛰어난 현상학자인 셈이다.
하선규 홍익대 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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