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내 소통` 연구하며 사람간 소통의 소중함도 깨달아
바이오산업은 오랜 기다림과 탄탄한 투자생태계 필요해
바이오산업은 오랜 기다림과 탄탄한 투자생태계 필요해
서판길 울산과기대 교수
60대 초로의 과학자는 투박하고 두툼한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이래 봬도 이 손이 `마이더스의 손`이에요. 생체 내 숨은 신호전달 메커니즘을 양파껍질 벗기듯 밝혀낼 수 있었던 건 귀신같이 솜씨가 좋은 바로 이 손 덕분이지요."
유달리 `손재주'가 뛰어난 이 과학자는 바로 최근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수여하는 `제7회 아산의학상' 기초의학부문을 수상한 서판길 울산과학기술대(UNIST) 교수(생명과학부ㆍ62)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생명현상의 기본원리인 세포신호전달의 개념과 메커니즘 연구를 통해 암 성장과 전이 과정의 비밀을 밝혔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생체 내 소통을 연구하는 서 교수는 삶도 `소통' 그 자체다. `소통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No Life Without Communication)란 글귀를 실험실 모토로 붙여뒀을 정도로 한번 맺은 인연은 평생 이어간다고 말하는 그는 "열정과 호기심, 즐기는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대담=안경애 생활과학부장
- 아산의학상이란 큰 상을 받았다. 수상소감을 들려준다면.
"시상식에서 조순 전 총리, 이홍구 전 총리, 김명자 전 장관,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 등 친분 있는 분들을 만나 뜻깊었다.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으로 대학시절 얘기를 했다. 대학생이던 20대 시절 연말에 TV로 연예대상, 가요대상 등 시상식을 보면서 `이 정도 외모와 재치면 나도 머지 않아 저런 상을 받게 되겠지"라며 꿈을 꿨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웃음) 그 꿈을 버리고 과학을 하다 보니 과학대상을 받은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더니 시상식 참석자들이 다들 명언이라고 하더라.
또 과학은 정직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상을 받을 정도로 노력한 게 사실이다. 운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운을 핑계 대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 30여년을 매달려온 연구분야를 설명하자면.
"생체는 뇌신경계, 면역계, 호흡기계, 심혈관계 등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다. 심장 펌프질로 혈관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하고 다시 노폐물을 신장이 걸러 내보내는 식으로 계는 여러 구성요소로 이뤄진다. 우리 몸에는 300여 종의 세포가 있고, 뇌에는 신경세포만 100조개가 있다.
300여 종 세포와 세포 내 온갖 생체분자가 그런 시스템 속에서 기능을 한다. 기관과 기관, 세포와 세포, 생체분자와 생체분자간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생체 기능이 모두 조율되는 것이다. 우리 몸은 항상 이런 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이 있는데 그게 깨지면 질병이 된다.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기관, 세포, 생체분자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신호전달'을 30여년간 연구해온 전공분야다.
생명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면 질병이 생기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당뇨의 예를 들면 인슐린 수용체가 문제일 수도 있고 수용체 하단의 분자가 망가진 게 원인일 수도 있다.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같아도 원인은 다를 수 있다는 것. 그게 규명되면 맞춤형 치료가 가능해진다."
- 이 분야를 연구하계 된 계기는 뭔가.
"대학을 졸업하고 기초연구를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중에서도 생체 생리 기능을 분자 수준에서 해석하는 데 관심을 갖게 돼 서울대 의대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전공했다. 정홍근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로부터 이 분야 연구 필요성에 대해 지도를 받았고, 이서구 이화여대 교수가 미 국립보건원(NIH)에서 신호전달 핵심 효소 규명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연구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 때 만난 류성호 포스텍 교수와는 아직도 함께 일한다. 내가 계속 이 분야를 연구할 수 있게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준 이서구 교수는 이후 활성산소로 연구주제를 바꿨다."
- 지금까지 접한 신호전달 분자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을 꼽는다면.
"단연 PLC(phospholipase C)다. 생체 신호전달의 핵심이고 뇌세포 신호전달 과정에서도 키 역할을 한다. 학술지에 발표한 PLC 연구논문이 1만번 이상 인용됐고, 해외에 가도 PLC 연구로 이름이 나 있다. 이 분자의 원리를 규명한 게 약 30년전 이서구 교수 연구실에서였는데, 아직도 계속 연구하고 있다. PLC에는 13종류가 있어서 수많은 생체활동에 참여한다. 지금은 그 중 6종의 유전자를 뇌나 간에서 없앤 후 영향을 분석하는 생쥐 실험을 하고 있다. 실험실에서 키우는 생쥐만 5000마리다."
- 연구과정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들려달라.
"1989년초 포스텍에서 `신호전달연구실'이란 간판을 달고 연구했는데 중소기업 몇 곳에서 전화를 걸어 새로 개발한 통신기술을 검증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그래서 그 신호전달이 아니라고 설명해준 기억이 난다. 이후 `생체신호전달연구실'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 생체 내 소통을 평생 연구해 왔는데, 생활이나 인간관계 철학은.
"한번 맺은 인연은 평생 이어가고, 인연은 돈주고라도 맺으라는 게 삶의 철학이다. 친구도 많고 제자들과도 평생을 간다. 30명 가까운 제자를 대학교수로 길러냈는데 연말마다 우리집에서 1박2일간 함께 보내는 게 전통이 됐다. 제자들을 졸업시킬 때는 항상 메시지를 준다. 인연을 끊지 마라고. 한 실험실에서 생활하면서 갈등도 생길 수 있지만 한 집단에서 같이 보낸 인연이 훗날 다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진솔한 태도로 관계를 이어가면 인연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제자들과 늘 흥겹고 격의 없이 보낸다.
다른 사람이나 새로운 분야와의 소통도 즐긴다. 실험실에 `소통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No Life Without Communication)는 구호를 붙여뒀다."
- 전국대학연구처장협의회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기초연구위원장, 대학 연구부총장 등을 지냈는데 최근 주로 하는 활동은 뭔가.
"그동안은 연구와 관련된 대외활동과 보직을 맡으면서 국가 간접비 산정기준을 마련하는 등 정부 정책 자문을 많이 했다. 연구에 집중한 경험이 행정에도 도움이 됐다. 요즘은 거의 실험실에서 연구에 다시 집중하고 있다. 학교에서 70세까지 연구할 수 있게 보장하는 교수로 선정돼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 앞으로 해나갈 연구의 목표는.
"목표는 없다. 열정을 갖고 즐기면서 정성껏 집중하다 보면 즐긴 만큼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본다. 어디까지 갈지는 아직 모르겠다. 30년전 연구 시작할 때도 이렇게까지 과학기술이 발달할 지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그전에는 암에 매달렸는데 최근에는 뇌에 집중하고 있다. 암세포는 `성장 브레이크'가 없는데, 이것도 세포성장 신호전달과 관련돼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암이 생기거나 암 성장을 촉진하게 된다. 물론 지금도 미래창조과학부 선도연구센터(SRC) 센터장으로서 스트레스와 암 간의 관계를 연구한다.
우리가 운동을 하면 특정 분자가 다른 신호전달물질을 촉진해서 즐거워진다는 연구결과도 얼마전 발표했다. 운동 효과의 분자적 메커니즘을 밝혀낸 것이다. 누구든지 하루 20분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라는 게 연구결과가 시사하는 점이다.
뇌와 관련해선 쥐의 뇌에서 특정 신경전달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도록 한 후 뇌기능 및 뇌질환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 국내 의료 분야는 임상 경쟁력에 비해 기초의학 연구는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다.
"우리 국민들의 `빨리빨리 국민성'이 긍정과 부정적 요소를 다 갖고 있는 것 같다. 기초의학과 생명과학 산업 성장은 시대의 요구라고 생각한다. 배고픔이 해결되면 인류 삶의 질 향상이 가장 큰 숙제가 되기 때문이다.
삶의 질을 높이는 궁극적인 길은 의생명과학이다. 미래 산업은 헬스케어, 에너지, 소재 세가지가 핵심이 될 것이다. ICT는 이 분야가 잘 되도록 접목시키는 액세서리 같은 것이다. 특히 의생명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기술간 접목과 융합을 통해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 기초의학 연구가 창업과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바이오산업 생태계를 탄탄하게 갖추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보는지.
"바이오 영역은 생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상품 개발 성공률이 낮고 기간이 오래 걸린다. 그걸 참아주지 못하는 게 문제다. 자동차휠을 새로 개발하는 데 5년 이상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약은 10년 걸리고 실패 확률도 많다. 좀더 참아줘야 한다.
ICT는 급속하게 변화하지만 바이오는 그렇지 않다. 바이오 활성화는 궁극적으로 `기다려 주는 것'에 있다고 본다. 또 초기 기업들을 위한 탄탄한 투자생태계가 필요하다. 아직 대박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한번 대박이 나오면 다 투자하려 줄을 설 것이다. 그 때를 위해 생태계를 만들고 기다려 줘야 한다."
- 현재 추진중인 산재모병원 설립의 의미와 목표가 궁금하다.
"산업현장에서 1년에 산재환자 10만명이 나오는데, `산업수도'라고 할 수 있는 울산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그런데 전국에 있는 산재병원 10곳은 요양병원 수준이고 입원율이 50% 내외다. 1년에 산재의료비 200억원 이상이 펑크난다. 산재환자들은 민간병원에 가려 하는데 민간병원들은 산재수가가 낮아서 안 받으려 하다 보니 환자들이 외면받고 있다. 이런 현실의 산재병원 수준을 업그레이드할 구심점 역할을 할 모병원이 필요하다. 모병원은 좋은 의료기술과 인력, 장비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는다.
고용노동부가 세계 10대 산재모병원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건립을 추진하고 있고, 울산지역을 후보로 선정해 예비타당성조사를 받고 있다. 결과는 6월말에 나온다.
요즘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좋은 대학병원 의사들은 연구를 많이 한다. 현장에서 부딪힌 경험을 통해 창의적 사고를 접목시키는 것이다. 산재모병원 역시 임상도 하면서 연구인프라를 갖추고 연구중심병원이 돼야 한다. 울산과기대는 산업관련 연구기반이 있고 신생대학이라 변화의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만큼 최적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책무이기 때문이다."
-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이 낮고 홀대한다는 지적이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기초과학은 국민들의 관심을 받기 힘들다. 과학적인 일은 과학자들이 알면 된다. 다만 공학이나 산업화 응용 관련 내용은 국민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기초과학은 모든 국민이 알 필요가 없고 모른다고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기초과학을 잘 하고 있다. 역사가 일천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쓰는 연구비 규모가 영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일본의 기초과학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가 1917년 만들어졌는데, 우리 기초과학연구원(IBS)은 몇 년 전에야 설립됐다. 100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변화를 좋아하는 특성상 잘 하고 있고, 노벨상 수상자도 10∼20년 후면 당연히 나올 것이라고 본다."
- 앞으로 어떤 인생을 꿈꾸는가.
"우선 70세까지 즐겁게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미친 듯이 즐길 거다. 단독주택에 5년째 살고 있는데 주말마다 정원 관리하는 게 취미다. 나무를 심으면 늘 변화를 볼 수 있어 좋다. 통나무를 사서 뭔가를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집에서 키우는 개집이나 실험실 선반은 직접 만든다. 텃밭에서 농사도 짓는다.
정원 가꾸는 게 싫증나면 또다른 좋아하는 것을 찾아 즐길 거다. 열정과 인연과 즐기는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런 인생을 계속 살아가겠다."
-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이공계는 호기심 없이는 할 수 없다. 호기심을 구현하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해보겠다는 태도가 이공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해줄 것이다."
■ 서판길 교수 프로필
◇학력
-1980년 2월 서울대 수의과대학 졸업(수의학사)
-1982년 2월 서울대 의과대학 대학원 졸업(의학석사)
-1986년 8월 서울대 의과대학 대학원 졸업(의학박사)
◇경력
-1980∼1982년 서울대 WHO 협력센터 연구원
-1986∼1989년 미국 국립보건원(NIH) 박사후연구원
-1989∼2010년 포스텍 생명과학과 조교수, 부교수, 교수, 주임교수
-1995∼1997년 듀크대 메디컬스쿨 방문교수
-2003∼2007년 포스텍 연구처장ㆍ산학협력단장
-2006∼2007년 전국 대학교 연구처장협의회장
-2008∼2012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기초연구위원회 위원장
-2007년∼현재 국가석학(교육인적자원부)
-2010년∼현재 울산과학기술대(UNIST) 교수
선도연구센터(암제어) 센터장
◇수상경력
-2001년 10월 제1회 동헌 학술상(대한생화학ㆍ분자생물학회)
-2004년 12월 의료보건 우수과학자 표창(보건복지부)
-2007년 8월 이달의 과학기술자상(과학기술부)
-2007년 12월 국가석학 선정(교육인적자원부)
산학협력 표창장(국무총리)
-2011년 5월 대한민국훈장 근정포장(대통령)
-2012년 6월 무사상(생화학분자세포생물학회)
-2013년 8월 우수성과 100선 선정(미래창조과학부)
60대 초로의 과학자는 투박하고 두툼한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이래 봬도 이 손이 `마이더스의 손`이에요. 생체 내 숨은 신호전달 메커니즘을 양파껍질 벗기듯 밝혀낼 수 있었던 건 귀신같이 솜씨가 좋은 바로 이 손 덕분이지요."
유달리 `손재주'가 뛰어난 이 과학자는 바로 최근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수여하는 `제7회 아산의학상' 기초의학부문을 수상한 서판길 울산과학기술대(UNIST) 교수(생명과학부ㆍ62)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생명현상의 기본원리인 세포신호전달의 개념과 메커니즘 연구를 통해 암 성장과 전이 과정의 비밀을 밝혔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생체 내 소통을 연구하는 서 교수는 삶도 `소통' 그 자체다. `소통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No Life Without Communication)란 글귀를 실험실 모토로 붙여뒀을 정도로 한번 맺은 인연은 평생 이어간다고 말하는 그는 "열정과 호기심, 즐기는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대담=안경애 생활과학부장
- 아산의학상이란 큰 상을 받았다. 수상소감을 들려준다면.
"시상식에서 조순 전 총리, 이홍구 전 총리, 김명자 전 장관,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 등 친분 있는 분들을 만나 뜻깊었다.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으로 대학시절 얘기를 했다. 대학생이던 20대 시절 연말에 TV로 연예대상, 가요대상 등 시상식을 보면서 `이 정도 외모와 재치면 나도 머지 않아 저런 상을 받게 되겠지"라며 꿈을 꿨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웃음) 그 꿈을 버리고 과학을 하다 보니 과학대상을 받은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더니 시상식 참석자들이 다들 명언이라고 하더라.
또 과학은 정직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상을 받을 정도로 노력한 게 사실이다. 운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운을 핑계 대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 30여년을 매달려온 연구분야를 설명하자면.
"생체는 뇌신경계, 면역계, 호흡기계, 심혈관계 등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다. 심장 펌프질로 혈관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하고 다시 노폐물을 신장이 걸러 내보내는 식으로 계는 여러 구성요소로 이뤄진다. 우리 몸에는 300여 종의 세포가 있고, 뇌에는 신경세포만 100조개가 있다.
300여 종 세포와 세포 내 온갖 생체분자가 그런 시스템 속에서 기능을 한다. 기관과 기관, 세포와 세포, 생체분자와 생체분자간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생체 기능이 모두 조율되는 것이다. 우리 몸은 항상 이런 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이 있는데 그게 깨지면 질병이 된다.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기관, 세포, 생체분자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신호전달'을 30여년간 연구해온 전공분야다.
생명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면 질병이 생기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당뇨의 예를 들면 인슐린 수용체가 문제일 수도 있고 수용체 하단의 분자가 망가진 게 원인일 수도 있다.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같아도 원인은 다를 수 있다는 것. 그게 규명되면 맞춤형 치료가 가능해진다."
- 이 분야를 연구하계 된 계기는 뭔가.
"대학을 졸업하고 기초연구를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중에서도 생체 생리 기능을 분자 수준에서 해석하는 데 관심을 갖게 돼 서울대 의대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전공했다. 정홍근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로부터 이 분야 연구 필요성에 대해 지도를 받았고, 이서구 이화여대 교수가 미 국립보건원(NIH)에서 신호전달 핵심 효소 규명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연구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 때 만난 류성호 포스텍 교수와는 아직도 함께 일한다. 내가 계속 이 분야를 연구할 수 있게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준 이서구 교수는 이후 활성산소로 연구주제를 바꿨다."
- 지금까지 접한 신호전달 분자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을 꼽는다면.
"단연 PLC(phospholipase C)다. 생체 신호전달의 핵심이고 뇌세포 신호전달 과정에서도 키 역할을 한다. 학술지에 발표한 PLC 연구논문이 1만번 이상 인용됐고, 해외에 가도 PLC 연구로 이름이 나 있다. 이 분자의 원리를 규명한 게 약 30년전 이서구 교수 연구실에서였는데, 아직도 계속 연구하고 있다. PLC에는 13종류가 있어서 수많은 생체활동에 참여한다. 지금은 그 중 6종의 유전자를 뇌나 간에서 없앤 후 영향을 분석하는 생쥐 실험을 하고 있다. 실험실에서 키우는 생쥐만 5000마리다."
- 연구과정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들려달라.
"1989년초 포스텍에서 `신호전달연구실'이란 간판을 달고 연구했는데 중소기업 몇 곳에서 전화를 걸어 새로 개발한 통신기술을 검증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그래서 그 신호전달이 아니라고 설명해준 기억이 난다. 이후 `생체신호전달연구실'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 생체 내 소통을 평생 연구해 왔는데, 생활이나 인간관계 철학은.
"한번 맺은 인연은 평생 이어가고, 인연은 돈주고라도 맺으라는 게 삶의 철학이다. 친구도 많고 제자들과도 평생을 간다. 30명 가까운 제자를 대학교수로 길러냈는데 연말마다 우리집에서 1박2일간 함께 보내는 게 전통이 됐다. 제자들을 졸업시킬 때는 항상 메시지를 준다. 인연을 끊지 마라고. 한 실험실에서 생활하면서 갈등도 생길 수 있지만 한 집단에서 같이 보낸 인연이 훗날 다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진솔한 태도로 관계를 이어가면 인연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제자들과 늘 흥겹고 격의 없이 보낸다.
다른 사람이나 새로운 분야와의 소통도 즐긴다. 실험실에 `소통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No Life Without Communication)는 구호를 붙여뒀다."
- 전국대학연구처장협의회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기초연구위원장, 대학 연구부총장 등을 지냈는데 최근 주로 하는 활동은 뭔가.
"그동안은 연구와 관련된 대외활동과 보직을 맡으면서 국가 간접비 산정기준을 마련하는 등 정부 정책 자문을 많이 했다. 연구에 집중한 경험이 행정에도 도움이 됐다. 요즘은 거의 실험실에서 연구에 다시 집중하고 있다. 학교에서 70세까지 연구할 수 있게 보장하는 교수로 선정돼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 앞으로 해나갈 연구의 목표는.
"목표는 없다. 열정을 갖고 즐기면서 정성껏 집중하다 보면 즐긴 만큼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본다. 어디까지 갈지는 아직 모르겠다. 30년전 연구 시작할 때도 이렇게까지 과학기술이 발달할 지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그전에는 암에 매달렸는데 최근에는 뇌에 집중하고 있다. 암세포는 `성장 브레이크'가 없는데, 이것도 세포성장 신호전달과 관련돼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암이 생기거나 암 성장을 촉진하게 된다. 물론 지금도 미래창조과학부 선도연구센터(SRC) 센터장으로서 스트레스와 암 간의 관계를 연구한다.
우리가 운동을 하면 특정 분자가 다른 신호전달물질을 촉진해서 즐거워진다는 연구결과도 얼마전 발표했다. 운동 효과의 분자적 메커니즘을 밝혀낸 것이다. 누구든지 하루 20분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라는 게 연구결과가 시사하는 점이다.
뇌와 관련해선 쥐의 뇌에서 특정 신경전달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도록 한 후 뇌기능 및 뇌질환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 국내 의료 분야는 임상 경쟁력에 비해 기초의학 연구는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다.
"우리 국민들의 `빨리빨리 국민성'이 긍정과 부정적 요소를 다 갖고 있는 것 같다. 기초의학과 생명과학 산업 성장은 시대의 요구라고 생각한다. 배고픔이 해결되면 인류 삶의 질 향상이 가장 큰 숙제가 되기 때문이다.
삶의 질을 높이는 궁극적인 길은 의생명과학이다. 미래 산업은 헬스케어, 에너지, 소재 세가지가 핵심이 될 것이다. ICT는 이 분야가 잘 되도록 접목시키는 액세서리 같은 것이다. 특히 의생명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기술간 접목과 융합을 통해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 기초의학 연구가 창업과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바이오산업 생태계를 탄탄하게 갖추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보는지.
"바이오 영역은 생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상품 개발 성공률이 낮고 기간이 오래 걸린다. 그걸 참아주지 못하는 게 문제다. 자동차휠을 새로 개발하는 데 5년 이상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약은 10년 걸리고 실패 확률도 많다. 좀더 참아줘야 한다.
ICT는 급속하게 변화하지만 바이오는 그렇지 않다. 바이오 활성화는 궁극적으로 `기다려 주는 것'에 있다고 본다. 또 초기 기업들을 위한 탄탄한 투자생태계가 필요하다. 아직 대박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한번 대박이 나오면 다 투자하려 줄을 설 것이다. 그 때를 위해 생태계를 만들고 기다려 줘야 한다."
- 현재 추진중인 산재모병원 설립의 의미와 목표가 궁금하다.
"산업현장에서 1년에 산재환자 10만명이 나오는데, `산업수도'라고 할 수 있는 울산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그런데 전국에 있는 산재병원 10곳은 요양병원 수준이고 입원율이 50% 내외다. 1년에 산재의료비 200억원 이상이 펑크난다. 산재환자들은 민간병원에 가려 하는데 민간병원들은 산재수가가 낮아서 안 받으려 하다 보니 환자들이 외면받고 있다. 이런 현실의 산재병원 수준을 업그레이드할 구심점 역할을 할 모병원이 필요하다. 모병원은 좋은 의료기술과 인력, 장비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는다.
고용노동부가 세계 10대 산재모병원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건립을 추진하고 있고, 울산지역을 후보로 선정해 예비타당성조사를 받고 있다. 결과는 6월말에 나온다.
요즘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좋은 대학병원 의사들은 연구를 많이 한다. 현장에서 부딪힌 경험을 통해 창의적 사고를 접목시키는 것이다. 산재모병원 역시 임상도 하면서 연구인프라를 갖추고 연구중심병원이 돼야 한다. 울산과기대는 산업관련 연구기반이 있고 신생대학이라 변화의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만큼 최적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책무이기 때문이다."
-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이 낮고 홀대한다는 지적이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기초과학은 국민들의 관심을 받기 힘들다. 과학적인 일은 과학자들이 알면 된다. 다만 공학이나 산업화 응용 관련 내용은 국민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기초과학은 모든 국민이 알 필요가 없고 모른다고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기초과학을 잘 하고 있다. 역사가 일천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쓰는 연구비 규모가 영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일본의 기초과학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가 1917년 만들어졌는데, 우리 기초과학연구원(IBS)은 몇 년 전에야 설립됐다. 100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변화를 좋아하는 특성상 잘 하고 있고, 노벨상 수상자도 10∼20년 후면 당연히 나올 것이라고 본다."
- 앞으로 어떤 인생을 꿈꾸는가.
"우선 70세까지 즐겁게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미친 듯이 즐길 거다. 단독주택에 5년째 살고 있는데 주말마다 정원 관리하는 게 취미다. 나무를 심으면 늘 변화를 볼 수 있어 좋다. 통나무를 사서 뭔가를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집에서 키우는 개집이나 실험실 선반은 직접 만든다. 텃밭에서 농사도 짓는다.
정원 가꾸는 게 싫증나면 또다른 좋아하는 것을 찾아 즐길 거다. 열정과 인연과 즐기는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런 인생을 계속 살아가겠다."
-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이공계는 호기심 없이는 할 수 없다. 호기심을 구현하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해보겠다는 태도가 이공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해줄 것이다."
■ 서판길 교수 프로필
◇학력
-1980년 2월 서울대 수의과대학 졸업(수의학사)
-1982년 2월 서울대 의과대학 대학원 졸업(의학석사)
-1986년 8월 서울대 의과대학 대학원 졸업(의학박사)
◇경력
-1980∼1982년 서울대 WHO 협력센터 연구원
-1986∼1989년 미국 국립보건원(NIH) 박사후연구원
-1989∼2010년 포스텍 생명과학과 조교수, 부교수, 교수, 주임교수
-1995∼1997년 듀크대 메디컬스쿨 방문교수
-2003∼2007년 포스텍 연구처장ㆍ산학협력단장
-2006∼2007년 전국 대학교 연구처장협의회장
-2008∼2012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기초연구위원회 위원장
-2007년∼현재 국가석학(교육인적자원부)
-2010년∼현재 울산과학기술대(UNIST) 교수
선도연구센터(암제어) 센터장
◇수상경력
-2001년 10월 제1회 동헌 학술상(대한생화학ㆍ분자생물학회)
-2004년 12월 의료보건 우수과학자 표창(보건복지부)
-2007년 8월 이달의 과학기술자상(과학기술부)
-2007년 12월 국가석학 선정(교육인적자원부)
산학협력 표창장(국무총리)
-2011년 5월 대한민국훈장 근정포장(대통령)
-2012년 6월 무사상(생화학분자세포생물학회)
-2013년 8월 우수성과 100선 선정(미래창조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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