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기술냉전시대` 낙오국

김광태 글로벌뉴스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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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현장] `기술냉전시대` 낙오국
김광태 글로벌뉴스팀장
피 튀기며 싸운듯 했지만 싱겁고 일방적이었다. 지난 15일(미국 동부 현지시간) 미중 1단계 무역협상 서명식 현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서명식 자리에 간판급 재계 CEO들을 둘러 세우고 자신의 치적을 자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애써 기쁨을 억누르는 듯 했고, 류허(劉鶴) 중국 부총리는 사뭇 굳은 표정이었다. 합의문에 서명하는 류허 부총리를 보면서 마오쩌둥의 '지구전을 논함'(論持久戰)이라는 책자가 떠올랐다. 마오쩌둥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군이 거침없이 침공해오던 1938년에 이 책을 펴냈다. '중국 필망론(必亡論)'이 확산되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속승론(速勝論)'도 나오던 때였다.

마오쩌둥은 두 주장을 비판하면서 "섣불리 싸우지 말고 시간을 벌며 상황을 바꿔 나가면 최후의 승리는 중국에 있다"는 지구전론을 펼쳤다. 적이 공격해 오면 싸움을 피해 상대의 힘을 빼는 전략적 방어에 주력하고, 힘의 균형이 이뤄지면 전략적 대치로 전환하며, 조건들이 아군에 유리하게 바뀌면 전략적 반격에 나서야한다는 3단계 전략을 주장했다. 어쩌면 류허 부총리는 마오쩌둥의 지구전론을 곱씹으며 서명했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험난했다. 2018년 7월 미국의 느닷없는 관세폭탄으로 무역전쟁 포성이 울렸다. 미국은 340억 달러에 달하는 중국산 수입품에 25%의 관세를 매기겠다고 선언했다. 중국도 그런 미국을 비웃듯 미국산 수입품에 똑같이 25%의 관세를 때렸다. 배짱 한번 두둑했다. 그렇지만 중국의 반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쏟아지는 미국의 관세폭탄에 똑같이 대응할 실탄이 부족했다. 역부족이었다. 전략적 방어 시점을 찾아야 했다.

미중 무역전쟁의 직접적 이유는 전세계 경제규모 1위의 미국과 2위 중국의 경상수지 경쟁 때문이었다. 미국은 20년째 무역적자를 기록 중이었고 중국은 정반대였다. 미국의 전체 무역 적자의 비중을 보면 전체에서 중국이 47%, 기타 국가의 총합이 53%다. 심각한 무역수지 불균형이 '성질 급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그러나 마냥 폭주기관차처럼 마주 달릴 수 만은 없었다. 양쪽 모두 출구가 절실했다. 한 쪽은 대통령 재선가도에서 빛나는 전리품이 필요했고, 또다른 한쪽은 더이상 무역전쟁을 이끌 자원이 부족했다. 그들 모두 나름의 이유로 급한 불은 꺼야 했다.

총 9개장으로 이뤄진 이번 합의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2000억달러로 산 시한부 평화'다. 중국은 미국산 제품과 서비스를 2년에 걸쳐 최소 2000억달러(약 231조7000억원) 구매해야 한다. 미국은 당초 계획했던 대중 추가 관세 부과를 철회하는 한편 기존 관세 가운데 일부 제품에 대한 관세율을 낮추는 것이 이번 합의의 골자다. 그 먼 길 돌아 1단계 합의까지 왔다. 그러나 미봉에 그친 합의여서 한계는 뚜렷하다. 핵심 쟁점인 중국의 국영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중단, 불공정 무역관행 시정을 위한 중국 법률 개정 등은 손도 대지 못했다. 2단계 협상은 난이도가 훨씬 높다.

일단 세계경제 불확실성이 완화됐다는 측면에서 국제사회는 이번 타결을 반긴다. 그러나 미중 무역 협상 타결이 꼭 우리에게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관세·무역전쟁이 아니라 '21세기 기술패권전쟁'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2015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중국 제조 2025'를 겨냥하며 칼을 갈고 있다. 핵심 부품과 자재의 국산화율을 2025년까지 70%로 달성하면서 10대 핵심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중국의 야심찬 목표는 필연적으로 미국과 '운명적인 대결'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 제조 2025'전략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나라로 꼽힌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중국이 집중하는 '스마트 제조업'이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과 겹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의 위기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지난해 중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불러 미국이 주도하는 '화웨이 제재' 불참을 압박했을 때 정부는 "민간 기업 문제에 개입하기 어렵다"며 방관했다. 그사이 중국 배터리업체들은 정부보조금을 받으며 전통 강자인 한국 기업들을 따돌렸다.

기술냉전 시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미국이 중국의 첨단기술을 압박할 수록 한국기업은 반사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이만큼 평범한 역설의 진리는 없다.

김광태 글로벌뉴스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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