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산책] `정책금융 딜레마` 해법 찾기](http://contents.dt.co.kr/images/201506/2015061102102251607001[1].jpg "[디지털산책] `정책금융 딜레마` 해법 찾기")
아날로그적 감성에 익숙한 옛 영화 팬이라면 기억할 만한 영화 중 하나가 '남과여'이다. 각각 짝을 잃은 두 남녀가 자신의 아들, 딸을 기숙학교에 바래다 주는 길에 우연히 만나 사랑을 싹 틔워 간다는 스토리이다. 이 영화의 감미로운 사운드트랙은 얼마 전 어느 개그 프로그램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의 직업은 당시로는 이색적인 카레이서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속 200㎞로 달리는 겁니다. 그 이상으로 달리면 트랙을 벗어나 사고가 나고 그 이하로 달리면 경주에서 이길 수 없죠. 딱 그 속도로 달려야 합니다." 다소 인생에 대한 은유인 듯도 하지만, 이 표현만큼 정책금융의 딜레마를 잘 드러낸 것도 없는 것 같다.
정책금융은 두 가지 상충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 하나는 정책금융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만한 건전한 자금 운용이다. 즉, 차입자의 상환 능력이 의심스러운 사업에는 자금 공급을 자제함으로써 정책금융의 부실화를 예방하고 한정적인 재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정책금융 본래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부가적 자금 공급이다. '부가적'이란 다른 모든 민간 금융기관이 자금 공급을 꺼리지만 정책금융이 자금을 공급함으로써 경제 전체로 자금 공급의 규모가 늘어나는 것을 말한다. 즉, 민간의 상업적 동기로는 자금 공급이 어려운 곳에 과감히 선도적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전자에 치우치다 보면 후자를 소홀히 하게 되고, 후자에 주력하다 보면 전자가 위태로워진다. 정책금융은 이 같은 딜레마를 안고 있기 때문에 거시경제적 여건에 따라 이 둘 중 어느 하나에 우선 순위를 두기도 하고, 이 둘의 달성 수준을 이상적인 수준보다 낮게 설정함으로써 양자를 모두 충족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같은 균형에 균열이 발생한다. 정책금융을 민간금융과 똑 같은 원리로 이해하거나 민간금융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함으로써 정책금융의 부가성(additionality)보다는 건전성(soundness)이나 수익성(profitability)을 강조하는 오류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바닷물을 가공하여 휘발유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자동차 원료를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기업이 불모의 환경에서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곳이 없고 이 때문에 기술 개발의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다면 이는 당연히 정책금융이 개입할 영역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 기술의 성공이 예상되어 이 기업이 벤처캐피탈로부터도 투자를 유치하고 정부와 지자체의 보조 프로그램도 끌어들이고 있다면, 과연 이 기업에 정책금융을 공급하는 것은 바람직할까.
적어도 부가성의 측면, 즉 민간금융이 외면하는 곳에 자금을 공급함으로써 경제 내 금융공급 규모의 총량을 늘린다는 측면에서는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정책금융의 재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부가성의 실패는 정책금융이 더욱 긴요한 곳에 공급해야 할 자금을 상대적으로 정책금융이 덜 필요한 곳에 자금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대체성(displacement)의 실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중소기업 통합관리시스템상의 금융지원 사업의 40% 이상은 중복지원되고 있고, 그 중 상당 수는 민간금융으로부터도 자금조달이 가능한 우량기업 대상의 금융 지원이라는 의심을 사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이 지속되는 것은 "적절한 곳에 자금을 공급했는가"라는 질문보다는 "부적절한 곳에 자금을 공급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보다 추궁하기 쉽고 비난하기 좋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책금융 본연의 목적을 실현하였는가보다는 얼마나 수익을 냈고 얼마나 손실을 보지 않았는지, 민간금융과 유사한 기준으로 따지고 평가하기 일쑤이고 정책금융 운용기관도 이를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이 같은 평가와 방어는 정책금융과 민간금융의 차이를 무색하게 만들고 정책금융 공급의 필요성을 퇴색시킨다. 정책금융이 트랙을 이탈하는 것이다.
정책금융은 민간금융과 경쟁하여서도 안 되고, 민간금융을 대체할 수도 없다. 정책금융이 민간금융과 동일하게 운용될 경우 민간금융에 대한 불공정한 경쟁을 유발하거나 민간금융을 구축할 가능성이 크다. 정책금융은 정책금융만의 고유한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지속가능하도록 최소한의 건전성을 유지하고 민간금융이 외면하는 곳에 금융공급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이 트랙을 이탈하지 않으면서 레이스를 완주하는 길이다. 정책금융 운용의 유인체계와 평가보상도 이를 강화하도록 설계돼야 한다.
박재성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
[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