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냥 판교 오피스를 좀 더 싸게 빌려주는 겁니다." 최근 만난 한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대규모 R&D(연구) 예산이나 국가 사업을 원할 거라 예상했지만, 실제로 이들이 바라는 건 100조원 짜리 거대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팹리스 기업에게 시급한 건 당장을 버틸 수 있게 하는 임대료 인하였다.
이번 대선 기간 인공지능(AI) 산업 육성을 위한 '100조 투자'는 여야 후보들의 공통된 공약이었다. 정치권 전체가 'AI 3대 강국'을 향한 국가 전략에 뜻을 모은 셈이다. 이재명 후보는 그래픽처리장치(GPU) 5만장 확보와 초거대 AI 모델 개발 등을 공약했고, 김문수 후보는 GPU를 10만장 확보해 기업·대학·연구소에 제공하겠다고 맞섰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사뭇 달랐다. 'AI 100조 투자'라는 구호가 선거판을 달구는 동안, 국내 주요 팹리스 스타트업들은 여전히 사무실 임대료와 각종 비용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업계에선 국내 팹리스 기업의 절반 이상이 향후 3년 이상을 버티기 어렵다는 위기감도 나온다.
연구개발(R&D)로 신제품을 개발해야 하는 팹리스는 연구개발을 매출로 실현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예컨대 미국 메타로부터 1조원대 인수 제안을 받은 퓨리오사AI 역시 지금까지 별 다른 양산 실적은 없다. 소위 '대박'을 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지, 회사의 재무구조를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정부와 지자체도 이런 현실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해결책을 모색 중이다. 대표적인 시도가 '제3 판교' 시스템반도체 혁신 클러스터 조성이다.
그러나 이 역시 현장의 요구와는 간극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강남보다는 싸지만 경기주택도시공사(GH) 역시 수익성을 내야 하는 만큼, 정부의 직접적인 보조금 없이는 임대료를 파격적으로 내리기 어렵다. 지자체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의 통합적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새 정부는 중국과 보호무역에 밀린 기존 제조업 기반 산업 구조를 넘어 0%대 저성장 위기를 극복해야 할 숙제에 직면해 있다. 대선 주자들도 이를 알기 때문에 'AI 100조 투자'와 같은 어쩌면 비현실적일 수 있는 공약을 내놓은 것이다.
업계에선 팹리스 생태계에 대한 기초 인프라가 마련되지 않으면, 아무리 100조원을 투자해도 실질적인 산업 성장으로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거 매번 정권 초기마다 시스템반도체에 대한 대규모 육성계획이 나왔지만, 대한민국 팹리스는 여전히 영세한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여전히 대기업과 메모리반도체가 중심이다.
과거 역사에 기록된 대다수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던 이유는 '불만'만 있었을 뿐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기 정부가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을 다시 돌리고자 한다면, 엔진을 새로 만들겠다는 '보여주기 식' 공(空)약보다 당장 엔진의 막힌 곳부터 뚫어주는 '윤활유'를 적재적소에 투입하는 것이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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