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 500원 지폐 거북선으로 선박컨설턴트 설득 영국차관 도입
1972년 초대형 조선소·유조선 2척 동시 건설 시작해 2년만에 '성과물'
조선소 준공 10년만에 세계 1위…한국 1999년이후 1위 타이틀 독차지
1972년 초대형 조선소·유조선 2척 동시 건설 시작해 2년만에 '성과물'
조선소 준공 10년만에 세계 1위…한국 1999년이후 1위 타이틀 독차지
![[광복70년] 조선업, 500원 지폐로 이룬 ‘모래밭의 기적’](http://contents.dt.co.kr/images/201509/2015092402101022732001[1].jpg "[광복70년] 조선업, 500원 지폐로 이룬 ‘모래밭의 기적’")
■ 기술로 이룬 70년 성장신화
(12) '조선 강국' 부활 이끈 현대중공업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예부터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조선 강국이었다. 장보고의 청해진, 최무선의 화통도감, 이순신의 거북선을 무기로 바다를 호령하고 중국, 일본과 당당히 맞섰다. 그러나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강선으로 한반도를 침략할 때 대한제국의 전력은 연안조차 방어하기 어려운 목선 중심이었다.
우리나라 근대 조선업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야 부산 영도구에서 조선선거공업(해방 후 대한조선공사)에서 시작됐다. 목선건조 중심이었던 국내 조선 분야에 근대식 강선을 제조하는 조선소가 등장한 계기가 됐다. 대한조선공사는 추후 한진그룹에 인수되면서 한진중공업으로 바뀌었다.
6.25전쟁을 거치며 함정·화물선 등의 수리·정비 수요가 크게 늘어나 조선업은 호황을 겪었다. 선박 건조의 경우 소형선은 일본에, 대형선은 미국, 노르웨이 등에 의존했다. 그러다 대한조선공사가 자체 기술로 1966년 2600톤급(GT) 화물선, 1968년 4000톤급(GT) 화물선을 건조하면서 국내 조선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울산 모래밭에 현대중공업을 건설하며 옛 조선 강국의 부활을 예고했다.
◇모래벌판에 지은 세계 1위의 조선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71년 조국의 산업화를 위해 조선소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 짓기로 결심하고, 막대한 투자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으로 날아갔다. 정 회장은 런던에 현대 지점을 설립하고 당시 영국의 최대 은행인 버클레이와 4300만달러에 달하는 차관 도입을 협의했다. 차관 도입은 조선소 건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대형 선박 건조 경험이 없는 후진국 한국의 현대라는 회사가 턱없는 조선 능력과 기술을 들고 와 돈을 요구한 데 대해 버클레이는 들어줄 리 만무했다.
버클레이를 직접 설득하는 데 실패한 정 회장은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로 영국의 유명 선박 컨설턴트사인 A&P애플도어사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찾아갔다. 롱바톰 회장을 통해 버클레이로부터 차관 도입을 이끌어낸다는 전략이었던 것. 정 회장을 만난 롱바톰 회장은 현대가 제출한 자료를 살펴보며 차관상환 능력을 의심했고 성장 잠재력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때 정 회장은 지갑에서 500원짜리 한국은행 지폐를 꺼냈다. 그는 500원의 뒷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영국보다 무려 300년이나 빠른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산업화가 늦어서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라 단언하며 비장의 카드를 던졌다.
정 회장의 끈질긴 설득에 롱바톰 회장의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세계 건설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현대건설을 직접 둘러본 롱바톰 회장은 현대가 대형 조선소를 지어 독자적으로 경쟁력 있는 큰 선박을 건조할 수 있다는 추천서를 써 버클레이은행에 건넸고 차관 제공이 결정됐다. 하지만 국외로 유출되는 차관은 영국의 수출신용보증국(ECGD)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차관을 받아간 나라나 기업이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 영국 정부가 책임지고 보상해줘야 하기 때문에 승인 기준이 더 까다로웠다.
![[광복70년] 조선업, 500원 지폐로 이룬 ‘모래밭의 기적’](http://contents.dt.co.kr/images/201509/2015092402101022732001[2].jpg "[광복70년] 조선업, 500원 지폐로 이룬 ‘모래밭의 기적’")
선박을 구매할 선주가 있다는 확실한 증명서를 가지고 오면 차관을 승인해주겠다는 단서에 현대는 당장 선주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현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조선소는커녕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한 장과 5만분의 1 축척의 지도, 해외 조선업체가 만든 26만톤급 유조선 도면 한 장이 전부였다. 선주들의 반응은 당연히 차가웠다. 조선소도 없고 유조선 건조 경험도 없는 회사에서 만든 선박을 구매하겠다는 선주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선박 수주 문제로 고민하던 정 회장은 롱바톰 회장으로부터 그리스 선엔터프라이즈사의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 회장은 곧장 스위스로 날아가 리바노스 회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수주 계약을 체결했다. 주력 선이 낡은 상황에서 경쟁사의 맹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저렴한 선박을 통해 시장 경쟁력을 확보해야 했던 리바노스 회장과 현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리바노스 회장은 정 회장이 타계한 2001년 현대중공업에 보낸 조문에서 "고인을 처음 만났을 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고인의 모습을 보고 유조선을 발주해도 문제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밝혔다. 리바노스 회장은 정 회장의 개척정신과 의지에 감탄해 대형유조선(VLCC) 2척을 발주했다. 현대는 EGCD로부터 차관 승인을 받았고 조선소 건설에 착수했다.
◇도전정신과 근면·노력으로 조선소 건립
1972년 3월 23일 오후 2시 울산 미포만 백사장. 정 회장을 비롯한 현대중공업 임직원과 주한 각국 대사, 울산시민 등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렸다. 앞서 현대중공업이 조선업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국내외에서는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당시 국내에서는 대한조선공사가 건조한 1만7000톤급 선박이 가장 큰 배였는데 경험도 없는 현대가 26만6000톤급 초대형 유조선(VLCC)을 만들겠다고 공언하니 비웃음만 가득했다.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현대가 조선업을 성공하면 내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겠다. 목선이나 만들어라"고 말했을 정도다. 이날 정 회장은 세계 조선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 공기 내, 최소의 비용으로 최첨단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하겠다는 사업계획을 발표하며 "이 대사업은 우리나라 공업 발전과정에 획기적인 일이라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근면과 노력으로 정부와 국민의 협력을 얻어 반드시 성취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기공식 후 2년이 지난 1974년 6월 28일 오전 11시. TV를 통해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초대형 유조선 1·2호선 명명식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이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정부 요인, 국내외 외교사절, 선주인 리바노스 회장, 울산시민 등 5만여 명이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오늘과 같은 업적을 이룩한 현대조선 전 사원의 노고를 치하한다"며 "1·2호선의 명명은 중화학공업 발전의 새로운 기틀이며 전진하는 국력의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육영수 여사가 1호선을 '애틀랜틱 배런(Atlantic Baron, 대서양의 남작)'으로 명명했고, 2호선은 영국 셸 석유회사 맥파젠 회장의 딸에 의해 '애틀랜틱 배러니(Atlantic Baroness, 대서양의 남작부인)'로 명명됐다. 선박 건조 중 다섯 차례나 설계를 변경했던 리바노스 회장은 정 회장에게 "지금까지 내가 본 것 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진 배"라고 칭찬했다.
현대중공업은 첫 선박을 세계 최고 수준의 배로 만든다는 방침에 따라 건조에 필요한 기자재를 최고급품으로 구입해 사용했다. 1호선의 크기는 길이 345m, 폭 52m, 높이(갑판까지) 27m였다. 선 내에는 수영장을 비롯해 엘리베이터, 공기청정기 등이 설치됐고 기관실에는 시속 15.8노트(29.26㎞)로 달릴 수 있는 3만6000마력의 증기터빈을 장착했다.
◇조선소 준공 10년 만에 일본 누르고 세계 1위로
준공식과 명명식이 열린 날은 현대중공업이 국내외의 우려를 말끔히 씻고 세계 조선업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순간이자 우리나라가 조선 최강국으로 성장하는 시발점이 됐다. 이후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겪으며 세계 해운업과 조선업 경기가 얼어붙자 신흥기업인 현대중공업에도 위기가 다가왔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초대형 유조선 외에도 다목적 화물선, 벌크선, 목재운반선 등으로 선종을 다변화했고 1975년에는 수리조선소인 현대미포조선을 설립하고, 같은 해 각종 육해상 구조물을 제작하는 철구사업부를 신설하는 등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1976년에는 선박용 엔진을 생산하는 엔진기계사업본부를 발족하며 오일쇼크를 극복했다.
조선소를 준공한 지 10년 후인 1983년(건조량 기준)에는 처음으로 조선강국 일본 기업을 제치고 세계 조선업 1위에 올랐다. 1985년 일본의 한 경제주간지가 현대중공업을 조선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러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한국의 조선산업은 1993년 수주량 기준으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에 당당히 올랐다. 이후 1999년까지는 엎치락뒤치락하다 1999년부터 세계 조선업계 1위 타이틀을 독차지했다.
허우영기자 ye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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