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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인간 시대로서 4차 산업혁명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입력: 2018-08-08 18:00
[2018년 08월 09일자 22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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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인간 시대로서 4차 산업혁명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보건복지부가 추진하고 있는 민관자살예방사업에 대해 대한의사협회에서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의협 반대의 핵심 요지는 약국이 참여하는 이번 민관자살예방사업이 의료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단계는 아닌 듯하다. 사실 그럴 마음도 없다. 자살 예방의 필요성에 대하여 관계된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며, 서로가 나름의 정당화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만히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더 나은 예방대책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그 바람의 한 편에서 자살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을 함께 생각해본다. 자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살에 대한 시선이란, 자살을 어떠한 문제로 보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앞서 언급된 분쟁은 이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분쟁의 당사자들은 보건복지부, 약국, 그리고 의협이다. 분쟁의 당사자들이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자살에 대하여 같은 시선을 갖고 있다. 이는 이들의 업무에서 쉽게 파악될 수 있다. 이 셋이 한 데 어우러질 수 있는 공통점에는 '보건(保健)'이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우리의 건강과 관련된 일을 한다. 건강은 또한 질병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일상적으로 병치레를 하지 않은 것은 곧 건강의 징표이기도 하다. 건강과 병은 마치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놓인 듯 보인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병을 이겨내는 힘을 갖추던지 아니면 그 병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 즉 보건은 이들 모두의 주요한 일이자 임무이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의 중심에는 자살이 놓여있다. 이들은 왜 지금 자살을 다루는 것일까? 자살은 건강과는 무관하다. 자살에 대한 이들의 시선이 가늠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들은 모두 건강과 관련해서 질병을 다루며, 이제 이들 모두 자살 예방에 관여하고자 한다. 그러니 이들에게 자살은 하나의 질병이다. 자살을 병으로 보는 것이 틀린 생각은 아니다. 알려진 것처럼 우울증과 같은 특정한 병증이 자살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이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어진 진실이 더 큰 법이다. 시(詩)를 단어들의 조합이라고 말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어들의 조합이 시의 모든 본질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자살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이 있다. 자살은 범죄라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도 유효한 생각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도는 자살을 범죄로 취급하였다. 관련 법률이 폐지되기 전까지, 자살에 대한 처벌이 뒤따랐다. 물론 그 처벌은, 표현이 거북스럽기는 하지만, 자살에 성공하지 못한 미수자에게만 가해질 수 있었다. 인도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복지국가의 원조처럼 여겨지던 영국에서도 같은 입장을 취한 바 있다. 산업과 전쟁의 시대였던 1930년 대 초 유럽은 힘든 시기였으며, 영국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 참혹한 시기에 힘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하였고, 영국 정부는 그 중 자살 미수자에게 감금형을 가하였다. 저명한 철학자인 버틀런드 러셀은 이 같은 영국 정부의 태도와 처사에 맹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누군가가 범죄에 대해 처벌을 받는 것은 그가 그 범죄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범죄라면 자살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수에 그친 범죄 역시 처벌의 대상이듯, 자살이 범죄라면, 그 미수 역시 처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범죄와 마찬가지로 범죄로서 자살을 보는 시선은 그 행위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지운다. 이 때, 자살의 이유 역시 개인적인 것이다. 러셀의 비판은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자살은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 자유로운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었다.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전쟁이었으며, 그 선택의 책임은 국가에 있다. 하지만 정작 국가는 자살에 대해서도, 전쟁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도 모두 범죄로 간주했었을 따름이었다. 여기서 자살을 범죄로 보는 시선과 그것을 질병으로 보는 시선과의 묘한 공통점이 드러난다. 이 두 시선 모두에서 자살은 개인의 책임이다. 물론 자살이 개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적으로 개인의 고립된 행위일 수만은 없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해 성찰하면서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염려하는 유일한 존재자임을 밝혀낸 바 있다. 물론 동물들도 죽음을 직감하면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하이데거의 말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염려하는 존재자는 자신의 삶을 숙고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죽음과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때, 죽음은 그저 삶의 끝일뿐이다. 그러한 시선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죽음에서 다시 삶을 성찰하게 된다. 어떠한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과 고민은 죽음에 대한 성찰과 별개의 것일 수 없다.

새로운 기술혁명의 시대가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그 시대가 인간의 시대가 되었으면 한다.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위원회에도 '사람 중심'이라는 말이 붙여 있기도 하다. 그 시대가 진정 그랬으면 한다. 그렇지만 그 시대가 진정 인간의 시대이기 위해서는 인간 삶에 대한 진지한 숙고가 늘 이루어져야 하며, 그 숙고를 위해서는 인간의 죽음은 진정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죽음으로서의 자살에 대한 시선이 최소한 보건보다는 복지에 맞춰져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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