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낭독기 사용시 다음 링크들을 이용하면 더 빠르게 탐색할 수 있습니다.
 
즐겨찾기 문화일보 PDF

[디지털인문학] `판코레아니즘`은 가능할까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입력: 2018-06-20 18:00
[2018년 06월 21일자 22면 기사]

원본사이즈   확대축소   인쇄하기메일보내기         트위터로전송 페이스북으로전송 구글로전송
[디지털인문학] `판코레아니즘`은 가능할까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기원전 776년부터 고대 올림피아 제전이 열렸다.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에서 쟁쟁한 선수들이 모여 달리기, 던지기, 격투기 등 기량을 뽐냈다. 그러나 이 제전은 스포츠 행사만은 아니었다. 그리스 최고의 신 제우스를 기리는 종교적 제의였으며, 공동체 의식을 고양시키는 정치적 의미도 강했다. 그리스가 수많은 도시국가로 나뉘어 살고 있지만,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신을 섬기며 같은 문화를 누린다는 사실을 새삼 부각시키는 '판헬라스제전'(panhellenia)이었다. 실제로 이 행사는 운동선수들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사상의 지도급 인사들에게는 그리스의 단결과 발전을 도모하는 방안과 정책을 밝힐 수 있는 기회였다.

기원전 380년에 제100회 올림피아 제전이 열렸을 때, 아테네의 철학자 이소크라테스는 '시민대축전에 부쳐'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의 요지는 또렷했다. "이제 이방인들과는 전쟁을 하되, 우리끼리는 한마음 한뜻이 될 것을 제안합니다." 여기에서 '이방인들'이란 그리스 동쪽에 거대한 덩치로 군림하던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그들은 수십 년에 걸쳐 그리스를 침략했고, 390년의 마라톤 전투와 380년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큰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음에도 여전히 호시탐탐 그리스를 집어 삼키려고 했다. 특히 그리스 세계를 이끌던 양대 세력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의 동맹군들을 끌어 모아 서로 크게 맞붙어 27년 동안이나 내전(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지속하는 동안, 그리고 그 전쟁이 끝나고도 도사국가들 사이에서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동안, 페르시아는 교묘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외교적 농단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스의 지식인들은 답답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풀이 죽어 있던 아테네에게 페르시아가 접근해서 돈과 군비를 지원하여 기세등등하던 스파르타를 견제하게 만들었으며, 테베나 코린토스와 같은 쟁쟁한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맞설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 내부의 역학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시끄러웠고 그리스는 맥을 못 추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농단에 편승해서 자신과 당파의 이익을 늘려나가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매국적이고 이기적인 의도가 있기도 했고, 어리숙하게 페르시아에게 이용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찾던 지식인들은 '판헬레니즘'(panhellenism)이라는 이념의 깃발을 쳐들었다. '판'이 '모든'을, 헬라스는 그리스를 뜻하니, 그리스인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자는 주장이었다. 내부의 갈등은 그리스의 발전을 막고 결국 파멸로 이끌 것이며, 최종적 이익은 외부의 페르시아가 두둑하게 챙길 것이라는 인식에 뿌리를 둔 이념의 나무였다.

이소크라테스는 거기에서 한발 더 나갔다.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진 그리스의 힘을 외부로 돌려, 아예 페르시아를 쳐서 정복하자는 것이었다. '말은 좋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겁나고 떨린다.'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할 때, 그 이념을 진지하게 자신의 행보로 삼고 실천했던 사람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그의 도전은 30대의 젊음에서 나온 무모함으로 보였지만, 결국 그는 해냈다. '판헬레니즘'이라는 꿈과도 같은 정치적 구상이 패기 넘치는 지도자에 의해 실현된 것이다. 그는 그리스의 힘을 하나로 모아 페르시아를 점령한 다음에 인도 서쪽까지 진군했고, 그리스가 스파르타와 아테네로 양분되어 전쟁을 치르고 전쟁 후에도 수많은 정치적 단위로 쪼개져 갈등할 때에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엄두도 낼 수도 없었던 엄청난 제국을 이룬 것이다.

지금 여기. 남과 북이 전쟁의 원한을 품고 앙숙같이 대립해 온 65년의 구조가 획기적으로 바뀔 기회가 눈앞에 와 있다. 우리도 그때 거기의 그들처럼 갈등을 극복하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공동의 번영을 모색하며, 세계적인 수준의 탁월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지금은 칼과 창을 들고 정복활동을 했던 그때 거기와는 다르지만, 다양 양상의 치열한 경쟁과 전쟁이 계속된다는 점은 비슷하다. 경제와 정치, 외교의 방편을 통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판이 전 세계적으로 짜여 있으니 말이다. 이런 판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한 '판코레아니즘'(pankoreanism)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정치(政治)적 상상력과 정치(精緻)한 이념, 뚝심 있는 발걸음과 실천의 의지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DT Main
선풀달기 운동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