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여파가 국내 경제외교에 후폭풍으로 돌아오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2기의 출범을 앞두고 대미 외교로 국내 산업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지만 정부의 정상적인 대외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 배터리와 석유화학 등 주요 수출 산업은 글로벌 보호무역에 무방비로 당할 위기다.
9일 재계에 따르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한·미 정상회담을 연다는 정부 계획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한 단계 격이 낮은 고위급 대화도 열릴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트럼프 당선인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개정과 고강도 관세 정책 예고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당초 한미 정상회담이나 다양한 외교 통로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개정에 따른 보조금 축소 최소화를 기대했지만 국무의원 전원이 사의를 표명한 만큼 경제 컨트롤타워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정치적 혼란으로 미국과 협상을 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 2기의 정책이 수립되기 전에 민관이 힘을 합쳐 정상회담이나 다양한 외교 경로로 한국 기업들의 입장을 전달해야 하는데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배터리 산업은 IRA의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를 영업이익에 반영하고 있어 개정시 타격이 불가피하다. 국내 배터리 3사의 올해 1~3분기 AMPC 누계액은 총 1조3787억원에 달한다. 이 중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AMPC가 없으면 사실상 영업적자다.
중국산 흑연의 세액공제 혜택 취소도 풀어야 할 문제다. 한국은 흑연의 약 90% 이상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만큼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중국산 흑연에 대한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 요건을 폐지할 경우 대체 공급망 모색과 원자재 비용 증가를 겪을 수밖에 없다.
한미 정상담회담 뿐 아니라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의 방한도 비상계엄 여파에 취소됐다. 당초 방한 일정 중 국내 배터리, 석유화학 대표들과 비공개 면담을 통해 스웨덴과의 협력 기회를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불발된 것이다.
중국발 공급과잉과 글로벌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석유화학 업계의 상황은 더 절박하다. 그간 정부 주도로 논의해온 '석유화학업계의 경쟁력 제고 방안'의 발표가 이달 예정대로 진행될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정부의 경쟁력 제고 방안에는 자산 매각과 통폐합, 금융·세제 지원 등이 담길 예정이었다. 하지만 국무위원들 전원 사의를 표명한 상태라 관계장관회의가 정상적으로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 SK케미칼 등은 울산에 노조를 두고 있는 만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투쟁 수위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국노총 울산본부와 전국화학노련 등이 자칫 총파업을 결정할 경우 막대한 피해가 불가피하다.
강인수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 이후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어 한미 정상 간 대화 채널이 사실상 멈춘 상태"라며 "트럼프 당선인은 공약 이행률이 높아 관세 부과나 IRA 개정 등 경제적으로 한국에 불리한 정책을 강력히 실행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어 "트럼프 당선이 취임하기 전, 규칙(룰)이 설정되기 전인 지금 한국 기업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의미 있는 협상을 할 수 있는데 이를 놓치고 있는 게 문제"라며 "소수의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정부 관료들의 외교적 채널(아웃리치)을 활용하는 것도 어려운 만큼 지금 외교통상 측면에서는 이럴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한나기자 park27@dt.co.kr
지난 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식에서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왼쪽)이 미국 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J. 트럼프를 환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