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전 '아련하고 희미한 유토피아'서 '물감 소진 프로젝트' 첫 공개
![[DT컬처] "내 삶과 예술 종말 한시에"…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화가 김용익](http://contents.dt.co.kr/images/202403/2024033102109919057001[1].jpg "[DT컬처] \"내 삶과 예술 종말 한시에\"…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화가 김용익")
"나의 삶과 나의 예술이 같이 종말을 맞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물감을 행복하게 소진시켜나가고 있습니다."
'땡땡이 화가'로 알려진 김용익(77) 작가는 지난 2018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물감 소진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새 연작을 시작했다. 지금 작가에게 남아있는 물감, 색연필 등 회구(繪具)들을 그의 여생에 걸쳐 모두 소진하는 프로젝트다.
그는 "작가는 자기 작업을 밀고 나가는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된다"며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사실로부터도, 오버하는 삶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까지 이르면 최고의 예술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며 "물감 소진 프로젝트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취하는 나의 제의적 행위"라고 설명했다.
또 "처음엔 내가 가지고 있는 물감을 색깔별로 골고루 소진하려고 가지각색 물감들을 척척 발랐는데 한두 점 해보니까 엄청 지루하더라"며 "그래서 조형적인 요소를 넣어 색깔을 배치하는 등 조금씩 변화를 주며 발전시켰다"고 밝혔다.
화폭을 잘게 나눠 작업하다보니 작품은 기하학적 도형의 모양을 띄며 작가가 예술가로서 평생 추구해온 저엔트로피(low entropy)적인 삶의 방식에 부합하는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또 회구들을 최대한 오래 사용하고자 아껴 쓰기 때문에 회화 표면을 이루는 물감의 두께가 얇아 흐릿하거나 균일해 보이고, 때로는 붓터치가 그대로 드러나 가볍되 다소 거친 질감으로 표현되는 경향을 띤다.
![[DT컬처] "내 삶과 예술 종말 한시에"…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화가 김용익](http://contents.dt.co.kr/images/202403/2024033102109919057001[2].jpg "[DT컬처] \"내 삶과 예술 종말 한시에\"…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화가 김용익")
국제갤러리는 작가의 2016년부터 최근까지의 근작 60여 점을 부산점과 서울점 한옥에서 지난 15일부터 다음달 21일까지 전시한다. 김용익 개인전 '아련하고 희미한 유토피아'는 작가가 최근 천착하는 물감 소진 프로젝트를 처음 대중에게 소개하고 그의 작업이 전환을 맞이하게 된 여정을 보여주는 자리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의 조형적 특성 이면에는 보다 광활한 우주변화의 원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깔려 있다. 잘 알려진 중국의 철학 서적인 '주역'(周易)은 하늘과 땅, 해와 달, 강한 것과 약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등 상대되는 모든 사물·현상을 '양과 음' 두 가지로 구분하고 그 위치나 생태에 따른 변화의 원리를 설명하는 고서다. 작가는 여러 방면에서 모더니즘 프로젝트가 실패하였음이 증명되는 현시점에 이에 맞설 대안을 찾아 동양 사상이나 철학으로 시선을 돌리고, 특히 주역이 전하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를 구한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의 하나로 종이나 캔버스 위에 그려진 기하학적 도형들은 실제 주역이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만든 괘3의 형태를 차용하거나 중국의 전통 우주론의 바탕이 되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개념에서 빌려온 원과 사각형으로 구성돼 있다.
![[DT컬처] "내 삶과 예술 종말 한시에"…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화가 김용익](http://contents.dt.co.kr/images/202403/2024033102109919057001[3].jpg "[DT컬처] \"내 삶과 예술 종말 한시에\"…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화가 김용익")
부산점의 전시장 한가운데에 설치된 '땡땡이 화가의 변신은 무죄?'(2023) 연작은 물감 소진 프로젝트가 기존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각각 땡땡이의 이미지를 반전시켜 네거티브 형식으로 그린 두 캔버스를 이어 붙인 후 프레임을 씌워 제작한 두 작품을 전시장 바닥에 서로 기대어 세워놓았다.
'아련한 유토피아 #17-2'(2017), '침범당한 유토피아 #17-9'(2017), '이것은 답이 아니다 #18-10'(2018) 등 작업들은 변색되고 중첩되고 훼손당한 땡땡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모더니즘 회화의 권위에 흠집내는 작업만이 아니라 예술과 삶의 관계, 예술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뇌를 이어왔음을 상기시킨다.
'절망의 미완수 22-1'(2016~2022)의 경우 기존에 완성한 그림을 검정색 물감으로 덮되 완전히 덮어버리지 못하고 격자무늬로 덮는 '소심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작가는 "소심함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자기 갱신을 위한 자기부정을 기반으로 한다"며 "이는 내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했다.
한옥에서 선보이는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소심한 긍정(혹은 부정)'(2022) 연작은 예술을 긍정도 부정도 하기 힘든 작가의 소심한 성찰이 부각된다. 종이 위에 아크릴 물감을 옅게 칠한 후 윤이 나는 투명한 액체 재료를 무심하게 흘려 그 좁은 면적에 깨알 같은 글자들을 적어 내려갔다. 박은희기자 ehpar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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