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두고 미국이 디지털 통상 압력 수위를 높인다. 차기 정부가 들어서면 한미 관세 협상을 비롯해 본격적인 수 싸움이 벌어질 전망이다. 미국이 성동격서 전략으로 국내 디지털서비스 시장을 노릴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28일 미국 워싱턴국제무역협회(WITA)가 온라인 개최한 '한국 집중 통상 세미나'에 참여한 미국 측 패널들은 디지털·인공지능(AI) 분야 비관세장벽(NTB) 철폐를 집중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 3월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내놓은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NTE 보고서) 내용 중 IT 관련 사안에 더욱 무게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의 한 통상 전문가는 "한국 대상으로 발표된 상호관세엔 자유무역협정(FTA), 외국인직접투자(FDI), 공급망·수출통제 협력 등이 반영되지 않았다. 협상에선 보다 종합적 관점에서 한국에 정당한 점수를 줘야한다"면서도 "한국의 디지털·AI 분야엔 비관세장벽이 실제 존재하고 분명히 개선이 요구된다. 미국기업들을 겨냥한 조치처럼 여겨진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이 정치적인 일정상 90일 관세 유예의 연장을 원한다면, 성명이나 행사 등의 시간 벌기가 아니라 진정 미국의 우려를 해소하려 한다는 신뢰를 줘야한다"며 "특히 디지털 분야에서 몇 가지라도 조치를 취해준다면 미국도 연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 봤다.
올해 NTE보고서 공개 이후 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ITIF)과 미국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 등 미국 내 IT 관련 협단체들은 한국의 디지털 무역장벽 제거를 요구하는 성명을 낸 바 있다. 해묵은 망사용료 문제뿐 아니라 클라우드보안인증(CSAP)과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른 해외 클라우드 이용 제한,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른 개인정보 국외이전 관련 제한, 국가정보원이 공공 IT장비 조달 시 요구하는 보안요건, AI기본법의 규제내용 등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미국 측이 이날 가장 목소리를 높인 사안 중 하나는 정밀 지도 데이터다. 우리 정부가 정밀 지도를 포함한 위치정보 데이터의 국외 반출을 안보상 제한하는 것에 대해 미국 IT업계 관계자는 "한국만 안보 위협을 겪고 있는 게 아니다"면서 "네이버 지도는 미국에서도 쓸 수 있으니 이미 데이터는 해외로 나가고 있는 셈"이라 말했다.
그는 "한국에 가면 네이버·카카오 지도가 구글 지도보다 훨씬 정확한데 영어 기능은 제한적이다. 데이터 반출 제한이 초래한 경쟁 제한의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미국에 허용할 경우 중국도 같은 요청을 하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란 지적에 대해선 "중국은 북한과 동맹이고 한국의 동맹은 미국"이라며 "안보 예외 조항으로 구분 가능하다. 다르게 취급해도 국제 규범상 문제없다"고 덧붙였다.
이날 주로 거론된 또 하나의 사안은 플랫폼 규제다. 유럽연합(EU)의 디지털시장법(DMA)과 같은 빅테크 규제를 견제하는 양상이다. 정부는 플랫폼공정경쟁촉진법(온플법) 제정을 추진해왔으나 지난해 말 백지화하고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바 있다.
유럽 중심으로 일부 국가에서 부과하는 디지털서비스세(DST) 도입 가능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경계심을 보였다. 미국 측의 주장은 동일한 행위에 대해선 기업의 국적과 규모에 관계없이 동일한 규제가 적용돼야 하고, 디지털서비스 분야도 본국 과세가 원칙이란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대미 관세 협상을 총괄하는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한미 통상 협의에 관한 경제적 타당성 조사를 맡겨 진행 중이다. 이 같은 조치는 지난 20∼22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진행된 한미 '2차 기술 협의'에서 미국이 처음으로 소고기, 쌀 등 특정 농산물을 포함해 비관세 장벽 문제 해소 요구를 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이뤄졌다.
향후 본격적인 협상에선 미국이 반도체·자동차 관세 인하 등을 조건 삼아 공공부문을 비롯한 국내 IT분야 지배력을 대폭 확대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차기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촉박한 일정에도 미국의 속내를 빠르게 파악해 적절한 대응 전략을 모색해야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이 성동격서 전략으로 국내 디지털서비스 시장을 노릴 가능성이 있다. 현재를 위해 미래를 파는 행위는 되도록 지양해야할 것"이라며 "열 건 열고 받을 건 받되 정밀지도나 개인정보 같이 지켜야할 것들과 AI 등 미래 성장동력은 확실히 지켜야한다. 이를 위한 협상 준비에 힘을 쏟아야할 것"이라 짚었다.팽동현기자 dhp@d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