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자루는 쥐었지만… '안락한 구속'의 추억
"통신요금 20% 인하 요구는 통신업체에게 사실상 적자를 내라는 얘기와 같다. 연 매출 10조를 올리는데 요금을 20% 인하하면 단순 산술계산으로 2조원의 매출이 증발하는 셈이다. 이 돈은 순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회사는 당장 적자를 고민해야하는 상황이 된다. 통신서비스 업체는 이 고민에 대한 해답으로 투자를 축소하는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괜히 죽는소릴까. 아니면 투자축소 카드를 꺼내들어 투자에 목말라 하는 정부를 압박하려는 것일까. 요금인하로 줄어드는 수익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투자를 축소하는 게 가장 빠른 계산이다. 성장 정체 속에 매출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이 마땅히 없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손해보고 장사한다는 게 세상사 3대 거짓말 중 하나라고 하던데, 이동통신업계 한 임원의 이같은 하소연은 단순한 불만토로만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속임수를 쓰지 않는 한, 손해보지 않기 위해선 탈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동통신요금 인하얘기가 나오면, 통신사업자는 항상 외롭다. 요금 내린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으니 시민단체, 정치권 등 사방에서 통신사업자들을 압박해 들어간다. 이같은 압박에 통신사업자들은 항상 요금인하로 화답했고, 반복은 어느새 타성이 됐다.
서민경제를 위해 통신요금 20% 인하를 자신하던 인수위가 이같은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통신요금 직접인하에서 슬며시 발을 뺐다. 통신사업자들의 논리에 벽을 느끼더니 결국 피부에 와 닿는 가입비 면제, 기본료 인하 등 실질적인 요금인하를 이뤄내지 못하고 요금인하 방식을 모두 사업자에게 맡겼다. 대신, 정부는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큰 그림의 규제완화 조치만 취하기로 했다.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3일 "현실적으로 통신업체들이 호응하지 않는데 기본료와 가입비를 통제할 방법이 없다. 통신업계가 자율적으로 통신료 인하 방안을 밝힐 것"이라며 통신요금 인하를 사실상 업계에 맡기는 방법을 택했다고 밝혔다.
이튿날 KT와 SK텔레콤 등 유 무선 시장의 지배적 사업자를 시작으로 통신사업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요금할인 상품을 속속 발표했다. 정확하게 요금`인하'상품이 아닌, 요금 `절감'상품이다. 소비자가 머리 좀 써서 잘 조합하면, 요금을 최대 50%까지 절감할 수 있단다. 그런데 새 상품들을 살펴보면, 어딘지 많이 복잡하고 머리가 아프다.
시민단체들은 즉각 반발한다. 통신사업자들이 내 놓는 다양한 요금절감, 혹은 요금할인 상품들이 실효성이 없을뿐더러 소비자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통신사업자들은 일단 안도한다. 기본료, 가입비 한푼도 안 건드리고 기존에 있는 상품 요리조리 버무려 `싸거나 혹은 싸 보이는' 결합상품을 내 놨으니 선방했다고 자평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신업체들의 이같은 안도는 곧 밀려올 경쟁의 폭풍을 예감하지 못한 섣부르고 어리석은 판단일 수 있다.
업계 자율은 통신사업자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바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랬다.
인수위가 친 시장적 입장에서 요금인하의 칼자루를 업계에 넘겨줬든, 설득하다 논리적 힘에 부쳐 직접 인하를 포기했든, 요금경쟁은 이제 업계 자율로 이뤄지게 됐다.
사실, 인수위가 새 정부에 제안해 오는 9월부터 도입키로 한 몇 가지 규제완화 조치는 통신시장 전반에 핵폭풍을 가져올 수 있는 정책들이다. 정권 이양과정에서 타 산업분야의 각종 규제완화조치들과 함께 공개되면서 파괴력이 희석되고 있지만 사안 하나 하나가 모두 수년, 혹은 십 수년에 걸쳐 `논의'만 돼 왔던 중요한 이슈들이었다. 이게 한꺼번에 터졌다.
이동통신부분의 SK텔레콤, 시내전화 초고속인터넷 분야의 KT등 시장지배적 사업자에게 적용돼 왔던 요금인가제 폐지는 통신시장의 규제체제 자체를 뒤바꿀 혁명적 변화다. 또, 재판매 의무화를 통한 MVNO의 도입 역시 현재 3개사업자 경쟁체제에 있는 이동전화 시장의 경쟁상황을 다자간 대결구도로 바꾸는 것이다. USIM 해제 조치도 그간 서비스업체 중심의 단말기 유통구조와 규제체제를 뒤바꿀 혁신적인 제도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통신사업자들은 이같은 혁명적 제도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가. 족쇄를 풀어주겠다는 데도, 규제를 그리워하는 업계 일각의 목소리는 어떤 의미일까.
규제는 구속하고 간섭했지만, 때론 달콤한 안식을 주기도 했다. 특히 요금인가제가 주는 안락함은 컸다. 시장 지배적 사업자는 요금인가제 안에서 정부와 적절하게 타협하며 투자분과 요금인하분, 수익을 안정적으로 운영해 왔다. 많은 힘 안들이고 곶감 빼먹었다.
통신업계는 이제 다양한 규제완화 조치로 족쇄를 풀고 칼자루를 쥐었으나, 무한 경쟁 속에서 더 큰 의무를 짊어져야 할 상황이다.
경쟁은 많은 것을 바꾼다.
그래서 이제부터 진짜 고민은 소비자나 시민단체, 정치권이 아니라 통신사업자가 해야 한다. 우리나라 통신시장은 더 이상 독점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고속인터넷시장은 케이블TV방송사업자들의 진출에 따라 이미 100개가 넘었고, 오는 9월이면 MVNO제도 도입에 따라 이동통신시장은 현재 3자 경쟁구도에서 다자간 구도로 바뀌게 된다.
정부가 경쟁촉진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게 된다면, 업계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특히 규제완화의 형태가 선발, 후발사업자에 차별적인 비대칭규제 방식에서 벗어나 동등규제 방식으로 전환된다면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경쟁상황이 연출된다.
경쟁을 통해 요금은 분명 내려갈 것이다. 요금인하 방식을 업계 자율로 맡긴 정부는 이제, 인하폭을 줄이기 위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업체간 담합에 주목하면 될 일이다.
정보미디어부장 yklim@
"통신요금 20% 인하 요구는 통신업체에게 사실상 적자를 내라는 얘기와 같다. 연 매출 10조를 올리는데 요금을 20% 인하하면 단순 산술계산으로 2조원의 매출이 증발하는 셈이다. 이 돈은 순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회사는 당장 적자를 고민해야하는 상황이 된다. 통신서비스 업체는 이 고민에 대한 해답으로 투자를 축소하는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괜히 죽는소릴까. 아니면 투자축소 카드를 꺼내들어 투자에 목말라 하는 정부를 압박하려는 것일까. 요금인하로 줄어드는 수익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투자를 축소하는 게 가장 빠른 계산이다. 성장 정체 속에 매출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이 마땅히 없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손해보고 장사한다는 게 세상사 3대 거짓말 중 하나라고 하던데, 이동통신업계 한 임원의 이같은 하소연은 단순한 불만토로만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속임수를 쓰지 않는 한, 손해보지 않기 위해선 탈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동통신요금 인하얘기가 나오면, 통신사업자는 항상 외롭다. 요금 내린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으니 시민단체, 정치권 등 사방에서 통신사업자들을 압박해 들어간다. 이같은 압박에 통신사업자들은 항상 요금인하로 화답했고, 반복은 어느새 타성이 됐다.
서민경제를 위해 통신요금 20% 인하를 자신하던 인수위가 이같은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통신요금 직접인하에서 슬며시 발을 뺐다. 통신사업자들의 논리에 벽을 느끼더니 결국 피부에 와 닿는 가입비 면제, 기본료 인하 등 실질적인 요금인하를 이뤄내지 못하고 요금인하 방식을 모두 사업자에게 맡겼다. 대신, 정부는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큰 그림의 규제완화 조치만 취하기로 했다.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3일 "현실적으로 통신업체들이 호응하지 않는데 기본료와 가입비를 통제할 방법이 없다. 통신업계가 자율적으로 통신료 인하 방안을 밝힐 것"이라며 통신요금 인하를 사실상 업계에 맡기는 방법을 택했다고 밝혔다.
이튿날 KT와 SK텔레콤 등 유 무선 시장의 지배적 사업자를 시작으로 통신사업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요금할인 상품을 속속 발표했다. 정확하게 요금`인하'상품이 아닌, 요금 `절감'상품이다. 소비자가 머리 좀 써서 잘 조합하면, 요금을 최대 50%까지 절감할 수 있단다. 그런데 새 상품들을 살펴보면, 어딘지 많이 복잡하고 머리가 아프다.
시민단체들은 즉각 반발한다. 통신사업자들이 내 놓는 다양한 요금절감, 혹은 요금할인 상품들이 실효성이 없을뿐더러 소비자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통신사업자들은 일단 안도한다. 기본료, 가입비 한푼도 안 건드리고 기존에 있는 상품 요리조리 버무려 `싸거나 혹은 싸 보이는' 결합상품을 내 놨으니 선방했다고 자평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신업체들의 이같은 안도는 곧 밀려올 경쟁의 폭풍을 예감하지 못한 섣부르고 어리석은 판단일 수 있다.
업계 자율은 통신사업자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바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랬다.
인수위가 친 시장적 입장에서 요금인하의 칼자루를 업계에 넘겨줬든, 설득하다 논리적 힘에 부쳐 직접 인하를 포기했든, 요금경쟁은 이제 업계 자율로 이뤄지게 됐다.
사실, 인수위가 새 정부에 제안해 오는 9월부터 도입키로 한 몇 가지 규제완화 조치는 통신시장 전반에 핵폭풍을 가져올 수 있는 정책들이다. 정권 이양과정에서 타 산업분야의 각종 규제완화조치들과 함께 공개되면서 파괴력이 희석되고 있지만 사안 하나 하나가 모두 수년, 혹은 십 수년에 걸쳐 `논의'만 돼 왔던 중요한 이슈들이었다. 이게 한꺼번에 터졌다.
이동통신부분의 SK텔레콤, 시내전화 초고속인터넷 분야의 KT등 시장지배적 사업자에게 적용돼 왔던 요금인가제 폐지는 통신시장의 규제체제 자체를 뒤바꿀 혁명적 변화다. 또, 재판매 의무화를 통한 MVNO의 도입 역시 현재 3개사업자 경쟁체제에 있는 이동전화 시장의 경쟁상황을 다자간 대결구도로 바꾸는 것이다. USIM 해제 조치도 그간 서비스업체 중심의 단말기 유통구조와 규제체제를 뒤바꿀 혁신적인 제도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통신사업자들은 이같은 혁명적 제도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가. 족쇄를 풀어주겠다는 데도, 규제를 그리워하는 업계 일각의 목소리는 어떤 의미일까.
규제는 구속하고 간섭했지만, 때론 달콤한 안식을 주기도 했다. 특히 요금인가제가 주는 안락함은 컸다. 시장 지배적 사업자는 요금인가제 안에서 정부와 적절하게 타협하며 투자분과 요금인하분, 수익을 안정적으로 운영해 왔다. 많은 힘 안들이고 곶감 빼먹었다.
통신업계는 이제 다양한 규제완화 조치로 족쇄를 풀고 칼자루를 쥐었으나, 무한 경쟁 속에서 더 큰 의무를 짊어져야 할 상황이다.
경쟁은 많은 것을 바꾼다.
그래서 이제부터 진짜 고민은 소비자나 시민단체, 정치권이 아니라 통신사업자가 해야 한다. 우리나라 통신시장은 더 이상 독점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고속인터넷시장은 케이블TV방송사업자들의 진출에 따라 이미 100개가 넘었고, 오는 9월이면 MVNO제도 도입에 따라 이동통신시장은 현재 3자 경쟁구도에서 다자간 구도로 바뀌게 된다.
정부가 경쟁촉진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게 된다면, 업계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특히 규제완화의 형태가 선발, 후발사업자에 차별적인 비대칭규제 방식에서 벗어나 동등규제 방식으로 전환된다면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경쟁상황이 연출된다.
경쟁을 통해 요금은 분명 내려갈 것이다. 요금인하 방식을 업계 자율로 맡긴 정부는 이제, 인하폭을 줄이기 위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업체간 담합에 주목하면 될 일이다.
정보미디어부장 ykl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