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조기대선
'폴리코노미'를 경계하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결정을 서두르면서 조기 대선이 가시회되고 있다. '설'로만 나돌던 '벚꽃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대선은 어떤 후보가 이기고 지느냐하는 '게임'이 아니라 나라의 역사와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분수령'이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따른 탄핵 정국으로 조기 대선이 확실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탄탄한 정책 경쟁에 뿌리를 둔 선거가 아니라 달콤한 정책과 공약이 난무하고 감성적 스토리와 후보 개인의 이미지가 우선시되는 선거가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올해 국내 10대 트렌드 중 '폴리코노미(Poli-conomy)'를 첫번 째로 꼽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폴리코노미는 대선을 앞두고 제시되는 경제공약이 선거 승리에 중점을 둔 내용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강해는 현상을 의미한다. 2007년 대선 때 만해도 보수는 성장, 진보는 분배를 앞세우는 등 경제정책에서 정당 색깔이 구별됐다. 그러나 2012년 총선부터 그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경제민주화 이슈가 다른 이슈들을 다 흡수해버렸고 급기야 2016년 총선에서는 정당 간 경제 정책이 유사성을 띠었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뤄진 한 여론조사에서도 유권자들의 절반 이상이 성장과 분배와 관련한 경제정책을 가장 중요한 선택의 지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선주자들도 이 같은 변화에 주목, 경제 중심의 선심성 공약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 대선 때마다 반복되는 포퓰리즘의 역습= 달콤한 공약들은 대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역대 대선 판도를 흔들었던 경제 공약들은 정권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명박 후보의 '747 공약'이 대표적이다. 7% 성장·10년 내 1인당 국내총생산 (GDP) 4만 달러 달성, 10년 내 세계 7강 달성이 골자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당시 경제성장률은 줄곧 2∼3%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의 으뜸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 원칙조차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경제민주화 공약은 공정거래법 위반에 대한 징벌적배상제, 집단소송제 도입, 대기업 지배주주·경영자의 중대 범죄에 대한 사면 제한·총수 일가의 부당내부거래 금지, 소액주주권 권한 강화를 위한 집중투표제 도입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계층과 부문간 격차를 해소하고 성장의 결실을 골고루 나누겠다"던 박근혜 정부는 어느새 기업 규제 철폐를 앞세운 '경제 활성화'로 탈바꿈했고 최태원 SK그룹회장, 이재현 CJ그룹회장 등 재계 총수는 사면됐다. '국민행복 10대 공약' 역시 거의 자취를 감췄으며, 박근혜 정부의 정치철학을 대변하며 일자리 창출을 기대하게 했던 '창조경제'는 최순실 게이트에서 비리의 온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 대통령의 임기 4년 차에 접어들 당시 경제 공약 이행률은 33%(경제정의실천연합 조사)에 그쳤으며 경제성장률, 실업률 등 주요 경제지표는 이명박 정부 때보다도 낮아졌다.
이광재 한국메니페스토 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박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 일자리 창출 등 가장 많이 표를 얻은 공약들은 거의 지켜지지 않은 반면, 대통령이 지키고 싶은 싶은 공약만 이행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역대 대선 주자들이 내세웠던 선행학습 금지, 공교육 정상화, 모병제 등 사회·안보 공약도 무위로 돌아간 것을 그동안 국민들은 목도했다.
◇ 19대 대선도 포퓰리즘 판칠 조짐= 조기 대선이 가시화되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주자들의 선거공약이 하루에도 몇건 씩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정책의 실효성이나 구체적 재원대책 없이 '표'만 얻고 보자는 포퓰리즘성 공약 경쟁이 불붙으면서, 짧은 준비기간을 이유로 정책 검증 과정은 생략될 수 있는 우려가 제기된다.
역대 대선때 어김없이 등장했던 병역·세금·복지 공약은 이름만 달라졌지 '판박이'라는 평가다. 군 복무기간 단축, 수도 이전이 또 제기되고 일정 금액을 나눠주는 기본소득제, 아이를 키우는 30대를 겨냥한 영유아 보육 지원 확대 등이 단골 메뉴로 나왔다. 이번 대선에서는 후보들이 일자리 공약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일자리 공약과 기본소득제, 영유아 보육 지원금 확대 등은 모두 '시혜성 공약' 재원 확보 논란이 따라 붙는다. 그러나 어떤 후보도 국가 재정으로 해결한다는 처방 외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 이번 대선에서 화두로 떠오르는 정책이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것들인데, 정작 현장과는 동떨어진 추상적 언급에 그친 수준으로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대선 때마다 뜨거운 감자일 수 밖에 없는 병역·복지 공약을 내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은 공약을 재탕 삼탕하는게 문제"라며 "공약(空約)에 그치지 않도록 정교한 설계를 통해 실현 가능한 해법을 내놓아야한다"고 조언했다.
◇ 촛불민심 명분 대선주자들 경쟁적 대기업 때리기= 대선주자들의 대기업 정책은 한국경제의 방향을 결정하는 잣대가 된다. 시설투자, 수출 등 거시지표는 물론이고 일자리 창출 등 민생경제와 직결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정경유착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재벌 개혁이 이번 대선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여야 할 것 없이 대선 주자들은 하나같이 재벌개혁, 재벌해체를 대표 공약으로 제시했다. '제 뱃속'만 채우는 재벌을 때리면 경제가 살아나고 양극화도 해소된다는 논리다. 재벌개혁은 크게 '공정거래 확립'과 '재벌 지배·소유구조 개선'으로 압축된다. 공정거래 확립에는 대선주자들 공약에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입장이 일치된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삼성 해체를 천명했고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대표는 "재벌 총수 일가는 기업범죄의 몸통"이라며 엄벌하겠다고 했다. 보수에 뿌리를 둔 유승민 바른정당의원이나 남경필 경기지사도 출자총액제한강화, 기업 오너 횡령·배임 처벌 강화, 법인세 인상 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선주자들의 기업 때리기 공약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당장 '표'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한국 경제의 저성장을 고착화하게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최근 미국 세계기업가정신발전기구(GEDI)의 '2017 글로벌기업가정신지수(GEI)'에 따르면 한국의 기업가정신 수준이 137개국 중 27위로 일본(25위)에도 4년 만에 역전당했다. 국내로 돌아온 유턴 기업이나 투자 기업을 우대했던 미국·일본 등과 달리,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 때부터 광풍처럼 몰아친 경제민주화 바람 앞에 놓여있던 결과다. 한국은 열망은 높지만 능력과 태도가 낮은 불균등한 기업가 정신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 규제 위주의 경제 포퓰리즘 정책이 가세할 경우 창업은 물론 투자까지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기업가 정신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차기 정권이 할 역할인데, 오히려 대선 주자들은 기업 때리기에 혈안이 된 모습이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기업들의 경영에 사실상 모든 대선주자가 너도나도 간섭하고 있다"며 "이렇게 해서 대통령이 된들, 일자리가 늘어난들 기업이 무너지면 누가 책임지나. 주주들의 손실, 종업원들의 실직은 물론이고 국민 경제 모두에 미치는 충격을 대통령이 책임질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대선 때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경제민주화 이야기가 나오고 관련 법안도 무더기로 나오지만 원인 분석, 대안 제시 모두가 문제 있다"며 "경제 민주화는 일그러진 주제"라고 말했다.
이형준 경총 실장도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 전반의 활력을 제고하기 위해선 기업의 투자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정책이 절실하다"며 "대선주자들도 이런 부분을 신중히 감안해 정책공약을 내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미영기자 my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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