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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몽골제국 시기 문명 교류, 조선시대 `천문학` 획기적 발전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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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각 지역서 천문학 중시
제왕, 하늘 변화 읽고 민심 이반 막아
몽골제국 초기엔 위구르인들 활약
거란·여진 출신 지식인 조정에 등용
세종 시기, 해시계·물시계 등 제작
천체 관측 기기서 정밀기술 뛰어나
세계적 과학발전 흐름 동참 큰 의의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몽골제국 시기 문명 교류, 조선시대 `천문학` 획기적 발전 계기
세종 시기 천문학 발전은 몽골제국의 동서 천문학 교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러스트 윤소영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몽골제국 시기 문명 교류, 조선시대 `천문학` 획기적 발전 계기
사마르칸트의 울룩벡 천문대 유적.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몽골제국 시기 문명 교류, 조선시대 `천문학` 획기적 발전 계기
별과 태양의 위치를 측정하여 메카의 방향을 알려주는 무슬림들의 천체관측기구 아스트로랍(Astrolabe).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⑤ 중앙亞, 과거를 넘어 미래로 - 몽골 문명교류와 세종대왕 천문학(5)


올해 6월말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 1600여점의 조선 초기 유물들이 발굴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한글 금속활자였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세종 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문 과학기구의 부품들 역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세종대왕 시기 천문학의 발전은 한글 창제와 함께 당시 조선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증거로 흔히 언급된다. 그러나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조선 초기 천문학 발달이 13세기 몽골제국 시기 발생한 전세계적인 지식의 교류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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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은 정복 전쟁의 결과물로 생성된 세계제국일 뿐 아니라 동·서 문명이 만나는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전쟁, 지리, 역사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음식, 의약,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각지의 인적, 물적 자원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활발히 교환되었다. 이 가운데 천문학 분야의 교류는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천문학은 유라시아 각 지역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중시된 학문이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사상이 널리 퍼져있었고, 그에 따라 제왕들은 하늘의 변화를 읽고 민심의 이반을 막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역법(曆法)을 제작하여 반포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가 컸다. 한 왕조를 기준으로 수천, 수만 년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뿐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는 역법은 단순한 과학기술의 집적일 뿐 아니라 시간을 다스릴 수 있는 천명(天命)의 증거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역대 왕조는 소수점 이하 13자리까지 계산하여 과거와 미래 천체의 움직임을 제시했고 이를 위해 전문가들을 채용, 양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한 중국 정사(正史)에 수록된 '천문지(天文志)'에는 당시 각 정권에서 천문학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있었고 이들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첨성대나 고구려의 별자리 지도 등은 늦어도 삼국시대부터 천문학이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서아시아에서도 별자리가 인간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론은 널리 퍼져있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 문명에서 천문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성서에서 동방박사, 즉 페르시아 학자들이 별을 보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견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천문학의 융성을 반영한다. 7세기 이슬람의 확산과 함께 형성된 무슬림 사회에서도 천문 관련 지식들은 '무나짐(munajjim)'이라고 하는 천문학자들을 통해 계속 연구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서아시아와 동아시아를 통합하는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한 몽골 제국 시기 동서 천문학의 활발한 교류는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칭기스칸이 몽골제국 건국한 1206년에서 4대 대칸 뭉케(Mongke)이 사망한 1259년 사이 기간 몽골제국은 북중국의 금(金)나라와 서하(西夏)를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레즘샤 왕조를 물리친 이후 러시아와 페르시아, 이라크, 시리아 지방을 석권했다. 이러한 단계적 확장의 과정에서 다양한 북중국, 중앙아시아, 서아시아-페르시아 인사들이 몽골 조정에 가담하여 복무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천문학 전문가들도 포함되었다.

먼저 몽골제국 초기에는 몽골에 문자를 전수한 위구르인(Uyghur人, 한자어로 回골人으로 표기)들이 천문학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곧이어 야율초재(耶律楚材)와 같은 거란의 요(遼)나라나 여진의 금(金)나라 출신 지식인들이 몽골 조정에 등용되었다. 사실 몽골 2대 대칸 우구데이(Ogodei) 치세 재상 가운데 한 명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야율초재가 신임을 얻게 된 것도 그의 천문학 지식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금(金)에서 사용하던 역법 등을 활용하여 위구르인들이 맞추지 못한 월식의 시기를 정확히 계산해냈고, 그의 능력을 높이 산 몽골 황제가 그를 재상 직위에 발탁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임을 얻은 북중국 출신 천문학자들은 칭기스칸이나 그의 손자 훌레구(Hulegu)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1222년 칭기스칸의 초청으로 중앙아시아 사마르칸드(Samarqand)를 방문한 도교 교단 전진교(全眞敎)의 장춘진인(長春眞人) 구처기(邱處機)는 그 곳에서 산력(算曆)을 담당하고 천문대를 관장하는 이(李)씨 성을 가진 인물의 환대를 받았다. 또한 1250년대 훌레구의 페르시아-이라크-시리아 원정에 동행한 푸만지(Fumanji; 이 표기법에 대해 다양한 반론이 존재한다. 페르시아어 사본에 따라 다른 식의 표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라는 이름의 중국학자는 중국 천문가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었다. 그는 페르시아어로 싱싱(singsing)으로 불렸는데 이는 중국어 선생(先生), 즉 당시 도교를 신봉하던 도사(道士)들을 지칭하는 호칭이었다. 이를 통해 그가 장춘진인 구처기처럼 도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사들은 의술, 특히 장생술(長生術) 뿐 아니라 별자리를 읽고 하늘의 기운을 이용하는 데 능통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 측 천문학, 특히 도술의 일환으로 점성술에 가까운 양식은 이내 무슬림 과학자들의 천문학으로 대체되었다.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은 1256년 훌레구가 암살자로 유명한 이스마일리(Ismaili)파의 본거지인 라마사르(Lammasar)를 정복했을 때, 당시 그 곳에 잡혀 있던 나시르 앗딘 투시를 구출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스마일리파의 요구로 천문학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다양한 천문기구와 천문학을 접한 몽골 군주 훌레구는 이후 자신의 궁정에 동서를 막론하고 지리학, 천문학, 수학 등의 과학자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훌레구의 천문학에 대한 높은 관심은 당시 서아시아를 장악한 몽골 왕조인 일칸국의 수도 타브리즈 남쪽에 위치한 마라가에 1264년 천문대를 세운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시르 앗딘 투시를 장관으로 한 마라가 천문대에는 다양한 장비를 갖춘 천체관측소 뿐 아니라 도서관 및 다양한 부속 건물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 곳에서 나시르 앗딘 투시와 중국에서 온 푸만지는 함께 일하며 중국과 페르시아의 천문학의 성과를 통합하여 '지즈-이 일카니' 즉 '일칸의 천문표'라고 알려진 천문표를 만들어냈다.

'지즈-이 알카니'에 소개된 '중국-위구르인들이 사용한 역법'은 중국 역대 왕조에 사용하던 공식적인 역법이 아니라 중국 민간에서 활용되던 소력(小曆)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지가 아니라 입춘을 한 해의 시작으로 한다든지, 복잡한 계산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정식 역법과 달리 소수점 네 자리에서 계산을 마무리하는 만분법(萬分法)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것이 주요한 근거이다. 특히 당나라 시기 제작한 부천력(符天曆)과의 유사성에 주목할 만하다. 흥미로운 것은 부천력(符天曆)을 제작한 조사위(曺士蔿)라는 인물이 중앙아시아 소그드(Sogd) 지방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중앙아시아 역법의 영향을 받은 중국 역법이 다시 이란-페르시아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볼 수 있다.

몽골제국 시기 천문학의 발전은 아미르 티무르와 그의 후손들의 제국, 즉 티무르조에도 계승되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제2도시 사마르칸트(Samarqand)에는 티무르의 손자 울룩벡(Ulughbeg)의 천문대 유적이 남아있다. 울룩벡은 1402년 이 천문대를 건설하면서 잠쉬드 기야쓰 앗딘 알카쉬같은 천문학자로 하여금 '지즈-이 하카니' 즉 '카간의 천문표'를 편찬하게 했다. 1445년에는 울룩벡이 직접 '지즈-이 술타니'라는 천문표를 저술했다.

한편 몽골제국의 5대 대칸 쿠빌라이가 중국의 정치 관습에 따라 원(元)이라는 국호를 취한 이후 천문학 분야의 교류는 원나라 조정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1267년 중앙아시아 혹은 페르시아계로 알려진 자말 앗딘이라는 무슬림 천문학자가 초청되어 쿠빌라이를 위해 7가지 종류의 천문관측기구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만년력(萬年曆)이라는 역법을 만들었다. 쿠빌라이는 1271년에는 자말 앗딘과 4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무슬림 천문학 연구 기관인 회회사천대(回回司天臺)를 원의 또 다른 수도 상도(上都)에 설치하는데, 여기서 제작된 역법인 회회력(回回曆)이다. 1280년 원의 곽수경(郭守敬)이 제작하여 원나라 공식 역법으로 반포된 수시력(授時曆)은 자말 앗딘의 회회력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무슬림 천문학의 관측 기구와 각종 역법의 발전은 중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 천문학 발전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몽골은 수시력이 제작되고 난 이듬해인 1281년 1월부터 제국 전역에 사용을 명했는데, 몽골에 정치적으로 복속한 고려도 이러한 조치에 포함되었다. 문제는 수시력 가운데 천체의 움직임, 즉 해와 달, 그리고 태양계의 육안 관측한 다섯 곳의 행성에 대한 계산법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고려에서 최성지(崔誠之)라는 학자를 원에 보내 산술법을 배워오게 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 계산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중국 북경지방을 중심으로 제작된 역법이다보니 한반도의 경우 일식(日蝕) 등의 측정에 오차가 발생했고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명나라가 건국되고 새롭게 시행하게 된 대통력(大統曆)에서도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대통력 자체가 수시력의 체계를 대부분 물려받아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교정한 이가 바로 세종대왕과 그가 후원한 학자들이었다. 세종은 정인지(鄭麟趾)를 필두로 일련의 학자들로 하여금 역법을 수정하도록 했는데 그 결과물이 '칠정산(七政算) 내외편'이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해, 달과 다섯가지 행성을 합한 일곱 개의 천체에 대한 완벽한 계산을 의미하는 칠정산은 먼저 1444년 내편이 간행되었고 이후 외편이 발간되었다. 먼저 수시력과 대통력의 계산법을 기준으로 천체의 운행에 대한 계산법을 서술했는데 그 연구 결과를 '칠정산(七政算) 내편'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했다. 그런데 이를 보완할 필요가 생겨 재차 연구를 진행한 것이 '칠정산 외편'이다. 이 외편의 바탕이 된 것은 바로 자말 앗딘이 만든 회회력(回回曆)에 대한 연구였다.

조선 세종 시기 천문학의 발전은 천체 관측 기기의 제작에서 두드러졌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해시계, 물시계를 포함하여 많은 천문학 기구가 관노(官奴) 출신 장영실(蔣英實)에 의해 제작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관기(官妓)였던 그의 어머니와 달리 장영실의 아버지가 원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부각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장영실이 천문학 기구 제작에 능숙했던 것도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장영실은 세종의 명을 받아 선기옥형(璇璣玉衡)으로 불리던 천문관측기구를 제작하기 위해 다른 천문학자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와 함께 중국으로 파견되는데, 그의 출신이 중국 내 천문기구 제작자들과의 소통을 원활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귀국한 장영실은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고 이를 선기옥형이라고 불렀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이 제작한 간의(簡儀)였다. 세종실록에는 경회루 북쪽 담장 내측에 대(臺)를 쌓고 설치했다고 한다. 사실 혼천의 혹은 혼의는 중국 고전에 언급되었고 서경대전(書經大全)과 같은 곳에는 그림도 나와 있는 등 중국에서 이전부터 사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란-페르시아의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개량된 것이 바로 간의였다. 원나라의 곽수경(郭守敬)이 제작한 간의(簡儀)는 실제 관측에 활용될 정도로 실용적이었고, 이를 장영실이 도입한 것이었다. 1432년 세종의 명으로 제작된 간의를 통해 한양이 위도 38도에 있음을 측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종은 이외에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는 기계를 통해 해와 별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도 만들었다. 이 역시 페르시아에서 유입된 천문관측기구를 참고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몽골제국 이란-페르시아와 중국을 아우르는 세계 각지의 천문학 지식의 교류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천애민(敬天愛民)을 통치 철학으로 삼은 세종대왕 시기 천문학의 발전은 사실 몽골제국 시기 이루어진 아랍-페르시아와 중국 사이 천문학의 융합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선의 독창적인 기술 발전은 강조할 만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당시 세계적인 과학 발전의 흐름에 조선이 소외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적극 동참했다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몽골제국 시기 문명 교류, 조선시대 `천문학` 획기적 발전 계기
이광태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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