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中 영화가 소환한 장진호 전투… `인간지옥` 그 현장으로

美연합군 3만, 중공군 15만 대치
영하40도, 전사자보다 많은 동사자
칠흑속 피아 구분 힘든 처절한 육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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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中 영화가 소환한 장진호 전투… `인간지옥` 그 현장으로
중국에서 '장진호'(長津湖)가 영화흥행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정부의 적극적인 관람 독려에 힘입어 지난 9월 30일 개봉 이후 박스오피스를 이어가고 있다. 개봉 13일차인 12일까지 1억800만명이 관람해 43억 위안(약 7900억원)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지난 2017년 '전랑(戰狼·늑대전사) 2'가 세웠던 역대 최고 흥행 기록(56억9400만 위안)을 맹렬히 추격 중이다.

영화 '장진호'는 1950년 11~12월 미군과 중국군이 혈전을 벌였던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다. 미군 참전부대는 미 제10군단 예하의 해병 1사단, 제7보병사단 및 영국군 코만도 대대, 그리고 흥남항 앞에 떠있던 항공모함, 군함도 포함된다. 약 3만명의 병력이 동원됐다. 중국 참전부대는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이다. 총병력은 약 15만명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 중 벌어진 전투 가운데 가장 참혹하고 처절한 전투로 기억된다. 71년 전 '인간 지옥'의 그 현장으로 가본다.

◇올리버 스미스 vs 쑹스룬=1950년 겨울, 장진호가 자리한 개마고원 일대는 50년 이래 최악의 혹한 속에 있었다. 일종의 기상이변이었다. 수은주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졌다. 체감온도는 영하 40도였다. 북극 추위와 버금가는 셈이었다.

11월 26일 미 해병 1사단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헬기에서 빙설로 뒤덮힌 개마고원을 내려다 봤다. 보이는 것은 하얀 눈 뿐이었다. 매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조용한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동부전선의 해병 1사단에게 압록강변의 강계(江界)로 빠르게 북진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강계는 북한 정권의 임시 소재지였다. 해병 1사단이 주공격을 맡고 보병 7사단은 조공(助攻)부대로, 보병 3사단은 해병 1사단의 좌측을 엄호하기로 했다. 맥아더는 공언한 대로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이번 작전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의 일환이었다.

스미스는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기후조건도 최악이고 물자도 부족한데 매복공격을 받으면 그야말로 '죽음의 함정'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전진했다. 때문에 더디게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상관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은 전속력으로 전진하라고 재촉했다. 스미스의 참모들은 "육군이 해군을 엿 먹이려고 작정을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알몬드는 1946년부터 맥아더 휘하에서 맥아더를 보좌했다. 아몬드에 대항하는 것은 맥아더에 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스미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을 게임으로 여길 생각은 없었지만 명령에 기본적으로 복종했다.

다만 해병사단 전체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병참선 유지, 보급품 비축, 하갈우리에 간이 활주로 구축이 그것이었다. 후에 이는 매우 현명한 처사였음이 증명됐다. 특히 하갈우리에 설치한 간이 활주로는 후퇴시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해병 1사단을 지휘하는 스미스는 '뼛속까지' 해병이었다. 1893년 텍사스주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주에서 자랐고 UC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후 1917년 해병 소위로 임관했다. 태평양전쟁 때 연대장으로 과달카날·팔라우·오키나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나자 해병대 부사령관으로 워싱턴에서 복무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병대의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해병 1사단 사단장에 보임됐다. 당시 57세였다.

약 1만7000명 병력의 해병 1사단은 미군 최강의 부대였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 끝에 승리해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전설의 해병대'였다.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을 통솔하는 쑹스룬(宋時輪) 역시 '골수' 공산당 전사였다. 1907년 후난(湖南)성에서 태어나 17살 때 황푸(黃浦)군관학교를 5기로 졸업했다. 세상을 확 바꿔보겠다며 22살 때 홍군(紅軍)에 투신했다. 대장정에 참여했고 유격대장, 사단장, 군참모장, 군단장 등을 차례로 역임해 실전경험이 매우 풍부했다.

그의 장기는 매복 기습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제9병단을 급조하면서 그를 사령관 겸 정치위원에 임명했다. 당시 43세였다. 마오는 그에게 "종이가 강철에 대항할 방법을 찾으라"고 했다.

제9병단은 화둥(華東)야전군을 개편해 조직한 부대였다. 휘하에 제20군, 제26군, 제27군을 두었다. 병력의 상당수가 광둥(廣東), 광시(廣西), 푸젠(福建) 등 남방 출신들이었다. 후에 이들은 '동(冬)장군'의 희생양이 됐다. 쑹스룬은 자신의 장기를 살려 '매복 후 포위공격' 작전을 세웠다.

제9병단은 11월 7일 선두부대를 시작으로 야밤에 압록강을 넘어 북한에 진입했다. 방한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행군 첫날 700여명의 병사가 심각한 동상에 걸렸다. 제9병단은 개마고원에 스며들었다. 제20군과 제27군을 장진호 주변에 매복시키고, 제26군은 대기병력으로 남기기로 했다. 제20군은 장진호 서쪽에, 제27군은 장진호 북부와 북동쪽에 각각 매복했다. 21일 새벽 매복이 완료됐다. 8만5000여 병력이었다. 이런 대병력이 미군 정찰에 발각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다.

◇혹한 속, 처절하고 참혹했던 전투=11월 27일 밤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자 공격을 개시했다. 제20군과 제27군은 각각 유담리, 신흥리, 하갈우리, 고토리, 사창리의 해병 1사단과 보병 7사단을 맹공했다. 폭발하는 포탄의 불빛 속에서 전우의 시체를 밟으며 달려오는 지원군 병사들의 형체가 드러났다. 지원군은 미군의 맹렬한 사격을 맞받으며 쉴새없이 몰아붙였다. 바로 코 앞까지 돌격해 '막대기 수류탄'을 날렸다. 비상식량인 감자 3개 외에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두 수류탄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수류탄이 비오듯 쏟아졌고 이어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날 공격으로 산간 오솔길을 따라 50km에 이르렀던 미군의 대오는 다섯 부분으로 쪼개졌다. 구간별로 고립된 것이다. 부대간 연락은 두절됐고 도로는 차단됐다. 분할된 미군을 포위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형세가 조성됐다.

28일 낮 내내 미군은 포위를 뚫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보병 7사단 31연대가 와해됐고 해병 1사단은 사투를 벌였다.

그날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자 큰 눈이 내렸다. 제9병단은 다시 돌격을 감행했다. 미군의 강력한 화력망 속으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감행했다. 눈내리는 밤, 쌍방의 병사들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한 채 혈전을 벌였다. 총검, 개머리판, 삽, 곡괭이, 돌, 주먹 등 쓸 수 있는 모든 것이 사용됐다. 목을 조르고 눈을 찌르고 물어뜯으며 쌍방이 엉겨붙여 싸웠다.

적군과 아군이 한데 뒤섞어 혼전이 벌어진 탓에 미군은 포격이나 폭격을 할 수 없었다. 전투는 참혹했다. 이제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끝장날 수 있었다. 11월 30일 새벽 알몬드 군단장에게 현황이 보고됐다. 마침내 남쪽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스미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해병대여, 남쪽으로 진격하라."

상공에는 수백대의 전투기가 같은 고도를 유지하면서 지상철수를 빈틈없이 경호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가장 규모가 큰 공중엄호였다. 흥남항 앞바다에 떠있던 항공모함에서 함재기들이 이륙해 제9병단에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제9병단은 도로의 주요 거점을 선점한 후 철수하는 해병사단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도로변의 고지 위에서 뛰쳐나와 대오에 접근해 수류탄을 무더기로 투척한 후 돌격했다. 일부는 수류탄 뭉치를 들고 탱크로 기어올랐다. 미군 전투기들은 통례를 깨고 야간에 화력지원을 개시했다. 투하한 폭탄으로 쌍방의 병사들은 큰 희생을 치렀다.

12월 11일 오후 1시, 해병 1사단 주력부대가 진흥리를 통과하면서 마침내 제9병단의 저지는 끝났다. 해병 1사단은 원산 상륙 이후 흥남으로 철수하기까지 718명이 전사하고 192명이 실종됐고 3504명이 부상했다. 부상자 대부분이 동상자였다. 병사들은 이토록 추운 날씨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침낭, 경유난로가 있었지만 동상을 피할 수 없었다.

피해는 보병 7사단이 막심했다. 7사단 31연대는 포위공격을 당해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31연대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유서깊은 부대였다. 당시 러시아 접경 북부전선에서 작전을 펼쳐 '북극곰 연대'라는 별명을 갖게됐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670여명만 살아남았다. 연대장을 비롯해 장교 90%가 전사했다. '북극곰'이 그려져 있는 푸른 색의 연대기는 노획되어 현재 베이징(北京)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래도 제9병단이 입은 피해와 비교하면 나은 편이었다.장비와 병참보급이 열악했던 탓이었다. 2만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중 4000여명이 동사했다. 미 해병 1사단의 한 부사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혹한 속에서 중국 병사들은 얇은 운동화나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일부는 맨발이었다. 그들의 발은 동상에 걸려 축구공만하게 부어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쌍방은 제각기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고 선언했다. 1952년 9월, 제9병단은 북한에서 철수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사령관 쑹스룬이 탄 차도 압록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압록강에 다다르자 쑹스룬은 차를 세우라고 한 뒤 천천히 내렸다. 그는 장진호 쪽으로 몸을 돌리며 한참동안 허리를 숙여 묵념했다. 그가 고개를 들자 경호원들은 사령관의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됐음을 보았다. 비장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장진호 전투의 참혹함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설명일 것이다.

스미스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3년 7월 해병대 중장으로 진급했고 대서양 함대사령관을 거쳐 1955년 9월 대장으로 예편했다. 1977년 12월 향년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쑹스룬은 1955년 9월 인민해방군에 계급 제도가 도입되면서 대장 계급장을 받았다. 1969년 예편한 후 군사과학원장을 지냈다. 1991년 9월 향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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