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자국 정보통신기술과 서비스 보호를 위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외국산 장비를 자국 기업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통신장비 업체들을 겨냥한 조치로, 명분은 국가안보 수호이지만 5G 패권을 중국에 내주지 않겠다는 실리적 계산이 숨어있다는 분석이다.
'정보통신 기술 및 서비스 공급망 확보' 행정명령에 따라 상무장관이 미국의 국가안보 또는 미국민의 보안과 안전에 위험을 가져오는 거래를 금지할 권한을 가진다. 상무부는 행정명령 서명 후 화웨이와 70개 계열사를 거래제한 기업 명단에 올린다고 발표했다. 이 명단에 포함된 기업이 미국 기업과 거래하려면 당국의 허가를 먼저 취득해야 한다. 이 조치는 며칠 뒤 발효될 예정이다.
이번 조치에 대해 외신들은 일제히 미국이 중국과의 무역전쟁 속에 중국에 결정적 한방을 날렸다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미국은 자국은 물론 영국 등 동맹국들에 화웨이의 5G 통신장비를 쓰지 않을 것을 요구해 왔다. 화웨이가 자사 장비에 백도어(인증 없이 전산망에 침투해 정보를 빼돌리는 장치)를 심는 방식으로 중국 정부의 스파이 활동에 악용될 수 있다고 의심해왔다.
미국은 작년 8월 미 정부기관이 중국 화웨이와 ZTE 장비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국방수권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후 독일과 영국 등 동맹국에 대해서도 화웨이 5G 장비를 쓰지 말도록 촉구했다. 화웨이가 민간기업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의 지령을 따를 수밖에 없어 결국 스파이 노릇을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가운데 전문가들은 5G 패권을 내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이번 조치의 배경이라고 분석한다. 5G 서비스에서 중국은 미국보다 한발 앞선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2월 신년 국정연설에서 5G를 두고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하면서 기술패권을 선언했지만 현장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의 작년 8월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2015년부터 3년 동안 5G 기반기설 구축에 240억 달러를 미국보다 더 투자했다. 그 기간 중국이 이동통신 기지국 35만개를 신설했으나 미국은 3만개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집계됐다. 국가 주도 경제모델을 앞세운 중국의 집중 투자는 미국과 중국의 5G 기술격차를 더 벌릴 우려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날 행정명령은 그동안의 견제조치 중 구속력이 가장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외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결정을 앞두고 미국 통신업체 임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미국이 반드시 5G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미국 기업 중에는 5G 스위치장비를 만드는 곳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 화웨이가 미국에서 퇴출당하더라도 세계 시장의 40∼60%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현재 독일, 영국 같은 동맹국들도 미국 정부의 요구에 전면 퇴출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의 이번 결정으로 영국의 화웨이 장비 도입 여부에 세계의 시선이 쏠릴 전망이다. 세계 각국이 미국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이 화웨이 장비 도입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최대 이동통신사인 보다폰은 7월 3일부터 5G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인데 화웨이 장비를 도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정부는 이에 앞서 지난달 23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를 통해 5G 통신망 구축 과정에서 '비핵심' 부품에 화웨이를 사용해도 된다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화웨이는 이날 미국 정부의 조치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화웨이는 입장발표를 통해 "우리는 미국 정부와 소통을 통해 제품 안전조치를 보장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면서 "미국이 화웨이에 제한을 가한다고 해서 미국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미국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미국은 품질이 더욱 낮고 비싼 장비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됨으로써 5세대 이동통신(5G) 건설 과정에서 다른 나라보다 뒤처지게 될 것"이라며 "이는 최종적으로 미국 기업과 소비자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화웨이는 또한 미국의 '불합리한' 조치가 화웨이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심각한 법률적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향후 미국 정부의 제재가 최종적으로 시행되면 화웨이가 법적 대응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안경애기자 naturean@d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