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규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디지털인문학]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한국사회](http://contents.dt.co.kr/images/201701/2017012002102251607002[1].jpg "[디지털인문학]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한국사회")
지난해 12월 8일, 그러니까 탄핵 정국과 촛불시위의 열기가 가장 뜨거울 때 외국 영화 한 편이 아주 조용히 개봉했다. 당시 함께 막이 오른 '판도라'가 '참사영화'라는 소재만으로 턱없이 큰 주목을 받았던 것과 달리, 이 외국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영국 켄 로치(Ken Loach, 1936-)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그것이다. 80살을 넘어선 로치 감독은 '진정한 영화팬'이라면-이 말은 일단,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나 국산 영화만 편식하지 않는 팬 정도로 이해하자-그의 이름과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1994), '랜드 앤 프리덤'(1995), '카를라스 송'(1996) 등 그의 대표작 제목을 몇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로 로치는 1994년 베니스 영화제 '명예황금사자상', 2009년 유럽영화상 '명예감독상', 2014년 베를린 영화제 '명예황금곰상'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이 그의 평생 작업에 대해 무한한 존경을 표한 바 있는 거장이다. 작년에 칸 영화제는, 어쩌면 이 노(老)감독의 마지막 연출작이 될지 모를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게 '황금종려상'을 수여했다.
이렇듯 탁월한 감독의 빼어난 작품임에도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향은 초라하기만 하다. 개봉 한 달이 넘었건만 총 관객수 8만을 넘지 못했으며, 현재 전국 10여개 극장에서 말 그대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상태다. 물론 필자는 작품성과 대중성의 차이를 충분히 인정한다. 고상하고 세련된 태도로 소위 '작가주의' 영화나 '예술영화'를 일방적으로 추앙할 생각도 없다. 또 관객수가 영화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에 대한 관심과 호응은 상당히 씁쓸하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새로 개봉하는 국산 영화라면 주류 언론에서 이렇게까지 홀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섬세한 연출과 깊은 울림이 작금의 한국 현실과 영화계에 몇 가지 소중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줄거리는 제목만큼이나 쉽고 단순하다. 런던 북부 뉴캐슬 지방에 사는 59살의 '평범한'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 이 주인공이 심근경색으로 인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질병수당을 신청하려 한다. 하지만 까다로운 신청 절차와 공무원의 관료주의와 권위주의 앞에 그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침내 항고 법원 화장실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다니엘이 우연히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엄마 케이티를 만나고 이들과 친구가 되는 것도 줄거리의 중요 부분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내 기억에, 최근 10년 동안 '나, 다니엘 블레이크'만큼 평범한 주인공의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감동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그것은 그 어떤 영화보다 익숙하지만 오래가고, 잔잔하지만 온몸을 파고드는 감동과 통찰의 파문을 일으킨다.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혹자는 널리 알려진 사회주의자 로치의 신념과 현실주의적 연출 스타일을 이야기한다. 다른 이들은 영화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휴머니즘을 강조한다. 이 휴머니즘의 핵심은 다니엘을 위한 케이티의 조사(弔詞)에 표현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닌,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고귀한 인격체다." 둘 다 맞는 지적이다. 로치는 이번 영화에서도 자신이 평생 견지해 온 인간에 대한 믿음과 자본주의 및 국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에 흔들림 없이 충실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감동의 진정한 원천은 다른 곳에 있다. 나는 이를 '연대(solidarity)'에 관한 깊은 성찰이라 부르고 싶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인간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연대가 가능하지, 연대가 한 인간의 삶에서 왜 필요하고 중요한지, 오늘날 인간들 사이의 연대를 가로막고 파괴하는 부정적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세밀하고 인상적인 관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 관찰이 워낙 설득력이 있기에, 그리고 이 관찰이 저 지극히 평범한 서사 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통합돼 있기에, 그것은 그대로 우리의 '통찰'이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연대의 종류를 기억해보자. 다니엘은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있지만, 함께 일했던 작업장 동료들과 직업적, 인간적으로 계속 연대하고 있다. 이어 다니엘과 이웃 흑인 청년은 나이와 삶의 태도 등 여러 차이가 있지만, 서로를 위로하고 도울 수 있는 연대감 속에서 지내고 있다. 다니엘은 또한 뇌종양으로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와 정서적, 정신적으로 여전히 깊은 연대를 느끼고 있다. 케이티도 마찬가지다. 케이티는 멀리서 자신과 손주들을 걱정하는 엄마와 부모자식간의 연대를 항상 느끼면서 지내고 있다. 또한 케이티는 새로 친구가 된 다니엘과의 연대를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하지만 로치가 정말로 탁월한 것은 어른과 아이들 사이의 연대를 섬세하게 포착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니엘과 케이티의 두 아이들 사이의 연대, 그리고 엄마 케이티와 두 아이들 사이의 연대를 통해서 드러난다. 당연히 이 두 가지 연대의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그렇지만 공통점 또한 존재한다. 바로 어른과 아이들 사이에도 '평등한 인격적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로치는 단순한 흑백논리를 경계한다. 그는 여성 공무원과의 연대, 급식배급소 직원과의 연대, 국선변호사와의 연대 가능성도 분명하게 열어놓는다. 연대는 지위와 계층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지위와 계층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인간적 현실이다. 하지만 결국 이 다양한 연대는 다니엘의 죽음으로 모두 급작스럽게 끝난다. 로치는 묻는다. 이렇듯 다양하고 소중한 인간적 연대, 개개인의 삶이 살맛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연대들을 누가, 무슨 권리로 파괴하고 있는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한국 사회에서 삶의 다양한 연대 가능성은 어떤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가? 이 혼돈의 과도기를 통과하면서 한국 사회는 과연 연대의 가능성을 유지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 지도자는 선정적인 언사나 포퓰리즘적인 공약을 남발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연대의 문제 하나라도 충분히 깊이 숙고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먼저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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