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핵심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두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간 자존심을 건 경쟁이 벌어졌다. 삼성전자가 이틀 전 HBM 생산량을 3배로 늘리겠다고 하자, SK하이닉스가 당초 예고했던 차세대 HBM 양산 시기를 3개월 가량 앞당겼다. (본보 5월 1일자 1·3면 참조)
삼성전자가 관련 제품의 2분기 양산을 예고하자 주도권을 뺏길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읽힌다. 엔비디아 등 주요 시스템반도체 제조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초기 시장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양 사의 의지가 엿보인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은 2일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HBM 생산 측면에서 보면 올해 이미 솔드아웃(완판)으로 내년 역시 거의 솔드아웃됐다"면서 "기술 측면에서도 시장 리더십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HBM3E 12단 제품의 샘플을 5월에 제공하고 3분기 양산 가능하도록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당초 SK하이닉스는 3분기에 HBM3E 12단 제품의 개발을 완료하고 인증을 거쳐 내년부터 공급을 본격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을 앞당긴 것으로 경쟁사인 삼성전자가 HBM3E 12단 제품을 올해 2분기에 양산한다고 발표하자 맞불을 놓은 셈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3월 HBM3E 8단 제품을 세계 최초로 양산해 엔비디아에 가장 먼저 납품을 시작했는데 12단 제품도 양산·공급한다는 계획이다.
곽 사장은 "AI 시대, 고객 니즈에 맞는 기술을 적기에 개발·공급할 수 있고 이에 맞는 캐파(생산능력) 역시 준비하고 있다"며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않고 저희의 페이스에 맞춰서 고객과 긴밀히 협업하며 고객 니즈에 부합하는 제품을 선보일 것"이라고 전했다.
SK하이닉스는 2016년부터 올해까지 예상되는 HBM 누적 매출이 130억달러에서 170억달러라고 밝혔다. 동시에 회사의 독자 기술인 MR-MUF(매스 리플로우-몰디드 언더필)의 경쟁력을 강조했다. 반도체 칩 사이의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액체 보호제를 주입해 굳히는 '어드밴스드 MR-MUF'공정은 칩을 하나씩 쌓을 때마다 필름형 소재를 깔아주는 기존 방식 대비 공정과 열 방출에 효율·효과적이라고 회사측은 설명했다.
최우진 패키징&테스트 담당(부사장)은 "이미 어드밴스드 MR-MUF 기술로 HBM3 12단 제품을 양산하고 있다"며 "칩이 휘는 현상을 제어하는 고온·저압 방식 등 고단 적층에 가장 적합한 솔루션"이라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는 HBM4에도 어드밴스드 MR-MUF를 적용해 16단 제품을 구현할 예정이다. 회사는 HBM 시장이 중장기적으로 연평균 60% 정도의 수요 성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곽 사장은 "HBM은 기존 시장과 달리 고객 수요에 기반해 투자를 집행하는 측면이 강하다"며 "HBM4 이후가 되면 맞춤형 니즈가 증가하면서 대세가 되고 수주형 성격으로 옮겨갈 것이기 때문에, 과잉 공급에 대한 리스크는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는 AI 메모리 수요에 대응해 청주 M15X,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미국 인디애나 등으로 HBM 생산 능력을 확충한다. M15X는 내년 11월 준공 후 2026년 3분기부터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M15와 인접해 있어 HBM 생산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회사는 보고 있다. 팹4기를 순차적으로 구축하는 용인 클러스터의 경우 내년 3월 팹1 공사에 착수해 2027년 준공한다는 구상이다. 김영식 제조·기술 담당(부사장)은 "팹1기에서는 D램을 생산할 계획이고 그 뒤의 팹들은 기술 상황에 맞춰 용도를 정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곽 사장은 "AI 반도체 경쟁력은 한순간에 확보할 수 있는게 아니다"라며 "SK하이닉스는 메모리 업황이 좋지 않아 많은 기업들이 투자를 줄였던 2012년에도 투자를 늘리는 결정을 했고 그 결과 2013년 HBM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성과를 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AI 시대, 고객으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준비된 기업이자 업황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내실 있는 기업으로 성장해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우리나라가 AI 반도체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경계현 삼성전자 DS 부문장(사장)은 지난달 26일 구성원 대상 경영 현황 설명회에서 "AI 초기 시장에서는 승리하지 못했으나 2라운드는 삼성전자가 가진 역량을 잘 집결해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삼성전자는 이어 지난달 30일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HBM3E 12단을 2분기에 양산하는 등 올해 관련 제품 공급량을 작년의 3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윤선영기자 sunnyday72@dt.co.kr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2일 이천 본사에서 'AI시대, SK하이닉스 비전과 전략'을 주제로 기자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제공
김주선(왼쪽부터) 사장, 곽노정 대표이사 사장, 안현 부사장, 김우현 부사장이 2일 이천 본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의응답을 진행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