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디지털인문학] 현명하고 공정유연한 사람](http://contents.dt.co.kr/images/201706/2017060902102251607001[1].jpg "[디지털인문학] 현명하고 공정유연한 사람")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관한 공동체의 일반적인 합의는 도덕과 윤리를 구성한다. 그 가운데 강제적 규제나 징벌을 통해서라도 꼭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항목들을 응집시킨 것을 법이라고 해보자. 여기에서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말이 나온다. 논란의 여지는 있다. 특히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인간들이 '법대로 산다'고 떠벌이면서 '어디 법대라고 해봐'고 떵떵거리기는 모습을 보면 법은 도덕과 윤리와 상관이 없는 것만 같다. 그것도 문제지만,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법은 보편적인 지침이라 모든 개별적인 상황에 단적으로 적용하기 힘들다. 예컨대, '절도죄를 범한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는 법은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적으로 적용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유흥비를 마련하려고 절도를 한 사람과 배고파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저지른 생계형 절도범, 합법적으로 당한 피해에 대한 사적 보복으로 절도를 범한 사람들에게 똑같은 벌을 내린다면, 그것이 온당한지 의문이 드는 식이다.
이런 문제는 법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의 소소한 원칙에서부터 회사의 판공비 지출의 원칙, 어떤 사람을 공직에 임명할 것인가를 놓고 대통령이 고민하는 원칙까지 실천과 집행의 일관성을 위해 마련한 모든 잣대들은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될 때 다양한 문제에 부딪힌다. 이럴 때, 원칙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상황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원칙의 적용수위를 조절하거나, 일정 부분을 양보하거나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이 결정 자체에도 기준이 필요하다. 원칙에 충실할 때 입을 손해와 원칙을 양보하거나 조정할 때 얻는 이익을 비교하면서 실리적이고 경제적인 계산을 할 것인지, 아니면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면서 명분을 존중할 것인지 등등. 사실 예외를 자꾸 허용하면 원칙에 구멍이 생기면서 원칙 자체가 힘을 잃을 수도 있으니, 그것이 더 큰 손해가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모든 판단은 다 잘 살아보자는 데서 비롯된다. 잘 사는 것과 관련해서 무엇이 좋고 유익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그리스 사람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네시스(phronesis)라고 했다. 학자들은 주로 실천적 지혜라고 옮기며, 일부는 현명함이라고 새긴다. 예컨대, 그리스 고전기의 번영을 이끈 페리클레스를 현명한 사람(phronimos)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과 공동체 전체를 위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잘 분별하고 실천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천적 지혜는 언제 어디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실천의 절대적인 기준과 보편적인 지식을 확립하는 것보다는,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할지에 관해 좋은 '의견을 구성하는 능력'(doxastikon)과 관련이 깊다.
특히 실천의 영역에서의 지혜로 꼽히는 현명함이 보편적인 기준과 원칙, 법의 구체적 적용에서 발휘될 때, 그리스인들은 에피에이케이아(epieikeia)라고 했다. 이 말을 한 마디로 규정하거나 번역하긴 어렵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떤 법이나 원칙을 단적으로 적용할 때, 정의가 구현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의 불편과 손해를 유발한다고 하자. 이때 누군가가 나서서 법과 원칙의 적용을 합리적이고 유연하게 조정하여 상황에 맞는 시의적절한 의견을 제시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그때 그 능력을 에피에이케이아라고 한다. 그는 법의 문구에 얽매이지 않고 법의 근본취지와 법을 가진 공동체의 원초적인 요청에 충실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의 판단은 사적 이익을 위한 사악하고 비합리적인 아전인수나 견강부회와는 전혀 다르다.
또한 그의 눈에는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을 위해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이 정의롭기보다는 어리석고 사악해 보인다. 그의 가슴엔 합리적 유연성,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약자에 대한 이성적인 관대함, 공동선에 대한 품성적인 열망이 있다. 공정하되 유연하며, 합리적이되 관대한 태도, 이런 품성상태가 바로 에피에이케이아다. 그리스인들은 정치와 도덕, 법과 정의의 문제에서 바로 이런 공정유연하면서도(epieikes) 현명한 사람(phronimos)을 최고의 인재로 꼽았는데,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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