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 한국제약협회 회장
■ 2015 새해 새 비전
"한국 제약산업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동안 리베이트 등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회복하는 단계인 만큼 올해는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성과를 거두는 한 해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경호 한국제약협회 회장은 최근 제약산업에 일고 있는 변화를 보며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제약은 120년의 역사를 가진 산업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겨우 최초로 연매출 1조원을 넘긴 기업을 배출했다. 산업 규모는 20조원대에 머물고 있고, 의사들에게 뒷돈을 건네는 불법 리베이트가 만연한 산업이란 인상을 국민들에게 주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제약업계는 최근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변화하고 있다. 다국적 제약사들의 신약을 복제한 '제네릭' 의약품 판매에서 벗어나 자체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려 토종 신약들을 연이어 개발하고 있으며, 이렇게 만든 약을 해외에 들고 나가 계약을 맺는 성과가 이어지고 있다. 이제 불법 리베이트에서 벗어나야 생존할 수 있다는 인식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강도 높은 윤리경영 체계를 도입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이 회장은 '신약R&D·글로벌 공략·윤리경영'이란 키워드를 통해 국내 제약산업이 다시 한 번 도약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제약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다국적 제약사들 틈에서도 꿋꿋이 자국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국내 제약기업들이 그 역량을 세계 무대에서 펼칠 수 있을 것이란 희망 때문이다.
대담=안경애 생활과학부장
- 지난해 국내 제약산업의 성과에 대해 평가한다면.
"지난해 우리 제약산업은 '의약품실사상호협력기구(PIC/S)' 가입으로 공식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PIC/S 가입국 간에는 자국 관리기관이 평가한 인증이 상호 인정된다.
한국이 PIC/S에 가입했다는 것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관리하는 규정이나 실제 집행하는 수준이 선진국 수준이라는 의미다. PIC/S에 가입된 43개국은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등 제약 선진국과 이들 주변국, 또는 다국적 제약기업이 현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전 세계적으로 제약산업은 다국적 기업들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는데, 드물게 현지 제약기업들이 버티는 곳이 한국 시장이다. PIC/S 가입을 통해 국산 의약품 품질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만큼, 국내 기업들이 더 적극적으로 신약개발 R&D에 투자하고,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 시장에 나가야 한다. 협회 차원에서도 지난해부터 국제활동에 적극 참여해 한국 제약 산업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감을 갖고 국내 산업을 세계에 알리고,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세계 시장의 규제나 기준 등에 동참하고 있다."
- 국내 제약산업에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는가.
"지난해 정부와 제약사들이 함께 남미시장을 개척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멕시코, 에콰도르, 브라질 등 여러 남미 국가들이 우리 제약산업과 제휴하기를 희망했다. 특히 에콰도르에서는 국내에서 허가받은 제품을 자국에서도 별도 절차 없이 인정해주기로 했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보령제약의 고혈압 신약 '카나브'의 경우 처음 멕시코에서 허가를 받았다. 보령제약과 계약을 맺은 현지 업체는 남미 전역에 유통망을 갖고 있어 주변국들로도 손쉽게 진출이 가능할 전망이다.
이런 성과를 거두며 얻은 것이 업계의 '자신감'이다. 해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수준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어 기업들이 자신감을 많이 가졌다. 곧바로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시장에 가지 못해도 남미나 중국 등 시장을 먼저 확보하면 이를 기반으로 선진시장까지 나아갈 수 있다. 아직 글로벌 제약사들에 비해 자금력이나 마케팅 능력이 부족하지만 틈새를 보면서 신약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얻은 수익을 R&D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만약 여기서 끈을 놓치면 다국적 제약사들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 기존 질서에 끼어들어 갈 틈이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 국내 제약기업들의 혁신은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는가.
"한미약품의 경우 개량신약에 강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제약 산업 수준이나 기업들이 가진 자금력 등을 봤을 때 개량신약에 가능성이 있다. 이같이 다국적 회사들이 잘 하지 않는 틈새들이 있다. 세계적인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은 좋은 약이지만 계속 사용하면 내성이 생긴다. 국내 제약사인 일양약품은 글리벡에 내성이 생긴 환자에게 사용하는 치료제인 '슈펙트'를 개발했다. 이 약은 글리벡이 사용되는 곳에는 같이 팔 수 있다. 이런 것이 다 틈새가 될 수 있다.
앞으로는 복제약만 만들어서는 전망이 없다. 글로벌 기업들도 신약 개발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그동안 갖고 있던 특허를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하고 있고, 특허 만료 후 복제약 경쟁에도 더 신경을 쓰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하면 복제약만 하던 기업들은 분명히 어려워진다. 우리도 신약이 있어야 한다. 아직 R&D 역량은 다국적 기업들에 비해 떨어지지만, 차근차근 성과들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제약산업 발전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신약에 대한 정부 지원이 최근 바이오 기술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시장 상황이나 제품의 파급력은 아직 전통 화합물 의약품이 중심이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역량을 갖추려면 신약개발에 더 투자를 해야 한다. 기업들에 몇억씩 나눠주는 식으로는 안 된다. 정부가 과감하게 제약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지목해 연간 1조원 정도를 투입하고, 기업들도 같이 투자해서 마지막 남아있는 글로벌 잠재력을 일궈야 한다.
벨기에의 경우 작은 나라이고 자국 제약산업 기반이 크지 않지만 국가R&D의 35% 정도를 과감히 신약 개발에 투입해 세계 시장에서 투입한 것 이상으로 거둬들이고 있다. 신약 개발은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단기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더라도 지속 가능한 육성책을 마련해야 한다. 과감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가격이다. 그동안 선순환 고리에 리베이트라는 악성 바이러스가 있었지만, 이게 치유된다면 기업들의 투자에 대해 가격으로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특히 약가제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 기업들이 장기적인 수익을 보고 투자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한다."
- 제약업계의 변화를 위한 협회의 계획은.
"글로벌 시장은 다국적 제약사들의 네트워크가 강해 뚫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최근에는 신약개발 초기 단계부터 다국적 제약사와 함께 개발하고 마케팅도 함께 하는 협력 사례가 늘고 있다. 과거에는 임상 1상 시험을 마치고 기술을 이전하는 식이었다면, 최근에는 파트너십 관계를 맺고 공동으로 시장에 진출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기술이전하고 손을 터는 것과는 성과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제약협회는 이런 기회를 넓히기 위해 지난해 다국적제약기업협회와 함께 'R&D 오픈 이노베이션' 행사를 진행했다. 행사에는 글로벌 기업에서 R&D 책임자들이 직접 한국을 찾았고, 여러 협력이 이뤄졌다. 특히 한국을 찾은 R&D 책임자들이 국내 신약 R&D에 대한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의미가 컸다. 올해는 더 잘 준비해서 국내에서 진행되는 연구들이 더 많은 파트너와 투자사를 찾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국민들에게 제약산업의 중요성을 더 알려 나가고자 한다. 국가적으로 위급한 상황이 왔을 때 자국 기업들이 필요한 의약품을 당장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을 지녔는가는 국가안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요소다.
또 세계 제약시장은 1000조원이 넘는 가장 큰 시장이다. 반도체나 자동차보다도 산업규모가 크다. 1조원을 투자하면 10조원 이상 벌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제약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산업이 성공적으로 발전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경제적 파급효과를 더 고려해줬으면 한다."
- 올해 제약산업이 나가야 할 주요 방향은 무엇인가.
"현재 국내 제약업계가 전체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방향은 R&D 투자를 확대해 경쟁력 있는 우리 제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것과 윤리경영을 정착시키는 것이 제약 산업이 살아남아 발전하기 위한 필수 과제로 꼽힌다.
특히 올해 제약업계의 최대 과제는 윤리경영 체계로 쇄신하는 것이다. 리베이트는 다른 산업 분야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모두 불법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의약품의 경우 소비 결정을 의사라는 중간자가 하다 보니 중간자가 대가를 받는 것이 도덕적으로 이슈가 됐고, 약값이 건강보험 제도 하에 관리되면서 리베이트로 인한 약값 상승으로 불필요한 재정이 소모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돼왔다.
하지만 이제 리베이트 규제 관련 국가 법·제도도 상당한 수준에 올랐고, 기업들도 더 이상 리베이트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협회는 지난해 윤리경영과 관련한 새로운 합의 시스템을 만들고 윤리강령을 선포했다. 또 자율준수를 위한 임원급 책임자 선정과 권한 부여, 사내 직원 교육과 위반 사례에 대한 관리 내용 등 세세한 규정을 만들었다. 이미 상위 기업들은 윤리 규정을 따르지 않는 직원들을 해고하는 등 강경하게 가고 있다.
이같은 변화를 통해 제약업계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정리=남도영기자 namdo0@dt.co.kr
◇ 이경호 회장은…
○ 약력
- 1973 서울대학교 법대 법학과 졸업
- 1982 미국 몬타나대 환경대학원 환경학 석사(환경경제학 전공)
- 1993 서울대학교 보건학 박사(보건경제학 전공)
- 1973 제14회 행정고시 합격
- 1974 보건사회부 행정사무관, 환경청 행정사무관
- 1980 환경청 과장(청장 비서관, 환경평가과장, 법무담당관, 폐기물처리과장)
- 1985 보건사회부 과장(행정관리담당관, 기획예산담당관, 약무정책과장, 공보관)
- 1991 국립사회복지연수원 원장
- 1992 주미 대사관 보건복지참사관
- 1995 보건복지부 약정국장, 식품정책국장, 보건정책국장
- 1998 대통령 비서실 보건환경비서관, 보건복지비서관
- 1999 보건복지부 사회복지정책실장, 기획관리실장
- 2001 보건복지부 차관
- 2003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원장
- 2007 인제대학교 총장
- 2010~ 한국제약협회 회장
○ 수상이력
- 2000 황조근정훈장
- 2004 동암약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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