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勝美의 추억을 소환하는 중국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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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勝美의 추억을 소환하는 중국
박영서 논설위원
북중 접경인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시의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관'이 지난달 20일 재개관했다. '항미원조'란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돕는다는 뜻이다. 이 기념관은 2014년 말 확장공사를 하면서 문을 닫았다가 중국의 한국전 참전 70주년인 10월 25일을 한달여 앞두고 6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항미원조 기념관은 기념탑, 전시관, 파노라마 화랑, 국방교육공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부지 면적은 18만㎡로 이전보다 4배 정도 커졌다. 2만3800㎡ 규모의 전시관에는 항미원조를 기본 테마로 한국전쟁 관련 사진 1000여점과 물품 1600여점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탑은 높이 53m로 전면에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쓴 탑명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기념탑 앞 계단은 폭이 10.25m로, 이는 10월 25일 참전일을 의미한다.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첫 공세를 시작해 첫 승리를 거뒀다는 1950년 10월 25일을 참전기념일로 제정했다. 앞서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이름 붙여진 중국 군대가 압록강을 도하했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야음에 13병단 휘하의 38·39·40·42·50·66군이 강을 건넜다. 13병단은 린뱌오(林彪) 휘하에서 국공내전 당시 동북지방(만주)에서 국민당군을 패배시켰던 정예 군대였다. 약 18만명으로 추정되는 이들 병력은 적유령·낭림 산맥 일대에 매복했다.

10월 25일 이른 아침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평북 대유동 폐광 골짜기에 설치한 사령부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공격개시 명령을 내렸다. 유령같은 중공군이 마침내 그 베일을 벗은 것이었다. 이날 오전 11시께 평북 운산군 쪽으로 진격 중이던 국군 1사단은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부대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勝美의 추억을 소환하는 중국


전투에서 적군 1명을 생포해 심문했는데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중국어가 가능한 국군 장교가 중국어로 말을 건네자 포로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전해졌다. 운산군과 희천군 방면에 2만여명의 중공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이었다. 오후부터 전투는 치열해졌다. 적은 사방에서 출현했다. 운산군 온정리에서 서진하던 국군 6사단 2연대가, 성흥에서 장진호로 전진하던 국군 3사단 1개 연대도 매복공격에 각각 무너졌다.

중공군 참전 정보는 즉각 미8군 사령부와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급보됐다. 하지만 미군 수뇌부는 중국의 정식 개입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개입을 했다 하더라고 한방에 격퇴할 것으로 자만했다. 10월 30일 청천강 상류 골짜기에서 국군 제2군단이, 운산에 있던 미 제8기병연대가 각각 궤멸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11월 1일 전군에게 청천강 선까지 총퇴각을 명령했다. 이듬해 1월 4일 중공군은 서울에 입성했다.

펑더화이의 장기는 '포위·섬멸'이었다. 구대(口袋·포대자루) 모양, 즉 U자 형태로 포위망을 형성한 후 적이 그 안으로 들어오면 우회기동으로 먼저 적의 퇴로를 차단한 후 적의 가장 약한 고리를 집중타격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나폴레옹이 유럽전쟁에서 구사했던 전술과 비슷하다. 한국에선 이 전술을 '인해전술'이라고 부른다. 12개의 공격선으로 나눈다고 해서 '4선 12파(四線十二波) 전법'으로도 소개된다.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절대 간단하지 않은 전술이다.

중국이 70년 전 한국전쟁을 되돌아보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미국과의 대립이 깊어지자 '승미(勝美)'의 추억들을 계속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보면 중국이 미국을 이길 수 있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려는 속내다. 하지만 효과는 쉽게 장담할 수는 없다. 70년 전 중국인과 지금의 중국인은 많이 다르다. 그때는 혁명을 위해 죽었지만 지금은 돈을 위해 죽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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