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인문학] 윌리엄 터너의 `연기`](http://contents.dt.co.kr/images/201503/2015031302102251607001[1].jpg "[디지털인문학] 윌리엄 터너의 `연기`")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가 중의 한 사람인 윌리엄 터너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그는 영국을 포함한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의 풍광을 화폭에 담았는데, 그가 선택한 풍경이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이전의 화가들과는 매우 색달랐다. 험준한 산,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폭발하는 화산과 화마에 휩싸인 건물 등 자연의 엄청난 에너지를 즐겨 다루었다는 점에서 주로 명상과 관조의 대상으로서 자연을 표현한 다른 작가들과 구별된다. 더욱이 그는 습기 찬 대기와 그 사이를 관통하는 빛에 초점을 맞추어 대자연의 원초적 힘을 강렬한 색과 역동적인 붓터치를 통해 그려냈다. 바로 이점 때문에 그는 인상주의의 길을 개척한 화가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의 화폭은 점점 더 희뿌연 연기와 수증기, 안개, 물보라 등으로 채워지는데,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이처럼 연기 자체가 그림의 주인공이 된 작품은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터너는 무슨 연유로 연기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표현에 탐닉했을까?
어떤 비평가는 터너의 독특한 시각 방식을 작가의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찾는다. 그의 아버지가 이발사였다는 사실로부터 항상 수증기와 습기로 가득한 이발소 내부, 그 습기로 항상 물방울이 맺혀있던 유리창에 어린 터너가 익숙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섬나라 영국 특유의 기후와 환경인 안개, 비, 바람과 바다 등도 터너의 시지각 방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개인적이고 환경적인 요인 외에도 사회적인 차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도 있다. 당시 영국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의 발명에 따라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증가하는 원료와 제품을 운반하는 수단이 필요해지면서 증기 기차와 증기선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운송 수단이 뿜어내는 연기 또한 터너의 시선을 사로잡았음에 틀림없다. 1844년 작품 <비, 증기, 속도>에서 화가는 비와 구름, 물안개가 뒤섞인 연기의 표현을 통해 질주하는 기차의 속도와 힘을 보여주었다.
터너의 연기는 또한 당대의 낭만주의적 숭고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산업혁명에 따른 사회 경제 구조의 변화, 프랑스와의 종전 등으로 생긴 여행 붐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거대한 자연과 이국적 풍광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광대하고 압도적인 힘을 지닌 자연은 공포와 놀라움을 통해 숭고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자연적 숭고는 '절대적으로 큰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무한과 끝없음, 불분명하고 형태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터너 풍경화는 연기, 구름, 안개와 증기 등이 뒤섞여 모호한 가운데 숭고한 대자연의 힘과 원대함을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터너의 연기는 불우한 가족사와 관련이 있다. 터너보다 세 살 늦게 태어난 여동생이 채 다섯 살을 채우지 못하고 죽자 어머니의 마음에 병이 생기게 된다. 정신줄을 놓은 어머니 때문에 어린 터너는 열 살부터 외삼촌의 집에서 성장하게 되고, 마침내 터너 나이 29세에 어머니는 정신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연유로 터너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듯, 자신의 본업까지 팽개치고 성공한 화가 아들의 뒷바라지를 살뜰히도 챙긴다. 이러한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원래 괴팍하고 비사교적이었던 터너는 더욱 사람과의 접촉을 끊고 결국 만년에는 은둔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터너의 그림에서 자연의 풍광은 더욱 짙은 연기 속에 묻혀 그 형태가 한층 모호해지게 된다. 바로 이점으로부터 터너의 만년 그림 속의 짙어진 연기와 그의 심리 상태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서양 회화의 도상에 따르면, 연기는 촛불이나 유리잔, 해골, 깃털, 시계 등과 함께 삶의 유한성과 덧없음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터너의 연기는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 그런 환경에서 형성된 성격적 특성, 각별한 애정을 나누었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심리상태 등을 다면적으로 암시하고 상징하는 수단은 아니었을까?
이번 주말 터너의 인생 후반을 그린 영화 <미스터 터너>를 관람하면서, 터너의 배역을 맡은 배우의 명연기와 함께 터너의 연기 속으로 침잠해 작가의 삶과 예술에 대해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
김승환 조선대 시각문화큐레이터 전공 교수
[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