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룡 한국외대 명예교수·언론학
![[뉴스와 콩글리시] `캐리어 갑질`… 씁쓸한 한국사회](http://contents.dt.co.kr/images/201706/2017060102102251607001[1].jpg "[뉴스와 콩글리시] `캐리어 갑질`… 씁쓸한 한국사회")
"제 옷은 제가 벗을 게요." 뭐 별것도 아닌 이 한마디가 국민의 가슴에 왜 그리 와 닿을까. 문재인 대통령의 국가 운영방식이 매사 낮은 곳으로 임하고 있다. 청와대 뜰에서 참모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산책하는 모습, 낮은 수준의 경호, 일반시민들과 셀카 찍기, 주요 인사 직접 발표하기, 손수 커피 타기, 그리고 수보회의(수석비서관과 보좌관 합동회의)에서 웃옷 벗고 격의 없이 토론하는 모습들이 국민 마음 속에 감동을 자아낸다. 눈먼 돈 없애고 공사(公私)비용을 구분해 쓰겠다고 천명한 대목도 박수받아 마땅하다. 아마도 적자생존의 어전회의만 보던 국민들에게 자유롭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다.
이런 판국에 일부 정치인들은 아직도 과거의 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월 23일 바른정당 김무성의원은 일본 여행 뒤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보좌관의 얼굴도 쳐다 보지 않고 한 손으로 캐리어를 밀어줘서 '세계적인' 화제의 인물이 됐다. 이 비디오 클립은 삽시간에 방송, 신문,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김무성, 노 룩 패스(no-look pass), 그리고 캐리어 세 단어가 검색 엔진을 달궜다.
온 세상을 들끓게 한 이 해프닝을 두고 조선일보(2017. 5. 27)의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한껏 비틀어 보도했다. 첫째 김무성은 몸소 컬링(curling)의 시범을 해 보임으로써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에 기여했다. 컬링이 무슨 스포츠인지 찾아봤다. 얼음판 위에서 두 팀이 무겁고 납작한 돌들을 목표물을 향해 미끄러뜨리는 경기로서, 각각 4명의 선수로 구성된다. 둘째 김무성은 다 죽어 가는 바른정당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했다. 그러지 않아도 존립이 위태로운 정당에 이처럼 군림하는 자세가 과연 보탬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셋째 김무성은 자신이 들고 다니는 특정 캐리어 판촉에 결정타를 날렸다. 무슨 가방이냐, 값이 얼마냐, 어디서 살 수 있느냐 호사가들이 극성이었다. 어쨌거나 가방장수는 특수를 만났을 것 같다.
여기서 잠깐! 캐리어(carrier)가 무엇인가? 우리나라 신문이나 인터넷에선 별생각 없이 '기내용 소형 가방'이란 뜻으로 캐리어란 말을 쓰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영어로 캐리어는 군함(a military ship)이나 항공모함(an aircraft carrier)을 가리킨다. 또한 캐리어는 KT나 SK텔레콤 같은 전신전화회사를 의미한다. 관련 외신 기사에서 carrier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냥 짐(luggage) 아니면 여행용 가방(suitcase), 또는 봇짐(swag)으로 나와 있지, 캐리어란 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렇다면 기내(機內)에 반입할 수 있는 작은 가방은 뭐라고 해야 할까? 캐리온(carry-on)이다. carry-on bag을 줄여서 그냥 캐리온이라고 한다. carry-on case라고 해도 된다. 비행기 안에 들고 탈 수 있는 작은 가방(a small bag or case that you carry onto a plane with you). 바로 캐리온이다. 내친 김에 가방 공부를 좀더 해보자. 소형 여행용 가방은 슛케이스(suitcase), 대형은 트렁크(trunk)라고 한다. 서류가방은 브리프케이스(briefcase), 007가방은 애태쉐 케이스(attachecase)다. 여행할 때 등에 지고 다니는 가방은 백팩(backpack), 어깨에 매고 다니는 학생용 책가방은 새철(satchel)이라고 부른다. 바퀴가 달려있어 밀고 다니는 가방은 spinner luggage인데, 러기지(luggage)와 배기지(baggage)는 같은 말이다.
가방 밀어주기 사건이 우리사회에 미친 파장은 생각보다 너무 컸다. 영국의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는 여행용 가방의 노 룩 패스를 한국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갑질의 한 단면으로 봤다. no-look pass란 글자 그대로 농구 경기에서 한 선수가 볼 받을 선수를 쳐다보지 않고 공을 패스하는 것을 가리킨다. 안보고 던지는 기술(a blind passing technique)이다. 이 신문은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는 중년남성(a middle-aged man)의 선민의식, 특권의식, 그리고 권력남용을 꼬집고 있다. 한 정치인의 봇짐이 한국 권력층의 민낯(the bare face of the Korean elite)을 잘 보여준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의 개저씨(gaejessi)의 방자한 행태를 비판했다(개 하고 연관된 개저씨를 영국신문은 발음 나는 대로 영어로 표기했다). 한국적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갑질도 이에 딱 맞는 영어표현이 없음으로 아예 gapjil이라고 썼다. 앞으로 재벌(chaebol)에 이어서 갑질(gapjil), 개저씨(gaejessi), 전관예우, 헬조선 등이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올라갈 날도 멀지 않은 듯 싶다. 언어에도 국격이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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