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서 유대인·기독교 적대적 표현들 상당수 삭제
"관계 정상화 대비해 점진적 준비" vs "큰 변화 아냐" 신중론도
"관계 정상화 대비해 점진적 준비" vs "큰 변화 아냐" 신중론도
CNN은 "일부 교과서에선 이스라엘에 대항한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삭제됐다"며 "헤즈볼라, 이슬람국가(ISIS), 알카에다 등 이스라엘과 대립하는 이슬람 무장단체를 비판하는 내용도 추가됐다"고 전했다.
지난해 7월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사우디 제다에서 만나 원유 증산 문제와 관련한 회담을 하고 있다. 제다=AFP 연합뉴스
아랍연맹 소속인 사우디는 같은 이슬람권 국가인 팔레스타인과 싸우는 이스라엘과 오랜 적대 관계에 있었다. 2016년 수니파 사우디는 시아파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손을 잡았지만, 올해 3월 이란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이스라엘과 다시 틀어졌다. 중동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사우디에 이스라엘과 화해할 것을 촉구했다. 이스라엘도 관계 회복을 원했다.
사우디는 이 같은 상황을 지렛대로 이용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전략적 그린 라이트'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이스라엘과의 화해 조건으로 우라늄 농축 자체 기술과 핵연료 생산 시스템 개발에 도움을 줄 것을 미국에 요구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보도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카림 벤제마 등 축구 스타를 사우디 리그로 영입하고 사우디 국부펀드가 후원하는 리브(LIV) 골프와 미 남자프로골프리그인 PGA 투어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스포츠 워싱'에 열을 올려왔다. 미라 알 후세인 에딘버러대 소속 연구원은 사우디 왕실이 주도하는 스포츠 사업과 교과서의 대대적인 개정이 "무함마드 왕세자가 현대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외교관계 정상화를 추진 중인 사우디아라비아가 교과서에서 유대인이나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표현을 삭제했다. 대신 특정 이슬람 단체를 비판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19일(현지시간) CNN 방송 보도에 따르면 영국과 이스라엘에 본부를 둔 '학교 교육에서의 평화와 관용에 대한 감시 연구소(IMPACT-se)'라는 이름의 비정부단체는 중동 국가 교과서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조사한 보고서를 지난달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의 최신 교과서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표현들이 대부분 삭제됐다. 이 연구소는 2000년대 초부터 사우디 교과서를 모니터링해 왔다.
연구소는 2022∼2023년 사우디 80여 종의 교과서와 이전 교과 과정의 180여개 교과서를 비교 조사한 결과, 이런 차이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이슬람의 적",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율법과 복음을 '파괴하고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는다"와 같은 문구가 삭제됐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표현도 다소 완화됐다. '이스라엘 적', '시온주의 적'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점령군'으로 수정됐다. 2022∼2023년 교육 과정 중 '애국 시' 수업에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에 반대한다"는 예시가 삭제됐다.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선 1980년대 후반 벌어진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 봉기)의 긍정적 결과를 설명하는 대목이 삭제됐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장 전체를 아예 들어낸 교과서도 있다.
연구소는 "사우디 교과서에 헤즈볼라, ISIS(이슬람국가), 알카에다, 후티 민병대, 무슬림 형제단 등 특정 이슬람 단체를 비판하는 내용도 포함됐다"고 전했다.
아랍연맹 소속인 사우디는 같은 이슬람권 국가인 팔레스타인과 싸우는 이스라엘과는 오랜 기간 적대적 관계로 지냈다. 수니파 사우디는 시아파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2016년 이스라엘의 손을 잡았지만, 올해 3월 이란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면서 이스라엘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최근 중동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사우디와 이스라엘 간의 평화 중재에 나섰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교의 미라 알 후세인 연구원은 이러한 대대적인 교과서 개정에 대해 "걸프만 국가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현대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란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갑자기 180도 전환해 관용을 설파하기 시작한 건 매우 야심에 찬 일"이라고 덧붙였다.
워싱턴 내 걸프 국가 연구소의 크리스틴 디완 연구원은 "사우디가 최근 몇 년간 더 세속적인 형태의 민족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며 "이에 따라 시아파, 유대교, 기독교를 비하하는 종교적 표현이 완화됐다"고 분석했다. 디완은 "이스라엘과의 외교 정상화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질 경우를 대비해 점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교과서 내 일부 표현 삭제를 확대 해석해선 안 된다는 신중론도 있다. 사우디-이스라엘의 외교 관계를 연구하는 아지즈 알가시안은 "교과서 수정이 이스라엘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의 큰 변화를 시사하지는 않는다"며 "사우디와의 관계 정상화를 간절히 원하는 일부 이스라엘 사람은 긍정적 메시지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연내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다양한 중재 노력을 펴고 있다. 2020년 미국의 중재로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모로코 등과 '아브라함 협약'을 맺고 관계를 정상화한 이스라엘은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대아랍권 외교 확장의 최대 목표로 삼고 있다.
사우디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체결 조건으로 미국에 정밀무기 금수조치 해제, 우라늄 농축 및 핵연료 기술 등 민간 핵 프로그램 개발 지원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양수기자 yspark@dt.co.kr
(제다 AFP=연합뉴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오른쪽)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7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회담하고 있다. 블링컨 장관은 이번 방문에서 사우디 지도층을 만나 수단·예멘의 분쟁 종식, 이슬람국가(IS) 퇴치, 이스라엘·아랍국가 관계 정상화 등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2023.06.07
clynn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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