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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그 따뜻한 봄날의 설레임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입력: 2018-05-07 18:00
[2018년 05월 08일자 22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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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그 따뜻한 봄날의 설레임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한번 설레고 부푼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질 않는다. 그 봄날의 풍경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파란 난간의 도보 다리를 걷는 두 남자. 수묵화처럼 검게 그어 올린 나무, 거기에 갓 피어난 푸릇푸릇한 잎들, 갈색의 갈대와 이름 모를 풀대들을 배경으로 그들이 들리지 않는 대화를 나누며 앉아 있고, 새소리만 산뜻하게 간간이 들리던 따뜻한 봄볕의 그 풍경. 그 여운이 계속 나를 들뜨게 한다. 눈을 감아도, 떠도 계속 떠오르는 그 모습. 언제나 아름답고 기분 좋은 '인생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꾸 웃음이 입술에 그어진다. 부자가 된 것 같이 마음이 너그럽고 풍요롭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해괴한 헤어스타일에 뚱한 표정, 표독스런 눈빛으로 오만하게 거들먹거리던 그 남자가 그 풍경 속에서만은 예전의 그 불편한 거부감을 조금도 일으키지 않았다. 감청색 슈트에 내내 뒷모습만 보여주었던 희끗한 노신사와, 마치 오래된 친구였던 것처럼 마주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얼굴, 거기엔 30대 중반 젊은 나이에 2500만 인민을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책임 있는 행보를 걷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 진지함이 느껴졌다. 금발의 거구 트럼프의 말대로 그는 우리를 속이는 것 같지 않았다.

꿈만 같다. 그와 우리의 지도자가 만나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 내다니. 꿈이라면 깨어나지 말기를. 부디 지금 이 희망이 깨지는 일은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감사했다. 65년 전에 그어진 휴전선은 전쟁의 아픔과 형제에 대한 적대감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낙인처럼 남겼지만, 그 따뜻한 봄날에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은 그 상처를 잠시 다독일 수 있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던 나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설레게 한 이날의 풍경은 느닷없이 터진 전쟁에 휩싸여 총성과 폭탄의 굉음에 시달렸던 무서운 기억이 있던 이들, 그 아수라장 속에서 가족과 헤어지기도 하고 직접 눈앞에서 가족의 죽음을 봐야 했던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진정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 진실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속단할 수도 없고, 감정적으로만 들떠서 무작정 상대를 믿고 순진하게 행동하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그럴 때 갖게 될 배신감과 절망은 우리 모두에게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남기고, 남과 북을 돌이킬 수 없이 틀어지는 관계 속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냥 일단 한 번 해보자, 그럴 일도 아니다.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고 차가운 이성으로 사태를 다시 짚어봐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를 감동하게 만든 그날의 모든 것이, 그가 직면한 현재의 정치적·외교적·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졸지에 연출한 '위장 평화의 쇼'이며, 그때 그곳에서 두 사람이 표출한 그 아름다운 모든 말들이 부질없이 던져진 '공허한 말의 성찬'일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도 들어볼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열정과 냉정 사이. 하지만 냉정을 촉구하는 그 어떤 목소리도 아직 나의 마음에 인 이 유쾌한 파문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아무리 찬물을 끼얹는 말에도 콩닥거리기 시작한 내 심장의 열정과 희망이 식질 않는다.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으로 움직이며, 그 뜨거운 열정이 사람들의 행동과 삶의 방향을 이끄는 경향이 있다. 그 열정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것이 나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지래 겁먹고 진정시킬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뜨겁고 순수한 열정에 추동되어 행동한다. 시련을 견디는 힘은 냉정한 이성이 아니라, 그 뜨거운 열정에서 분출된다. 이성은 열정이 가리키는 그곳을 향해 잘 갈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해주는 도구며 수단일 경우가 많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러나 기우가 지나쳐 열정을 식히는 순간, 꼼꼼한 계산만 남고 그것은 조잡한 속셈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어쩌면 긴장과 분단으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저열한 속셈을 가진 사람들이 그 봄날 따뜻한 풍경의 감동과 평화의 희망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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