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겨울밤의 고생살이](http://contents.dt.co.kr/images/202502/2025021302102269061001[1].jpg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겨울밤의 고생살이")
추운 새벽을 지키는 전화 교환수
눈물 한숨 섞인 빨래방망이 소리
유난히 추운 올 겨울이다. 없는 사람에게는 여름보다 겨울을 나기가 훨씬 힘들고 고달픈 일일 것이다. 100년 전 추운 겨울밤을 힘들게 견뎌냈던 분들의 이야기가 1924년 12월 20일부터 조선일보에 '겨울밤의 가지가지'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그중 지금은 보기 힘든 그 이야기를 찾아가 본다.
첫째는 여자 고학생들의 이야기다. "보라! 귀엽고 불쌍한 이 어린 학생들을. 눈물이 있는 자는 울어다오. 목석이 아니거든 동정하여라. 더운 방에서 잠자고 배불리 먹고 따뜻이 옷 입은 호화로운 사람들도 오히려 추움을 견디지 못하는 이 차디찬 겨울날에, 굶주리고 떠는 이 가련한 고학생들의 정형을 살펴보아라. 그들은 눈이 첩첩이 쌓이고 모진 바람이 빰을 갈기는 겨울밤에 잡지 몇 권을 손에 쥐고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창틈으로 내다 보지도 아니하는 무정한 아씨들에게 별별 설움을 다 당하는 것이다. 불도 변변히 때지 못하는 낡은 다다미 방위에서 손들을 혹혹 불어가며 전등불 밑에 모여 앉아서 혹은 수(繡)도 놓아서 팔고 혹은 목도리, 장갑도 떠서 팔며 혹은 남자들의 내의도 맡아서 재봉 침에 지어 주는 것이다. 그들은 종일토록 학교에서 시달린 그 곤한 몸을 가지고 일감을 붙들고 떨고 앉았다가는 그대로 졸고 그대로 쓰러져 자는 것이다. 다행히 고학생 상조회가 있어 그들의 있을 집과 그들의 먹을 물과 켜는 불을 담당해 주건마는, 그들의 '빵'을 위하여는 그들이 날마다 날마다 그날그날을 자기들이 노동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전치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 끼에 8전 어치 음식을 구할 길이 없어서 길가로 방황하며 일감을 맡으러 다니고, 1할 이상의 이익이 못 남는 잡지를 팔아서 학비를 보태 쓴다. 어리고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수천 리 수백 리 타향에 행장을 짊어지고 한양 옛터로 찾아와서 찰라찰라의 생활을 보장해 가며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그들! 아! 얼마나 귀엽고 불쌍한 일이냐. 그들은 현재 이화(梨花) 배화(培花) 숙명(淑明) 기타 각 강습소로 다니며 학업에 열중하는 것이요 또한 고학생 상조회에 와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며 기어이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과 상해로 유학한 학생도 있고, '모스코바'로 건너간 학생도 있다 한다. 그들의 성공이 빛나고 그들의 앞길이 행복하기를 마음으로 비는 동시에 사회의 뜨거운 동정이 많이 있기를 또한 바란다." (1924년 12월 20일자)
다음은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한 가정부인들의 이야기다. "불행히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가정에 들어가서 살림하는 여러 부인네와 이미 학령이 지나서 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여러 처녀들이 낮에는 집안일을 보살피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을 무릅쓰고 일 년 열두 달을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각 학교에서는 새해를 맞으려고 하던 공부를 쉬고 즐거이 마음을 예비하려는 이때에, 그들은 오히려 남보다 모든 것이 뒤떨어진 것을 원통히 생각하고 배울 학(學) 바다 해(海)하고 외우며 '둘에 셋을 가(加)하면 (2x3) 몇이냐?'하고 손가락들을 꼽아 보기에 분주한 것이다. 그러다가도 '우리가 이제 이렇게 배워도 무얼 좀 알다 죽을까요'하고 가르치는 선생을 향하여 탄식하는 때가 많다 한다. 적어도 그들의 아우들은 소학교 교사는 되었을 것이요 그들의 딸들은 소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많을 터이니 비록 나이 30살에 ㄱ ㄴ을 읽는다고 해도 배우는 그만큼은 언제든지 알 것이요 아는 그 만큼은 언제든지 아는 사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가 늦다 말라' 그저 배우자. 그저 힘쓰자...세상에 힘써 배우려는 사람을 따라갈 장사는 없을 것이니 그들이 이 추운 겨울밤에 따뜻한 아랫목 푹신푹신한 이불을 집어 내던지고 오롱조롱 치마 귀에 매어 달려서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아기들을 용기 있게 떼어 버리고 손들 호호 불며 책보를 끼고 학교를 찾아오는 그 정성이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성공의 밝은 빛을 비치게 할 줄 믿는다." (1924년 12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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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볼 수 없는 여자 전화 교환수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자. "겨울밤에 전화 교환수! 누구든지 전화 가입자는 다 알겠지마는 밤이나 낮이나 밤중이나 새벽이나 전화통만 들면 꾀꼬리같이 고운 목소리로 '하이, 하이, 남방'하는 소리가 들려 올 것이다. 밤중에든지 새벽에든지 세상 사람이 모두 자는 데도 이 교환수만은 잠시를 쉬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이 다 자는 밤중에도 전화통만 들면 여전히 '네-네'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마치 한 판에 박아놓은 유성기에서 나오는 것 같으나 실상은 사진에 보이는 것 같이 20살 내외의 꽃 같은 아녀자가 밤잠을 자지 못하며 기다리고 앉았다가 교환대에 불만 반짝하고 빨갛게 켜지면 '네-네- 몇 번'하고 물어보아 부르는 번호의 줄을 갖다 꽂아 주어 접속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루 이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루 걸러 씩 일주야에 30~40전 내지 1원의 봉급에 목을 매고 청춘의 자랑과 처녀의 꽃다운 시대를 보내는 것이다. 남이 모두 자는 밤중에 두 패로 갈려 몇 시간씩 앉아 야역(夜役)을 하는 것이다. 종일 피곤한 몸으로 잠시 편안한 꿈속에 들었다가도 맞은 시간이 되면 단잠을 깨어 어푸수수한 머리를 들고 나와 앉으면 선하품만 자꾸 나고, 장안만호(長安萬戶)의 편안히 자는 모든 세상 사람이 모두 원망스럽게 보인다 한다. 으스스한 추위는 몸을 엄습하고 난롯불의 기운조차 약한 새벽이 되면 팔짱을 낀 대로 꾸벅꾸벅 존다고 한다. 이러다가도 잠깐만 정신이 아득하여 접속이 늦으면 물 퍼붓듯 꾸지람이 내리며, '잠을 자느냐, 정신이 빠졌느냐'하고 갖은 책망을 다 한다고 한다. 이럴 때에는 눈물이 돌 적이 많다는 것은 그들의 하소연이다. 밤중에 고요히 앉았을 때는 불량 청년들이 일없이 전화를 걸어 가지고 쓸데없는 객소리로 교환수를 시달리는 때도 많다 한다. 하여간 전화 교환수도 괴로운 직업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이렇게 벌어 어린 동생의 공부를 시키고 부모 공양을 하며 현재 혼인한 사람은 한 사람도 다니지 아니 한다 한다." (1924년 12월 26일자)
그 다음은 빨래를 해주는 표모(漂母)의 슬픈 이야기가 있다. "철떡철떡 표모들의 방망이질 소리는 밤이 깊도록 들린다. 중학(中學)다리, 수표(水標)다리, 상류 하류에 수 없는 표모들이 모여 눈물 섞인 하소연을 서로 들어가며 처량한 빨래 망치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히 발길을 멈추고 덧없는 한숨을 내쉬게 한다. 구복(口腹)이 원수로다. 행랑채 한 간 방에 몸을 부치고 먹다 남은 반찬 토막에 한 그릇 밥을 얻어먹는 죄가 그리도 심하여, 바람 불고 눈 오는 차디찬 겨울밤에 얼음장을 들치고 찬 돌 위에 올라앉아 나리님 서방님 마님 아씨들의 때 묻은 의복을 빨지 않으면 아니 되는구나. 손은 턱턱 갈라져서 피가 철철 흐르고 밤이 깊도록 떨면서 빤 빨래는 주인 아씨들의 잘했으니 못 했느니 찧고 까불고 하는 입살에 오르내리는 것이니, 폭폭이 찢어진 표모들의 낡은 치마 귀퉁이는 물에 젖고 눈물에 젖고 마를 길이 없을 것이다. 남의 행랑살이를 면하고 셋방 구석에서 빨래품을 판다 해도 한 광주리에 1원. 아침도 변변히 못 먹고 점심도 굶고 저녁도 따뜻이 못 먹은 몸으로써 어서 빨아서 양식거리라도 사 먹으려고 밤을 낮으로 알고 빨아다 갔자 주면 '돈이 아직 안 생겼으니 천천히 받으라'한다. 자기들은 더운 방에서 잠자고 맛있는 음식에 배를 불리고 오히려 부족하여 무슨 맵시를 더 내겠다고 지전(紙錢) 뭉텅이를 손에 들고 포목점으로 나가면서, '돈이 아직 안 생겼으니 천천히 받으라'...이 무슨 얄밉고 깜찍한 말이랴? 한 마디 대항도 못하고 할 수 없이 돌아서는 표모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 치마 귀를 집어 당겨 남모르게 씻는다." (1924년 12월 30일자)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겨울 찬 바람 속에 모두 곤한 잠을 자는 시간에도 누군가는 일을 해야만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 분들의 앞길이 행복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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