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견을 듣는다] "젊은 정치인이 4차 산업혁명 이해하면 금상첨화…나라 미래 밝아"

북극항로 진출 경제적 파급 무한대… 부국 기회 놓쳐선 안돼
미국의 대러 제재 슬슬 풀려… 한국 동방경제포럼 최대한 활용해야
민주화세력 독재·산업화 싸잡아 적대시… 그래서 선진화 안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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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견을 듣는다] "젊은 정치인이 4차 산업혁명 이해하면 금상첨화…나라 미래 밝아"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고견 인터뷰. 박동욱기자 fufus@

[]에게 고견을 듣는다

김태유 서울대 공대 명예교수·前 대통령 정보과학기술수석보좌관


대한민국은 산업화의 성공에 너무 오래 머무르고 있다.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있다. 다음 단계 도약의 실마리를 못 찾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디지털콘텐츠 등 몇몇 분야에서는 앞서 나가고 있으나, 다른 미래준비에서는 경쟁국과 힘든 경주를 하는 중이다. 결코 안심할 때가 아닌데, 사회경제 각 분야에서는 활력의 실종과 지대추구 현상이 심화하는 가운데 초저출산과 고령화로 생산기반마저 위태로워지고 있다. 국가 리더십을 맡은 정치는 변질, 혼돈, 무력의 연속이다. 사자후 같은 리더의 포효나 선각자의 호소가 절실하다. 지난 15년간 국가발전원리를 연구하고 고심해온 김태유 서울대 공대 명예교수를 찾은 것은 그 같은 목적에서다.

김태유 교수는 공학, 경제학, 지정학, 역사학 등 다학제적 연구를 해온 학자로 이름이 높다. 광폭의 지식과 견문을 통해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왔다. 김 교수는 지금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이 우리가 당장 탑승해야 할 미래로 가는 기관차라고 한다. 정치·행쟁, 사회, 대외 분야에서 구체제를 뜯어고치는 대대적 혁신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미래 시장을 선점하자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19세기 서구 산업혁명의 물결이 동양으로 밀려올 때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지식정보산업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인류문명의 제2차 대분기(大分岐)를 맞아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조상님들에게 죄를 짓는 거라 생각합니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손잡고 압축성장의 성장통을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효율적 정부, 생산가능인구 문제를 극복할 이모작 고용, 새롭게 열리는 북극항로의 선점이라는 3대 혁신 과제에서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김 교수는 이를 정부혁신, 사회혁신, 대외혁신으로 지칭했다. 이를 위해 김 교수는 정부의 과감한 어젠다 세팅과 리더십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신자유주의 주류 경제학에서 신앙처럼 돼버린 '작고 효율적인 정부'보다 '크고 효율적인 정부'를 제안했다. 이율배반적으로 비치지만 복잡다단한한 미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스마트한 정부'의 파급력을 최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담 = 이규화 논설실장



김 교수는 북방에 대한 관심 환기도 잊지 않았다. 지구온난화로 북극항로가 열리면서 인류문명은 실크로드, 대항해시대 대서양, 말래카와 수에즈운화를 잇는 길에 이어 새로운 문명의 길이 열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인류문명은 길을 따라 발달했고 지구온난화로 열리는 동북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북극항로가 새로운 문명의 중심 길이 된다"며 "대한해협을 끼고 시작되는 북극항로는 한국이 선진문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했다.

인터뷰는 지난 17일 서울대 공대 연구실에서 가졌다. 산업과 역사의 시공간을 관통하며 쏟아내는 미래 이야기는 갑갑한 가슴을 뻥 뚫어줬다.



-교수님이 강조하시는 '정부혁신' 가운데 '정치혁신'도 포함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최근 30대 청년이 제1야당 대표가 되는 등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십니까.

"사실 사람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웁니다. 그래서 과거가 굉장히 중요하죠.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은 과거가 질곡이 돼서 미래로 못 가는 경향도 많이 있습니다. 새로운 젊은 정치인이 등장해서 과거의 한계로부터 탈피해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죠. 그러나 젊다고 해서 꼭 미래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교수님 국가발전 연구서들을 보면 역사적 교훈을 많이 드시더군요. 최근 저서 '한국의 시간'도 마찬가지고요.

"구한말에 민영익이라는, 17살에 급제를 하고 34살에 행정권과 군권을 장악한 걸출한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조선 사람 중에는 서양 문물을 가장 많이 접한 사람이었습니다. 보빙사(報聘使, 1883년 7월 민영익을 대표로 미국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로 미국에 가고 유럽까지 선진 세계를 다 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정치적인 이유로 수구를 대변하면서 반개화(反開化) 정치인이 돼버렸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요. 이런 분들이 우리나라를 근대화했더라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그런 슬프고 아픈 역사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정말 큽니다.

"젊은 정치인이 4차 산업혁명을 이해하면 정말 금상첨화입니다. 한국을 미래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만약 4차 산업혁명을 이해하지 못하면, 젊다는 것만을 가지고는 한국을 발전시켜 미래로 나아 갈 수 있다고 얘기할 순 없습니다."

-민영익의 반대편에 서서 비록 갑신정변에 실패해 친일파로 몰렸지만, 피가 끓었던 개화파 청년들의 열정과 과감성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발현은 안 됐지만 우리 젊은 엘리트들의 가슴 속에 잠재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재해 있는 욕구를 누가 어떻게 뇌관을 터뜨려서 발현시켜 미래로 대한민국을 보내주는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급진개화파, 매도하는 사람들은 친일파로 부르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역사로부터 사라지는 순간 조선은 산업혁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잃었습니다. 당시에 온건 개화파는 청나라를 모방해서 따라가려고 하는, 사실은 수구에 가까운 분들이었습니다. 지금 이순간도 우리나라가 미래로 가느냐 가지 못 하느냐가 결정되는 분기점이죠."

-그래서 지금이 2차 대분기(大分岐)라고 하신 건가요.

"'한국의 시간'책에도 썼습니다만, 태백산 꼭대기에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가 1cm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동해로 가고 1cm 왼쪽으로 떨어지면 서해로 가는 것처럼 지금이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봅니다. 과거 서구의 산업혁명 물결이 동양으로 막 밀려올 때, 이때가 1차 대분기였고 지금 4차 산업혁명시기가 2차 대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차 대분기 때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정말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는데, 2차 대분기에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제가 4차 산업혁명 강연을 열심히 하고 글도 쓰고 또 오늘 이런 말씀도 드리고 있는 겁니다."

-국가발전의 의제를 제시하고 해법을 찾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과학기술 이론과 논리 뿐 아니라 경제학적 합리성, 역사적 교훈까지 동원한 통섭적 접근을 하고 계시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분들도 시도는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도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능력과 체력이 닿는 한은 계속 해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제가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는 하늘의 뜻이고, 국민 여러분의 뜻이기에, 저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걸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이 되지 못하고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다고 하면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나 강연을 듣는 일반인들은 '아니 우리나라는 거의 선진국인데 왜 자꾸 선진국이 아니라고 하느냐'고 반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심정은 저도 이해합니다. 저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러나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해야지 우리가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 현실을 덮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물질적으로 봐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됐다고 할 수 없는 게, 독일이나 일본은 국민소득이 2만 불에서 3만 불 될 때까지 5년 정도 걸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2년이나 걸렸어요. 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일본이 국민소득 3만 불을 돌파하던 90년대 중반과 지금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 때 3만 불은 지금 4만 5000불 이상 됩니다. 그래서 일단 물질적인 기준으로도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선진화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지구상에서 산업화에 성공하지 않고 민주화가 성취된 나라는 없습니다. 민주화의 기반은 산업화지요. 민주화되지 않은 나라를 선진화했다고 절대로 볼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산업화와 민주화, 이 두 가지 과정에서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경이적인 성공을 이뤘지요. 선진국은 오랜 기간을 거쳐 국민 수준과 정치 수준, 학문 수준이 함께 발전을 해오니까 큰 부작용 없이 왔는데, 우리처럼 아주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한 나라는 사회와 정치와 경제, 문화가 발전속도에 조금씩 시차가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부작용은 일종의 성장통입니다. 너무 빨리 압축성장했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생긴 게 아니라 너무 잘해서 생겼다고 얘기할 수 있죠."

-산업화와 민주화는 이뤘는데, 선진화를 못 이룬 것은 성장통과 관련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산업화를 빨리 하려다보니 과도한 공권력의 사용, 독재적인 방법으로 밀어붙였다는 겁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독재적인 방법으로 국민의 뜻이 다 수렴되기도 전에 막 밀어붙이다보니까 민주화 세력이 저항하게 된 거지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독재정권과 함께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주화세력은 원래 반산업화세력이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민주화세력이 독재와 산업화를 함께 싸잡아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상생하는, 호혜적인 관계에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반목하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진화가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수님이 참여정부 때 정보과학기술수석보좌관으로 좀 더 오래 계셨더라면 선진화를 위한 기틀을 더 놓으시고 양 세력의 화해라고 할까요, 한데로 묶는 역할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저 나름대로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왜 하늘이 준 기회를, 대한민국을 다시 한번 도약시켜서 선진국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성공시키지 못했을까.' 제가 평생 연구한 국가발전 원리를 집대성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을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추진하지 못했구나 하는 반성을 많이 했죠. 세상을 설득하지 못한 거예요."



김태유 교수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에서 초대 정보과학기술수석보좌관을 맡았다. 그 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노무현 대통령은 "김 보좌관, 우리 계급장 떼고 토론해 봅시다"라며 김 수석에 과학기술 정책을 부탁했다. 노 대통령은 '과학기술중심사회'라는 공약을 내걸었는데 그 정책의 설계자로 김 교수를 영입한 것이다. 당시에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도 아직 없었다. 같은 의미의 작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국가발전'이라는 화두로 평생 공부했더니 드디어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선 잃어버린 성장동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정부조직의 개편이 시급했다. 과학기술부장관을 부총리로 승격시켜 기존 기재부장관 겸 경제부총리와 함께 투톱체제를 추진했다. 과학기술부총리는 과학 기술 산업 자원 정보통신 등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정책을 맡도록 했다. 예산업무까지 갖도록 과학기술 부총리 밑에 기술혁신본부도 설치했다. 행정고시와 기술고시를 통합하고 4차 산업혁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공계 박사 50명을 특채해 관련 부처에 사무관으로 전진 배치했다. 으레 개혁에 반발이 따르듯 김 수석보좌관의 개혁에도 반대가 컸다. 1년 만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개혁을 이해 못한 반대세력이 문제인데 지나친 자책(自責) 아닌가요.

"제가 설득력 있게 설명을 못 한 거예요. 옳다는 건 아는데 이게 왜 옳은지 우리가 왜 그렇게 가야 하는지 충분히 설득하지 못 한 거예요. 저는 원래 공대를 나오고 미국 유학을 가서 경제학을 공부해 국가발전 원리를 나름대로 터득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을 난해한 경제이론과 수식을 가지고 이해시킬 수도 없는 거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왜 설득하지 못했지' 생각하며 역사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요.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면 상대방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내 혁신 뿐 아니라 대외적 혁신도 필요하다며 그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서를 준비 중이라고 하셨는데요.

"사람이 혼자 주장하다보면 개인의 주관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 다른 학자 14명과 함께 각자 한 챕터씩 쓴 책을 곧 출간할 예정입니다. 내용은 우리가 북극항로로 진출해야 한다는 겁니다. 북극항로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가 러시아인데, 마침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대한민국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상호보완적 관계라는 겁니다. 원고를 서울대학교출판부에 넘겼는데 머지않아 책이 나올 것 같습니다."

-뒤에서 여쭤보려고 했는데 나온 김에 여쭈면, 북극항로가 그 정도로 대한민국 미래에 중요하게 작용합니까.

"인류문명은 길을 따라 발전합니다. 간략하게 예를 들어 말씀 드리면, 산에 있는 사냥꾼이 토끼를 잡는데 한 시간 걸리고 바다에 있는 어부가 생선 한 마리 잡는데 한 시간 걸린다고 하면, 토끼와 생선은 1대1로 교환됩니다. 그런데 생선을 한 마리 잡은 어부가 산에 가는데 아홉 시간이 걸렸다 하면, 이 어부는 총 열 시간을 투입한 거지요. 산에 가면 생선 한 마리가 토끼 열 마리와 교환됩니다. 왜냐하면 투입된 시간이 1시간 대 10시간이 되니까요. 그런데 산에서 토끼 열 마리 값을 내고 생선을 먹을 사람들은 아주 부자거나 특권층이지요. 이 사람들은 열 마리 이상 훨씬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거지요. 길을 통해서 창출되는 부가가치가 생산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보다 훨씬 큽니다."

-사실은 엄청나게 중요한데 보통 간과되는 경제원리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나라의 장안으로부터 로마를 잇는 비단길에 선진 강대국이 포진하고 있었어요. 실크로드 밖에는 선진국이 없었습니다. 우리 신라는 근접해 있었지만 밖에 있었어요. 그 다음에 인도네시아 향신료제도로부터 향신료 루트가 뚫리면서 후추, 정향, 육두구, 침향 같은 값비싼 향신료가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아라비아를 지나면서 아라비아가 세계의 중심이 됐어요. 그때 아라비아문명이 세계에서 제일 발달했었지요. 그리고 그 향신료가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지중해로 넘어가면서 지중해 르네상스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베니스 제노바 피렌체 같은 도시국가들이 다음 문명의 중심에 서게 되지요. 인류문명의 중심이 실크로드로부터 향신료루트로 옮겨가던 시대가 상업시대입니다. 그러다가 서유럽에 있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같은 나라가 아라비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새로운 향신료 대항로를 개척하면서 인류문명의 중심이 서유럽으로 이동했지요. 우리는 향신료 루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대서양 루트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 땅을 5000년 지켜온 우리 조상들께는 인류문명의 중심에 설 기회가 한번도 오지 않았던 겁니다. 그것은 단지 행운이 따라주지 않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지구상의 모든 길은 이제 다 열렸어요."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길이 또 나타난다는 것은 굉장히 예외적 상황인데요.

"지금 인류문명이 가장 많이 쓰고 있는 항로가 극동에서부터 말라카해협을 지나 인도양을 지나서 수에즈운하를 거쳐 지중해를 통과해 유럽으로 가는 항로인데, 이게 지금 만원입니다. 얼마 전 일본 화물선 하나가 수에즈운하에서 좌초해 세계 물동량이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로 적체돼 있다는 거죠. 앞으로 폭증하는 물동량을 소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말라카해협 외에 말레이반도 허리를 뚫는 운하를 만들 계획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지구온난화 때문에 북극항로가 녹아내린다는 거지요. 북극항로는 대한해협을 거쳐 캄차카반도 남단을 지나 베링해협을 통과해 러시아 북단을 경유해서 유럽으로 가는 항로거든요. 북극항로의 개통은 인류문명 사상 처음으로 우리 한반도가 인류문명의 큰 길에 접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겁니다. 한국이 선진문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입니다. 이 땅을 5000년 지켜온 조상님들의 음덕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지금 그 기회를 갖게 된 겁니다."

-그 정도인가요?

"이 기회를 놓치는 것은 5000년 이 땅을 지켜온 조상님들에게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기회를 꼭 잡아야 한다는 게 제 대외혁신 이론의 기반이죠. 그 길이 러시아를 지나가게 됩니다. 이론상 러시아 영해 밖으로도 갈 수는 있어요. 그런데 러시아 영해 밖으로 가게 되면 얼음이 두꺼워서 갈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를 통과하는 것이 다른 나라에게는 안되는 일이에요. 러시아의 경계심 때문입니다. 중국은 인구가 14억 명이고 러시아는 1억 4000만 명이기 때문에 러시아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이 러시아로 확장해 나오면, 언젠가는 러시아가 중국화 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확장에 대해 굉장한 경계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러일전쟁 때 러시아와 싸웠고 지금도 북방 섬 때문에 영토분쟁이 있어요. 언젠가는 극동의 헤게모니를 두고 일본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2015년부터 블라디보스톡에서 동방경제포럼을 개최하고 있는데, 그만큼 극동러시아 개발에 의욕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요. 매년 하죠. 우리가 동방경제포럼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걸 활용해 빨리 진출해야 하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뭐냐면, 러시아에 대한 투자라든가 러시아에 대한 경제협력의 능력을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는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 EU에 비해 자금력이 매우 약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작고 GDP 규모가 작으니까 투자여력도 적을 수밖에요. 우리가 러시아에서 똑같은 조건 하에서 일본과 중국보다 경제협력을 더 잘 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거든요. 그것을 만회할 방법은 중국과 일본 등 타국보다 먼저 더 빨리 선점하는 전략입니다."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 때문에 사실상 한·러 경제협력이 가능할까요?

"저는 미국이 언젠가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풀 거라고 봅니다. 그렇기를 기대하고 나름대로 확신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미국 사람도 러시아를 주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도 관료도 학자도 일반인도 미국의 주적은 중국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또 중국에 대한 포위망은 러시아 없이는 절대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풀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끝난 G7 정상회의에서 미국 등 선진 7개국들이 대중국 단일 대오를 짰습니다.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응해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인프라 투자를 위해 40조 달러를 투자한다는 '더 나은 세계 재건'(Build Back Better World, B3W) 계획을 밝혔거든요.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국과 영국은 같은 나라로 시작했어요. 앵글로 아메리카로 부릅니다. 근대 이후 영국이 최초의 G1, 세계를 경영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영국이 대외정책을 어떻게 했는지를 보면 미국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이 G2 프랑스를 포위해서 더 발전하지 못하게 막았어요. 대불동맹을 1차 2차 3차 계속 맺어가면서 프랑스와 전쟁하는 나라는 무조건 지원해서 프랑스가 G2 이상으로 확장을 막아 안정시켰지요. 그러다가 러시아가 확장하기 시작하니까 러시아를 포위하기 시작했어요. 영국이 러시아를 포위하는 전략을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르거든요. 미국도 거기 참여했고요."

-또 북한이라는 최대의 난관을 넘어야 하는데요.

"참 답이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지도자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통일을 염원했고 전 국민이 통일을 노래했고, 그래서 통일을 해야 하는데 통일이 안 되고 있지 않습니까. 제 통일에 대한 개념은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나 우리가 존경하는 역대 대한민국 지도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방법론은 좀 다릅니다. 사람의 병은 크게 보면 만성병과 급성병이 있지 않습니까. 급성병은 빨리 안 고치면 죽는 병이지요. 수술하든지 약을 먹든지 해서 빨리 고쳐야 합니다. 만성병은 오래 가지만 현상유지가 최선인 경우가 많습니다. 병을 치유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병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을 정도로 제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건강을 유지하면 병이 확산되지 않아서 건강한 사람처럼 생활할 수 있습니다."

-중·러 관계는 좋습니다.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공급받고 있습니다.

"제가 러시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북한을 통과해야 한다는 칼럼을 쓴 때가 2012년이었는데, 우리가 안 하면 중국이나 일본이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중국이 2014년에 계약을 하고 작년부터 가스가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코로나19 때문에 중국의 산업 활동이 좀 둔화돼 미세먼지가 덜 온 이유도 있지만, 북경 일대가 석탄대신 러시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받은 천연가스를 때고 있기 때문에 대기질이 개선된 측면이 있습니다. 아베 수상도 일본을 관통하는 파이프라인을 놓겠다고 공언을 했었어요. 그런데 못했지요, 왜냐하면 북방 섬 분쟁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러시아가 제안한 천연가스파이프라인(PNG)을 받아들이지 않은 겁니다."

-흔히 말하는 역대급 실수였다고 볼 수 있겠네요.

"비스마르크라는 독일의 명재상이 그랬습니다. '행운의 여신이 다가왔을 때 빨리 옷자락을 움켜쥐어야 한다'고요. 우리는 행운의 여신이 다가왔는데 옷자락을 잡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 강연도 하고 책도 쓰고 있습니다."

<기사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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