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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 한·중 역사전쟁 또다른 불씨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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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멸망한 지 110년이나 지났지만
청사고만 출간… '청사' 완성 못해
中, 2002년 국가청사찬수공정 출범
20년 집필작업 통해 곧 출간 예정
韓 역사·문화 탈취 의도 '청사공정'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영향 끼쳐
중국 역사적 관점 적절한 대응 필요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 한·중 역사전쟁 또다른 불씨 우려
청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작업은 중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드러낸다. 일러스트 윤소영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 한·중 역사전쟁 또다른 불씨 우려
신원사'의 1935년 판본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 한·중 역사전쟁 또다른 불씨 우려
'청사고' 편찬 작업을 총괄한 자오얼쉰.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⑤ 중앙亞, 과거를 넘어 미래로 - 中 청사공정과 청사고·신원사 편찬(6)


고구려, 백제, 발해 등 우리나라의 옛 왕조를 중국의 역사로 주장하는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이 우리나라 역사학계 뿐 아니라 국민 모두를 충격에 몰아넣은 적이 있다. 작년 말에는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한복과 김치의 뿌리가 중국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중국 측 주장에 많은 이들이 분노하기도 했다. 우리의 역사·문화를 탈취하려는 중국 측 의도에 비춰볼 때 현재 진행 중인 또 다른 중국의 역사 공정, 즉 '청사공정(淸史工程)'은 적지 않은 우려를 낳고 있다. 오늘은 한·중 역사전쟁의 또 다른 불씨가 될지도 모를 '청사' 편찬의 배경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겠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현재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중국의 '청사(淸史)' 편찬 작업에 주목하고 있다.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에 대해서는 나라 이름에 '서(書)'나 '사(史)'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청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청나라가 멸망한 지 110년이 지난 지금껏 '청사'가 완성되지 못했다. 단지 1927년 원고를 뜻하는 '고(稿)'자를 붙인 '청사고(淸史稿)'가 출간되었을 뿐이다. 미완성 상태인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를 만들기 위해 중국 정부는 2001년 학계의 건의를 받아들여 2002년 '국가청사찬수공정(國家淸史纂修工程)'을 출범하고 20년이 가까이 집필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새로 쓰인 '청사'가 곧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청사공정'의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 역사 편찬의 '역대수사(易代修史)' 혹은 '관수정사(官修正史)'로 일컫는 전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는 왕조가 바뀔 때마다 국가가 나서서 이전 왕조의 역사를 편찬했고, 이렇게 작성된 정부 공식 역사서들은 통상 '정사(正史)'로 불렀다. '정사'의 편찬은 단순한 한 왕조의 역사서를 제작한다는 것을 넘어 심오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국가적 사업이었다. 바로 앞선 왕조사를 정리함으로써 기존의 정치 질서에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했음을 선포하는 일종의 국가예식이었다. 또한 새로운 왕조가 고대 하, 은, 주나라에서부터 비롯된 중국의 오랜 정치 역사를 잇는 '정통성'을 갖게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제작된 중국 국가 공인의 왕조사를 가리키는 정사는 통상 '이십오사(二十五史)'라는 말로 통칭된다. 즉 중국의 고대사부터 한나라 전반기를 다룬 '사기(史記)', '한서(漢書)'에서부터 청나라 때 편찬된 '명사(明史)'에 이르기까지 22개 왕조사를 가리키는 '이십사사(二十四史)'에 한 가지를 더한 것이다. 24개의 정사는 1755년 중국의 건륭제 시기 이미 확정되었다.

그런데 공인된 24사를 제외하고 '25사'를 구성하는 나머지 한 가지가 무엇인지에 관해 이견이 존재한다. 역사학계에서는 관습적으로 '청사고'를 25사의 마지막 역사서로 간주한다. 이는 1970년대 중국에서 출간된 역사자료집인 중화서국(中華書局) 표점 교감본이 정사 24사와 함께 '청사고'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사가 정부의 공식 발표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면, 공인받지 못한 '청사고'가 아니라 1921년 당시 북경의 중화민국 정부, 즉 북양정부(北洋政府)가 인정한 '신원사(新元史)'가 포함된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혼동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

그 배경에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1911년 쑨원(孫文)이 이끄는 신해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는 정권교체기 정치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신생 중화민국은 혁명 지도자들이 아니라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의 퇴진을 유도한 내각총리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총통이 될 만큼 극심한 정국 혼란을 겪었다. 심지어 위안스카이는 1915년에 스스로 황제를 선언하여 혁명을 무산시킬 의도를 드러냈다. 그가 사망한 1916년부터 1928년까지 이른바 '북양군벌'들끼리 다툼 속에서 정권은 9번, 내각은 24번, 총리는 26번 교체될 정도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한 군벌들은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할 방안을 갈구했다. 그중 역사 편찬과 반포는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중화민국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역대수사' 및 '관수정사'의 전통에 따라 청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고자 했다. 그의 요구에 따라 1914년 시작된 청사 편찬 작업은 정권교체기 혼란한 상황에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결국 1927년 완전한 '청사'가 아닌 '청사고'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편찬 책임자였던 자오얼쉰(趙爾巽)은 정부 재정지원 부족과 본인이 80세의 고령임을 들어 '청사고'가 미완성의 작품임을 인정하고, 후대인들에게 '청사고'의 각종 오류와 거칠고 엉성한 부분을 고쳐주기를 당부했다.

한편 '청사고'가 중국의 '정사'로 공인받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1928년 '북벌(北伐)'을 통해 북경의 군벌 세력을 무찌르고 중국을 통일한 장제스(蔣介石) 휘하 국민당 정권의 반대 때문이었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청사고'의 집필진이 청나라 관리 출신이었던 점, 그리고 그들이 집필한 1911년 신해혁명과 그 주동자들에 관한 기술이 청 조정에 대한 반란으로 기록된 점 등을 문제 삼았다. 결국 국민당 정부는 '청사고'의 판본을 몰수하고 추가 인쇄 및 배포를 금지했다.

하지만 '청사고'가 갖는 역사적 의미, 즉 청나라의 역사를 마감하고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상징한다는 뜻에서 '청사고'를 대체할 새로운 청나라 역사의 편찬은 중요한 과제로 남았다. 1949년 국공내전이 종료된 뒤 중국 본토에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에 성립된 중화민국 정부는 각각 '청사' 편찬을 시도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중국의 경우 1965년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총리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했다. 대만에서는 이보다 앞서 1961년 '청사고'를 정리하여 8권짜리 '청사'를 편찬하지만, 오류가 많은 점 등으로 인해 '청사고'를 대체할만한 진정한 청나라 역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가까운 시일 내 중국에서 새로운 '청사'가 출간된다면 100년 가까이 끌어온 완전한 '청사' 편찬 작업의 과업을 성취하게 되는 셈이다. '청사'의 발간을 통해 청나라를 잇는 중국의 정통국가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임을 선언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과의 패권 다툼 속에서 대내외 중국의 문화 국력을 과시할 기회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1910년대로 다시 돌아가 보면 '청사고'를 대신하여 '신원사'가 '이십오사(二十五史)'로 공식 선포된 까닭은 무엇일까? 몽골제국의 일부로 중국에서 창건된 원나라의 역사를 다룬 '원사(元史)'를 대체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된 '신원사'는 앞서 강조한 '역대수사'의 전통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신원사'의 편찬 배경과 전후 역사 전개는 근대 중국사의 특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청사고' 편찬 과정 만큼이나 흥미롭다. 사실 몽골제국의 중국 왕조인 원나라의 역사서 '원사'는 원나라를 대체한 명나라 건국 직후에 일찌감치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 편찬이 불과 331일 만에 이루어진 데서 볼 수 있듯이 성급하게 제작된 나머지 내용의 오류를 포함하여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이를 수정, 보완하려는 움직임은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만주족이 중국을 통일하고 그 국력으로 제국의 영토를 확대시킨 것이 몽골제국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실제 청나라 초기 만주 군주들은 수수로 원나라를 계승한 것을 선전하기도 했다.

청나라 시기 여러 학자들은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 발전된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을 따라 '원사'의 내용을 수정, 보충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19세기에는 몽골제국의 역사를 다룬 아랍-페르시아어 자료들이 유럽에서 연구되면서 청나라 학자들도 이러한 유럽 측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새롭게 원나라의 역사를 재구성하려 했다. 그 결과 19세기 말 20세기 초 홍쥔(洪均), 웨이위안(魏源), 투지(屠寄) 등의 지식인들은 원나라 역사를 수정, 보완하는 역사서들을 저술했다.

'신원사'의 저자 커샤오민 역시 이러한 청나라 학자들의 지적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1850년 산동성에서 태어난 그는 1886년 과거에 급제하여 청나라의 관리로 복무했다. 1911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에는 앞서 언급한 '청사고'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샤오민은 스스로를 '망해버린 청나라의 남겨진 늙은이(遜淸遺老)'로 자칭했다. 그의 사망 후 묘비명을 작문한 장얼텐(張爾田)에 따르면 커샤오민은 '망해버린 청나라의 역사를 찬수하는 것이 자신의 고국인 청나라의 은혜를 갚는 길'로 인식했다고 한다. 중화민국 건국 이후 출간된 '신원사'에서도 그는 자신을 '역사 편찬을 담당한 신하(史臣)'로 부르고 '청나라'를 '내가 섬기는 왕조(我朝)'로 칭하는 등 청나라의 옛 신하로서의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커샤오민이 원나라의 역사를 쓰게된 것도 이러한 망국의 한을 담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몽골제국의 역사인 '신원사' 속에 투영된 청나라의 모습은 북방 민족과 중국을 통할하는 세계제국의 지위를 담고 있다. 원나라와 청나라의 유사성, 즉 북방민족이 중국 전 영역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중화제국화되어 영토 확장에 나섰던 점을 고려했다. 그런 측면에서 커샤오민에게 '신원사'의 편찬은 '청사고'와 함께 멸망한 청나라를 역사의 기억 속으로 떠나보내는 작업이었다. 물론 '신원사'는 역사 편찬을 통해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당시 북양군벌들에게 좋은 선물이었다. 1920년 '신원사(新元史)'가 완성되고 1922년 출간되자, 당시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쉬스창(徐世昌)은 1914년 이래 작업이 지지부진했던 '청사고'를 대신하여 중국 정사의 하나로 편입할 것을 선언한다.

이와 함께 '신원사'의 편찬은 일본의 침략이라는 중국이 직면한 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1910년대부터 일본은 북방 군벌 사이 갈등에 개입하여 중국에서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다. 1917년부터 북양정부에 차관 제공과 군사 협정을 통해 영향력을 증대시킨 일본은 1920년에는 즈리(直隸)-펑텐(奉天) 군벌 연합 정부의 지도자 장쭤린(張作霖)을 통해 북양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919년부터 시작된 중국 지식인-시민들의 민족 문화운동인 이른바 '5·4운동'이 발생하여 반일 분위기가 고조되자, 일본 측에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할 중국 측 인사가 필요했다. 커샤오민은 청나라 조정에서 일본 유학 프로그램을 관장했던 전력이 있어, 일본 측에서 그를 적임자로 보았다. 커샤오민은 일본에서 유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원사'로 1924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커샤오민의 박사학위 수여의 배경에 관해 훗날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애당초 동경제국대학에서는 박사학위를 수여할 뜻이 없었으나, 당시 주중 일본공사였던 오바타 유키치(小幡酉吉)가 이를 제안하여 성사시켰다고 한다. 이후 커샤오민은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완화시키기 위해 1923년부터 시작된 '동방문화사업'에 중국 측 위원장을 맡는 등 친일 인사로 활약한다. 비록 1928년 일본의 산동반도 침공에 항의하여 사임했지만, 친일의 흔적은 커샤오민의 이력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됐다.

이렇게 20세기 '청사고'와 '신원사'의 편찬 배경에는 다양한 역사적 맥락이 담겨 있었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되는 혼란 속에서 북경의 위안스카이와 군벌들은 정통성 강화에 매달렸다. '역대수사' 및 '관수정사'의 전통에 따라 청나라 역사를 편찬하고자 했으나 그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자 일종의 대체물로 '신원사'를 '정사'로 선언했다. 그러나 새로운 수립된 국민당 정부는 '청사고'를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신원사'를 이용하여 중국 내 영향력 확대를 노렸다. 21세기 중국의 '청사공정'은 이러한 중국 근현대사의 유산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20세기 초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으로 전환되는 시기 중국 지식인들의 역사 편찬의 초점이 북방민족이 수립한 원나라와 청나라에 맞춰졌다는 것은 중국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청사고'와 '신원사'가 각각 만주족과 몽골족의 중국 지배 시기를 다루는 만큼 '다민족국가'로서 중국이 갖는 복잡한 역사를 상징한다. 어쩌면 홍콩, 대만, 신장-티베트 문제로 미국과 갈등 중인 중국의 입장에서 '청사' 편찬은 청나라 시기 확보된 거대한 영토에 대한 주권을 재천명하는 효과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중국의 역사적 관점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기 쉽다. 과연 21세기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어떻게 청나라의 역사를 다루었는지, 이전 동북공정에서 발톱을 드러낸 중국중심주의 또는 한족(漢族) 중심적 사고가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그러면서도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중국의 정치적인 목적을 어떻게 대변하는지 곧 발간되는 '청사'의 서술을 통해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적 관점에 대해 적절히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청사공정'과 그 배경인 '청사고', '신원사'의 편찬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 한·중 역사전쟁 또다른 불씨 우려
이광태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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