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 짙게 깔린 가을 들녘은 고흐의 그림을 옮겨 놓은 듯했다.
고개 숙인 황금빛 벼이삭 사이로 햇살이 비쳐 온 들녘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노을이 쏟아낸 작은 불꽃들이 때 맞춰 불어온 바람을 타고 일렁이고 있었다.
한 여자와 두 남자가 들녘 사이로 흐르는 수로 위의 작은 둑에 앉아 불타오르는 가을 들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두 남자 사이에 앉아 있었다.
"미안해, 원호야." 침묵을 깨고 여자가 한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기다렸다는 듯 동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논둑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참새 떼가 동규 앞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풍성한 가을 잔치에 흥이 난 듯 재잘거리고 있었다.
"선수야, 생각나니? 첫 여행을 떠나던 그때…" 그렇게만 말하고 원호는 선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수는 수로를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노을이 수로 위에도 비쳐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태안반도의 한 이름 없는 해수욕장이었지. 감동적인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어. 그날도 저녁 노을이 장관이었어. 아마 이 시간쯤이었을 거야. 해수욕장을 빠져나와 함께 갯벌을 거닐었잖아? 난 정말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어. 용기를 내어 끌어안는다는 것이 그만…… 그때 네 모습 잊을 수가 없어." 원호는 논둑에서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어 수로를 향해 던졌다.
풍덩 빠지며 붉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선수는 고개를 돌려 원호를 바라보았다.
저녁 노을에 비친 원호의 얼굴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선수도 그때 그랬다.
남자의 느낌이 그렇게 강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숨이 막혀 갯벌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가 없었다.
원호가 느낌으로 다가올 뿐 둘이서 갯벌위를 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도 없었다.
갯벌이 그렇게 아늑할 수 없었으며, 거저 황홀할 뿐이었다.
해가 바다에 빠지고, 물이 차오르는 것까지 느낄 수 없을 정도였으니…… "넌 정말 멋졌어." 선수는 원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바다 멀리 떠 있던 조각배 한 척,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난 그 조각배에 널 싣고, 나도 실었어. 그리고 끝없는 항해를 상상했었다.
서해 바다를 빠져나가 태평양으로… 순항만이 있을 뿐 높은 파도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 근데 우리가 탄 그 조각배는 풍랑을 만났어. 거친 풍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선수야, 어떻게 하면 돼?" 원호와 선수는 저녁 노을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마주쳤으나 선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선수의 현재 마음이 그랬다.
원호는 더 이상 멋진 모습으로 선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은 것도 아니었다.
만남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하더니 원호에 대한 느낌이 선수에게서 하나 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뿐이었다.
동규 때문에 원호와 멀어진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동규에게 쏠리는 마음을 접기 위해서 일부러 원호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H2P의 상두에게서 백지수표를 받고 원호와 동규에게서 동시에 장미꽃 한송이를 받던 날만 해도 선수는 원호가 다시 자신의 마음 한 자리를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동규와의 관계는 한 순간의 바람으로 생각했었고, 원호와 동규의 결투에 대해서도 선수는 농담 수준으로 받아들였다. 사실이지 선수는 상두의 백지수표에 적혀 있던 내용을 잊고 있었다.
H2P의 천국과 지옥 게임에서 지면 선수에게서 물러나기로 한 그 발상, 선수는 그저 해본 소리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선수의 동의도 없이 각본이 만들어졌고, 선수는 결투의 심판으로 모니터 앞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H2P 상두와 마니아 클럽의 영철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영철의 마니아 클럽 안에 게임 마니아 사이트를 띄우면서 기획된 이벤트 중 하나가 진검 승부 결투였으며 인터넷 중계까지 약속한 상황이어서 선수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어제 저녁 10시 황금 시간대였다. 선수는 심판으로서의 중립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원호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원호와 동규의 캐릭터가 지옥 탈출을 위하여 진검 승부를 벌일 때 누가 우세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프로 게이머로서 심판을 보던 선수조차 놀랄 정도였었다.
마니아 클럽 회원들의 응원도 대단했었다.
원호 편과 동규 편으로 나뉜 응원 사이트에 쉴새없이 글들이 올라와 사이버스페이스 상에서 벌어지는 결투 장면에 관심을 보였다. 문제는 캐릭터 싸움을 끝내고 미로의 궁전을 빠져나갈 때 발생하고 말았다.
심리 게임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미로의 궁전은 마음이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수렁에 빠지고 마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동규는 캐릭터의 길 안내에 의심을 하지 않고 묵묵히 따랐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늘 맞서 싸웠고, 선택한 길을 따라 미로를 헤쳐 나갔다.
그러나 원호는 달랐다.
갈림길에서는 늘 망설였으며, 선택한 길을 가다가도 뒤돌아보는 습성이 있었다.
당연히 수렁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선수는 심판자로서 중립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공개적으로 누구의 여자라는 소문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것도 사이버스페이스의 친구들에게서는 더 들을 수 없었다.
은밀하게 동규가 가는 미로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시간을 끌고, 원호의 미로에는 장애물을 제거하여 시간을 벌도록 했다.
그래도 미로의 궁전 앞에 먼저 선 사람은 동규였다. 선수는 비상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동규의 키가 닿는 곳에 방호벽을 설치하여 미로의 문이 열리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원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뒤늦게 달려온 원호가 미로의 궁전을 먼저 열었다.
"원호가 미로의 궁문을 먼저 열었지만 미로를 먼저 뚫은 사람은 동규입니다.
두 사람은 H2P의 진검 승부에 이어 미로의 궁전 게임에서도 무승부입니다.
선수는 그렇게 함으로써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동규의 우직함이 매력으로 다가오기는 했지만 원호를 버리고 동규가 이겼다고 진기한 결투를 지켜본 200만에 이르는 네티즌에게 선포할 수는 없었다.
선수가 원호에게 배반 때렸다고 말이 많은데 그것을 증명해 보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사랑이란 감정을 공개하기가 싫었다.
혼자의 느낌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해가 들녘 저 끝에 걸려 있었다.
선수 앞에 그림자가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 그림자를 따라가자 그림자가 끝나는 그 자리에 동규가 서 있었다.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끄집어내어 한 모금 홀짝 마시고 있었다.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는 해를 잡으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는 듯 무릎을 쳤다.
"맞다!" 동규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은 선수와 원호에게까지 전해 왔다.
원호는 미친 놈, 취했나 봐, 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동규는 들판을 거닐며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동규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아니 선수가 원호에게 미안해, 원호야, 하는 말에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규는 셋 중에서 하나의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들판을 거닐며 동규의 주인이 누구였나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선수가 내 주인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맞다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선수와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이 가을 바람을 타고 동규의 뇌리를 스쳤다.
곰인형 살인소동을 벌이던 선수, 병상에 누워 있던 선수, 원호가 나타나 병실을 떠나면서 확인한 창백한 모습의 선수…… 그날은 밤새 하염없이 걸었지만 되돌아온 곳은 선수의 병실이었다.
'그때는 선수가 마음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술병을 끄집어내어 한 모금 꼴깍 마셨다.
손바닥만한 양주병에 담긴 소주 맛이 유난히 썼다.
동규는 몸을 움츠리며 치를 떨었다.
그때 불현듯 원호와 벌이던 진검 승부의 결투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구를 위한 결투였어? 분명히 선수를 위한 결투였는데……' 동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결투는 선수를 위한 결투가 아니었다.
분명히 말해 결투의 주인은 동규도 아니었고, 원호도 아니었다.
선수는 심판도 아니었다.
주인이 동규라면 선수는 동규에게 다가와 있어야 했고, 원호라면 원호에게 다가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선수는 동규와 원호 사이에서 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뿐 변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달라진 사람이 누구일까? 동규는 비로소 답변을 찾을 수 있었다.
맞다, 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한 오라기 남은 황혼의 금빛 들녘 사이를 걸어 선수와 원호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배우에 불과했어. 연기를 한 것뿐이야." 동규는 내뱉듯 한마디를 던졌다.
"……" 선수와 원호는 의아한 눈초리로 취한 모습의 동규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투의 주인공은 원호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어. 관객을 동원하기 위해 재주를 부리도록 짜여진 곰에 불과했어. 봐! 너와 나, 그리고 선수 사이에 변한 게 뭐야? 우린 곰처럼 재주를 부렸고, 돈을 챙긴 것은 영철이 형과 상두 형이었잖아? 선수를 볼모로 우린 당한 거야. 사이버스페이스 2백만 관객 앞에서 재주를 부린 곰에 불과하다고……" 동규는 주머니 속에서 다시 술병을 끄집어내어 마지막 남은 한방울까지 마셔 버렸다.
아쉬운 듯 빈술병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수로에 집어던지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대중가요 한 자락을 인용하여 독백처럼 흥얼거리며 논둑을 걸어갔다.
고개 숙인 황금빛 벼이삭 사이로 햇살이 비쳐 온 들녘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노을이 쏟아낸 작은 불꽃들이 때 맞춰 불어온 바람을 타고 일렁이고 있었다.
한 여자와 두 남자가 들녘 사이로 흐르는 수로 위의 작은 둑에 앉아 불타오르는 가을 들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두 남자 사이에 앉아 있었다.
"미안해, 원호야." 침묵을 깨고 여자가 한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기다렸다는 듯 동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논둑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참새 떼가 동규 앞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풍성한 가을 잔치에 흥이 난 듯 재잘거리고 있었다.
"선수야, 생각나니? 첫 여행을 떠나던 그때…" 그렇게만 말하고 원호는 선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수는 수로를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노을이 수로 위에도 비쳐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태안반도의 한 이름 없는 해수욕장이었지. 감동적인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어. 그날도 저녁 노을이 장관이었어. 아마 이 시간쯤이었을 거야. 해수욕장을 빠져나와 함께 갯벌을 거닐었잖아? 난 정말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어. 용기를 내어 끌어안는다는 것이 그만…… 그때 네 모습 잊을 수가 없어." 원호는 논둑에서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어 수로를 향해 던졌다.
풍덩 빠지며 붉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선수는 고개를 돌려 원호를 바라보았다.
저녁 노을에 비친 원호의 얼굴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선수도 그때 그랬다.
남자의 느낌이 그렇게 강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숨이 막혀 갯벌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가 없었다.
원호가 느낌으로 다가올 뿐 둘이서 갯벌위를 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도 없었다.
갯벌이 그렇게 아늑할 수 없었으며, 거저 황홀할 뿐이었다.
해가 바다에 빠지고, 물이 차오르는 것까지 느낄 수 없을 정도였으니…… "넌 정말 멋졌어." 선수는 원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바다 멀리 떠 있던 조각배 한 척,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난 그 조각배에 널 싣고, 나도 실었어. 그리고 끝없는 항해를 상상했었다.
서해 바다를 빠져나가 태평양으로… 순항만이 있을 뿐 높은 파도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 근데 우리가 탄 그 조각배는 풍랑을 만났어. 거친 풍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선수야, 어떻게 하면 돼?" 원호와 선수는 저녁 노을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마주쳤으나 선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선수의 현재 마음이 그랬다.
원호는 더 이상 멋진 모습으로 선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은 것도 아니었다.
만남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하더니 원호에 대한 느낌이 선수에게서 하나 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뿐이었다.
동규 때문에 원호와 멀어진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동규에게 쏠리는 마음을 접기 위해서 일부러 원호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H2P의 상두에게서 백지수표를 받고 원호와 동규에게서 동시에 장미꽃 한송이를 받던 날만 해도 선수는 원호가 다시 자신의 마음 한 자리를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동규와의 관계는 한 순간의 바람으로 생각했었고, 원호와 동규의 결투에 대해서도 선수는 농담 수준으로 받아들였다. 사실이지 선수는 상두의 백지수표에 적혀 있던 내용을 잊고 있었다.
H2P의 천국과 지옥 게임에서 지면 선수에게서 물러나기로 한 그 발상, 선수는 그저 해본 소리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선수의 동의도 없이 각본이 만들어졌고, 선수는 결투의 심판으로 모니터 앞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H2P 상두와 마니아 클럽의 영철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영철의 마니아 클럽 안에 게임 마니아 사이트를 띄우면서 기획된 이벤트 중 하나가 진검 승부 결투였으며 인터넷 중계까지 약속한 상황이어서 선수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어제 저녁 10시 황금 시간대였다. 선수는 심판으로서의 중립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원호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원호와 동규의 캐릭터가 지옥 탈출을 위하여 진검 승부를 벌일 때 누가 우세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프로 게이머로서 심판을 보던 선수조차 놀랄 정도였었다.
마니아 클럽 회원들의 응원도 대단했었다.
원호 편과 동규 편으로 나뉜 응원 사이트에 쉴새없이 글들이 올라와 사이버스페이스 상에서 벌어지는 결투 장면에 관심을 보였다. 문제는 캐릭터 싸움을 끝내고 미로의 궁전을 빠져나갈 때 발생하고 말았다.
심리 게임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미로의 궁전은 마음이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수렁에 빠지고 마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동규는 캐릭터의 길 안내에 의심을 하지 않고 묵묵히 따랐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늘 맞서 싸웠고, 선택한 길을 따라 미로를 헤쳐 나갔다.
그러나 원호는 달랐다.
갈림길에서는 늘 망설였으며, 선택한 길을 가다가도 뒤돌아보는 습성이 있었다.
당연히 수렁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선수는 심판자로서 중립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공개적으로 누구의 여자라는 소문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것도 사이버스페이스의 친구들에게서는 더 들을 수 없었다.
은밀하게 동규가 가는 미로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시간을 끌고, 원호의 미로에는 장애물을 제거하여 시간을 벌도록 했다.
그래도 미로의 궁전 앞에 먼저 선 사람은 동규였다. 선수는 비상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동규의 키가 닿는 곳에 방호벽을 설치하여 미로의 문이 열리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원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뒤늦게 달려온 원호가 미로의 궁전을 먼저 열었다.
"원호가 미로의 궁문을 먼저 열었지만 미로를 먼저 뚫은 사람은 동규입니다.
두 사람은 H2P의 진검 승부에 이어 미로의 궁전 게임에서도 무승부입니다.
선수는 그렇게 함으로써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동규의 우직함이 매력으로 다가오기는 했지만 원호를 버리고 동규가 이겼다고 진기한 결투를 지켜본 200만에 이르는 네티즌에게 선포할 수는 없었다.
선수가 원호에게 배반 때렸다고 말이 많은데 그것을 증명해 보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사랑이란 감정을 공개하기가 싫었다.
혼자의 느낌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해가 들녘 저 끝에 걸려 있었다.
선수 앞에 그림자가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 그림자를 따라가자 그림자가 끝나는 그 자리에 동규가 서 있었다.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끄집어내어 한 모금 홀짝 마시고 있었다.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는 해를 잡으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는 듯 무릎을 쳤다.
"맞다!" 동규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은 선수와 원호에게까지 전해 왔다.
원호는 미친 놈, 취했나 봐, 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동규는 들판을 거닐며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동규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아니 선수가 원호에게 미안해, 원호야, 하는 말에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규는 셋 중에서 하나의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들판을 거닐며 동규의 주인이 누구였나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선수가 내 주인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맞다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선수와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이 가을 바람을 타고 동규의 뇌리를 스쳤다.
곰인형 살인소동을 벌이던 선수, 병상에 누워 있던 선수, 원호가 나타나 병실을 떠나면서 확인한 창백한 모습의 선수…… 그날은 밤새 하염없이 걸었지만 되돌아온 곳은 선수의 병실이었다.
'그때는 선수가 마음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술병을 끄집어내어 한 모금 꼴깍 마셨다.
손바닥만한 양주병에 담긴 소주 맛이 유난히 썼다.
동규는 몸을 움츠리며 치를 떨었다.
그때 불현듯 원호와 벌이던 진검 승부의 결투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구를 위한 결투였어? 분명히 선수를 위한 결투였는데……' 동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결투는 선수를 위한 결투가 아니었다.
분명히 말해 결투의 주인은 동규도 아니었고, 원호도 아니었다.
선수는 심판도 아니었다.
주인이 동규라면 선수는 동규에게 다가와 있어야 했고, 원호라면 원호에게 다가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선수는 동규와 원호 사이에서 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뿐 변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달라진 사람이 누구일까? 동규는 비로소 답변을 찾을 수 있었다.
맞다, 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한 오라기 남은 황혼의 금빛 들녘 사이를 걸어 선수와 원호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배우에 불과했어. 연기를 한 것뿐이야." 동규는 내뱉듯 한마디를 던졌다.
"……" 선수와 원호는 의아한 눈초리로 취한 모습의 동규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투의 주인공은 원호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어. 관객을 동원하기 위해 재주를 부리도록 짜여진 곰에 불과했어. 봐! 너와 나, 그리고 선수 사이에 변한 게 뭐야? 우린 곰처럼 재주를 부렸고, 돈을 챙긴 것은 영철이 형과 상두 형이었잖아? 선수를 볼모로 우린 당한 거야. 사이버스페이스 2백만 관객 앞에서 재주를 부린 곰에 불과하다고……" 동규는 주머니 속에서 다시 술병을 끄집어내어 마지막 남은 한방울까지 마셔 버렸다.
아쉬운 듯 빈술병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수로에 집어던지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대중가요 한 자락을 인용하여 독백처럼 흥얼거리며 논둑을 걸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