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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통일 바라보는 두 세대의 시각차

조만수 충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입력: 2018-02-08 18:00
[2018년 02월 09일자 22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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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통일 바라보는 두 세대의 시각차
조만수 충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평창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종목의 남북 단일팀을 추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단일팀 구성에 대한 첫 소식이 들렸을 때의 젊은 세대 반응은 이를 추진한 '고위층'들을 무척 당황하게 만들었다. 가슴 울컥하는 감격을 예상했는데 기존 대표팀 선수들과의 형평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으니 말이다. 하나의 민족팀을 구성하는 문제라고 인식했는데, 이를 낙하산 인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소통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이 통일문제에 대한 젊은 세대의 무관심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1987년 6월항쟁세대와 2017년 탄핵세대를 구분짓는 사유 방식의 근본적인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386세대는 87년 6월항쟁과 2017년 탄핵정국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기를 원한다. 영화 '1987'이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버스 위로 힘차게 올라선 여주인공의 시야 속에서 1987년과 2017년의 시간을 단숨에 하나로 만들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가 자기 세대관객의 뜨거운 감격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천만관객의 호응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처럼 세대가 다른 두 경험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싶어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뛰어넘고자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두 세대를 구분짓는 것은 시간에 대한 관념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회고적으로는 승리의 기억일 수 있지만, 87년 6월항쟁은 사실 386세대에게는 패배의 기억이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629선언에 의해서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그 해 선거에서 단일화의 실패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다. 그 이후의 시간 속에서도 계속되는 실패와 고난 속에서 실상 '민주화' 세대에게 민주주의는 현실태가 아니라 미래의 시간 속에서 가정하는 이상적 상태로 유예된다. 문민정부, 국민정부, 참여정부 속에서도 사실상 그들은 항상 민주화의 과정 속에 자신들을 위치지었다.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유예된 시간성을 갖는 '민주화'라는 단어와 그들은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도 저 멀리 있는 미래의 민주주의 사회를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와 같은 시간은 메시아적 시간성을 보인다. '통일'의 개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통일은 '우리의 소원'이며 '꿈에도 소원'이기에 항상 미래의 시간에 위치한다. 그들에게 통일은 오늘의 현실이 아닌 미루어진 과업인 것이다.

민주화세대와 그 보다 앞선 산업화세대는 서로간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적 시간의 관념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산업화 세대 또한 미래의 '잘 사는 나라'를 위해 현재는 고통 속에서 참고 견디는 유예의 시간이었다. 세대의 대립이라고 여겼는데 수평적인 좌(?)우의 문제 아니라 여야의 문제로 대립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이처럼 시간의 인식 속에서 동일한 '동시대적'인 쌍생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젊은 날 열혈투사였던 이가 훗날 수구강경보수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변신해도 스스로는 자기모순이 없다고 주장하는 희극적인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란 유예된 미래 속의 대상이 아니다. 민주주의란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항상 현실태이다. 소득 3만달러, 4만달러라는 미래를 향한 약속이 현혹하는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현재에만 국한된 시야를 지닌 것은 아니다. 현재의 경제적 여건들로 인해 오늘의 세대가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야보다는 현재에 함몰된 미시적이며 개인적인 시각을 갖게 됐을 것이라는 진단은 그들을 왜곡한다.

앞 세대와 그들을 나누는 큰 차이는 현재형의 시간을 파악하는 방식에 있다. 그들에게 현재의 시간은 미래와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들에게 현재는 애벌레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그 시간 속에서는 못난이 애벌레로부터 화려한 날개를 펼치는 완전한 나비로의 변신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배아의 시기로부터 나비는 이미 애벌레에게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애벌레가 바로 나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비가 될 때까지의 애벌레의 상태를 감내하거나, 또는 나비가 될 때까지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애벌레와 나비를 동일 선상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민주화 혹은 통일이라는 단어 보다 '정의'라는 단어가 더 호응을 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는 민주화 혹은 통일처럼 미래에 속하는 단어가 아니라, 미래의 시간 속에서나, 현재의 시간 속에서 동일하게 유효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통일이라는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이와 같다. 통일은 유예된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이미 도래한 현재 속의 미래이다. 그렇기에 통일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의 사회적 정의, 기회의 균형의 문제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오늘의 세대는 인식한다. 단일팀을 구성하는 과정과 그 방식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사회는 통일을 현재형으로 준비하고 있는가? 통일이 '대박'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사회의 모순을 통일된 나라 속에서 확대하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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