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인문학] 기억해야 할 `말`들](http://contents.dt.co.kr/images/201510/2015103002102251607001[1].jpg "[디지털인문학] 기억해야 할 `말`들")
인문학 강의 혹은 고전읽기 강좌가 성행하고 있다. 때로 강연자와 청중의 관계가 멘토-멘티의 관계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관계 설정이 가능한 것은 강연자는 이미 고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깨달음을 통한 '앎'을 아직 미숙한 젊은 청년들에게 전수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문학을 통해 획득하는 '앎'이란 시간과 경험과 지식의 축적에 의해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적 '앎'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자리에서 얻는 것이다. 그 자리는 삶과 죽음의 사이,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 의미있는 것과 의미없는 것의 사이,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사이이다. 그 자리를 가장 잘 나타낸 표현은 바로 "사는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저 유명한 햄릿의 독백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질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문학적 깨달음의 자리에는 청년 햄릿이 놓인다. 그러므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청년의 자리에 우리를 놓는다는 것을 말한다. 청년은 우리의 멘티가 아니라 멘토이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는 2명의 대학생이 등장한다. 햄릿왕자와 재상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즈이다. 햄릿은 독일 비텐부르크에서 유학 중이며, 레어티즈는 파리에서 유학 중이다. 둘 다 대학생이라는 점 이외에도 두 사람은 모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유사한 조건을 지닌 두 사람은 앞서 말한 바의 청년의 자리 즉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다른 선택을 한다. 레어티즈는 삶으로부터 오는 말들을 선택하며, 햄릿은 죽음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선택한다.
레어티즈에게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멘토를 자청한다.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파리로 다시 돌아가는 아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침이 될 만한 많은 교훈을 주며 레어티즈는 아버지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반면에 햄릿이 따르는 것은 죽은 아버지의 유령의 말이다. 그는 억울한 죽음에 복수를 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유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타락했으며, 진실을 잊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령의 말을 들은 햄릿의 다음과 같이 되새긴다. "잊지 말라고? 그래, 불쌍한 유령아, 이 혼란한 세상에 기억력이 자리잡고 있는 한. 잊지 마라? 좋아 내 기억의 수첩에서 젊은 시절 귀담아듣고 거기에 베껴놓은 모든 시시껄렁한 기록들, 모든 문구와 감상들을 지워버리고, 네 명령만 내 두뇌의 비망록 속에서 홀로 살리라,"
햄릿은 책을 읽는다.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지성의 요람이었던 비텐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하던 햄릿이 읽고 있었던 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폴로니어스가 이를 궁금하게 여겨 물어보자, 햄릿은 대답한다. "말, 말, 말".
고전작품 속의 가르침은 한낱 말에 불과하다. 그 말은 죽은 자들이 쓴 말이며, 그 말을 다시 꺼내 뇌새기는 것은 유령의 말을 기억하려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햄릿은 그의 책을 놓지 않는다. 그는 삶과 죽음의 선택의 기로에서 그 말들을 기억하려고 한다. 삶의 자리에 이 말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우리 사회가 고전이 말하는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삶의 승리만을 추구할 뿐 죽음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햄릿이 죽은 뒤 덴마크를 정벌하고 왕위에 오르는 또 다른 청년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는 죽은 햄릿에게 예의를 표하는 조포를 울린다. 그것은 '세상은 썩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기억하라'는 이 유령같은 말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며 그 말을 기억하겠다는 맹세이다.
죽지 않는 말들이 들려온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조만수 충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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