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병일 칼럼] 눈 먼 한국의 공화정

예병일 플루토미디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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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1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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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병일 칼럼] 눈 먼 한국의 공화정
예병일 플루토미디어 대표

그는 공화당원이다. 가스 브룩스(Garth Brooks)는 지난 1월 20일 낮 12시14분 민주당원인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축가를 부르기 위해 연단에 올랐다. 전쟁 같았던 트럼프지지 시위대의 미 의회 의사당 난입 사태로부터 두 주가 지난 날이었다.

대선 과정에서 극도로 분열된 미국의 정치는 1월 6일의 의사당 난입 사태로 그 정점을 찍은 듯 보였다. 인류가 만든 걸작인 민주공화정의 '모범'이었던 미국정치의 미래가 걱정스럽고 궁금했던 나는 취임식 장면을 TV중계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쓴 청바지 차림의 브룩스는 모자를 벗고 한 의장대원의 짧은 트럼펫 전주를 신호 삼아 미소 지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그날 무반주로 부른 노래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어메이징 그레이스'였다.

그는 중간에 노래를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노래의 마지막 절을 저와 함께 불러주세요. 취임식장에 계신 분들 뿐만 아니라, 집이나 일터에 계신 분들도, 함께 하나가 되어서(as one united)." '애즈 원 유나이티드' 노래를 마친 그는 바이든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연단을 내려갔다.

브룩스는 올해로 60세가 된 미국 최고의 컨트리 가수다. 공화당의 당원이지만, 바이든의 요청을 받고 기꺼이 축하공연 연단에 올랐다. 컨트리 가수라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미국인에게는 나훈아 급의 '가황'이다. 음반 판매량이 전설의 엘비스 프레슬리나 마이클 잭슨보다도 많다.

미국 레코드산업협회(RIAA)의 다이아몬드(미국에서 1000만 이상 판매) 인증 앨범이 2020년 기준으로 무려 9개나 된다. 압도적인 1위다. 2위가 6개인 비틀즈다. 또 2020년까지 미국에서 총 1억 5600만 장의 음반 판매량을 인증 받았는데, 솔로 가수로는 1위이고, 전체 가수 중에는 비틀즈에 이어 2위다. 그 브룩스가 취임식장에서 국민들에게 '함께 하나가 되어서' 부르자고 했던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마지막 절 가사는 이랬다.

"나는 한때 길을 잃었지만 이제는 찾았고(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한때는 눈이 멀었지만 이젠 볼 수 있네(Was blind, but now I see)"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길을 잃고 눈이 멀어 있는 듯 보이는 미국정치의 모습이 겹쳐졌다. 의사당 난입으로 극에 달했던 분열의 모습은 일단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기는 했다. 취임식 현장에는 트럼프와 97세의 고령인 카터를 제외한 모든 전직 대통령(클린턴, 부시, 오바마) 부부가 참석했다. 바이든은 그날 자신이 '모든 미국인들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화당원인 '미국의 국민가수' 브룩스는 왜, 어떤 생각에서 민주당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해 축가를 불렀는지 궁금했다. ABC방송에서 브룩스는 그 공연이 '통합(unity)의 표현'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행사장의 유일한 공화당원일지도 모른다(I might be the only Republican at this place). 그러나 축가를 부르는 건 맞은편에 손을 내미는 것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브룩스가 축가를 부르던 그날, 상대 진영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듯 싸우는 우리 정치의 모습도 떠올랐다. 대한민국의 공화정(共和政)도 길을 잃었다(is lost). 눈이 멀었다(is blind). 맹목(盲目)의 정치, 전쟁 같은 정치다. 공화(共和)는 공존(共存)이다. 생각이 다른 집단을 인정하고 함께 사는 것이다. 왕정이나 독재정에서 사는 것이 대한민국의 꿈이 아니라면, 상대 진영을 존중해야 한다. 민주공화정은 생각보다 취약해서 우리가 소중히 보듬지 않으면 쉽게 무너진다.

대선까지 꼭 1년 남았다. 취임식 모습을 상상해본다. 패배한 당의 당원인 가수가 기꺼이 참석해 축가를 부를 수 있을까. 전직 대통령은 몇 명이나 참석해 축하를 할 수 있을까. 브룩스처럼, 이제 청와대와 여당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야권과 국민은 그 손을 잡아야 한다. 앞으로의 1년여 대선과정이 '공화의 정치냐 전쟁과 보복의 정치냐'라는 한국정치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길 잃고 눈 먼 한국의 공화정은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맹목의 정치에서 눈을 뜰 수 있을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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