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 저/신호열 역/하서흡 그림
현실문화연구/1만원
여행에 관한 책, 본인이 직접 가보지 못한 곳을 소개한 책을 읽는 일은 큰 즐거움이다.
여행안내서나 지도를 보는 것도 좋고, 어떤 장소에 대한 역사와 사연을 담은 책을 읽는 것 역시 행복한 일이다.
‘긴 담장에 걸리운 맑은 노래-그림과 함께 보는 소쇄원 48영’은 이같은 책읽기의 즐거움을 준다.
전남 담양의 정원 소쇄원은 중종 때 사화로 사사되었던 조광조와 사림들이 축출되고(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다뤄 우리에게도 친숙한 시대다), 조광조의 문하에 있었던 양산보가 고향으로 돌아와 꾸민 정원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소쇄원을 다룬 여러 책들은 주로 사진 등의 설명을 이용해서 건축물로서의 소쇄원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소쇄원을 조선시대 사림 선비들의 정신세계가 구현된 공간으로 다루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 건축물들을 그저 나무와 돌과 흙의 집합체가 아닌, 비물질계의 구현이라고 보는 접근법은 일리가 있다. 특히 동양에서는 여염집을 지어도 성주와 업과 신주의 공간이 있지 않은가. 하물며 말 한 마디, 손짓 하나하나가 모두 성리학의 질서에 따라야 한다고 믿었던 선비들의 정원임에랴...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정원은 양산보를 비롯한 사림들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와 그 질서를 현실로 옮긴 곳이다. 당대 선비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글과 그림을 남긴 것은, 단지 풍광 좋은 곳을 찾아 즐기는 호사가적 풍류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 선비중 특히 하서 김인후는 우암 송시열로부터 도학과 절의와 문장에 빼어나다는 칭송을 받았다는 이름 높은 선비다. 김인후는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와 지기로서 우정을 나눴고, 양산보 자손들의 스승이었으며, 소쇄원을 사랑하여 이곳에 대한 글을 여러 편 남겼다고 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48수의 한시인 ‘소쇄원 48영’인데, 이 시는 계절과 장소의 변화에 따른 소쇄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고 아울러 그 속에 숨어 있는 우주의 질서와 성리학의 원리를 에둘러 표현한다.
‘긴 담장에 걸리운…’은 그 소쇄원 48영을 새로 옮기고 해제를 붙여서 만든 책이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그 48수의 시가 노래하는 풍경을 아름다운 한국화로 옮겨 함께 실었다. 한시라고 하면 재미없고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번역은 쉽고 유려하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대 한학자 고 신호열 선생이 번역했다). 또 양산보의 15대 종손 양재영씨가 붙인 해제 역시 간략하고 이해하기 쉽다.
풍경을 보여주면서 사진이 아닌 한국화를 채택했다는 점은 독자로서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우리는 그동안 노골적인 직접성, 실물의 생뚱생뚱한 원색에 너무나 오랫동안 노출되어 왔다. 아름답게 재현된 수묵담채화 속의 풍경은 그 깊이 있는 먹빛 속으로 나를 초대하는 것 같다.
옛 것을 무작정 좋아하거나 따르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성리학의 위계적인 질서, 특히 가부장적인 체계에 대해서는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으면 외부의 풍경을 그저 나무와 꽃과 풀과 돌로 보지 않는 중세의 시선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싶을 것이다.
쓱 지나치면 그 뿐인 풍경 속에서 발견하는 우주의 질서. 혹시 방 안 여행을 즐기는 사람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나만의 그윽하고 고요한 소쇄원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현실문화연구/1만원
여행에 관한 책, 본인이 직접 가보지 못한 곳을 소개한 책을 읽는 일은 큰 즐거움이다.
여행안내서나 지도를 보는 것도 좋고, 어떤 장소에 대한 역사와 사연을 담은 책을 읽는 것 역시 행복한 일이다.
‘긴 담장에 걸리운 맑은 노래-그림과 함께 보는 소쇄원 48영’은 이같은 책읽기의 즐거움을 준다.
전남 담양의 정원 소쇄원은 중종 때 사화로 사사되었던 조광조와 사림들이 축출되고(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다뤄 우리에게도 친숙한 시대다), 조광조의 문하에 있었던 양산보가 고향으로 돌아와 꾸민 정원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소쇄원을 다룬 여러 책들은 주로 사진 등의 설명을 이용해서 건축물로서의 소쇄원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소쇄원을 조선시대 사림 선비들의 정신세계가 구현된 공간으로 다루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 건축물들을 그저 나무와 돌과 흙의 집합체가 아닌, 비물질계의 구현이라고 보는 접근법은 일리가 있다. 특히 동양에서는 여염집을 지어도 성주와 업과 신주의 공간이 있지 않은가. 하물며 말 한 마디, 손짓 하나하나가 모두 성리학의 질서에 따라야 한다고 믿었던 선비들의 정원임에랴...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정원은 양산보를 비롯한 사림들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와 그 질서를 현실로 옮긴 곳이다. 당대 선비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글과 그림을 남긴 것은, 단지 풍광 좋은 곳을 찾아 즐기는 호사가적 풍류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 선비중 특히 하서 김인후는 우암 송시열로부터 도학과 절의와 문장에 빼어나다는 칭송을 받았다는 이름 높은 선비다. 김인후는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와 지기로서 우정을 나눴고, 양산보 자손들의 스승이었으며, 소쇄원을 사랑하여 이곳에 대한 글을 여러 편 남겼다고 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48수의 한시인 ‘소쇄원 48영’인데, 이 시는 계절과 장소의 변화에 따른 소쇄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고 아울러 그 속에 숨어 있는 우주의 질서와 성리학의 원리를 에둘러 표현한다.
‘긴 담장에 걸리운…’은 그 소쇄원 48영을 새로 옮기고 해제를 붙여서 만든 책이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그 48수의 시가 노래하는 풍경을 아름다운 한국화로 옮겨 함께 실었다. 한시라고 하면 재미없고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번역은 쉽고 유려하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대 한학자 고 신호열 선생이 번역했다). 또 양산보의 15대 종손 양재영씨가 붙인 해제 역시 간략하고 이해하기 쉽다.
풍경을 보여주면서 사진이 아닌 한국화를 채택했다는 점은 독자로서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우리는 그동안 노골적인 직접성, 실물의 생뚱생뚱한 원색에 너무나 오랫동안 노출되어 왔다. 아름답게 재현된 수묵담채화 속의 풍경은 그 깊이 있는 먹빛 속으로 나를 초대하는 것 같다.
옛 것을 무작정 좋아하거나 따르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성리학의 위계적인 질서, 특히 가부장적인 체계에 대해서는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으면 외부의 풍경을 그저 나무와 꽃과 풀과 돌로 보지 않는 중세의 시선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싶을 것이다.
쓱 지나치면 그 뿐인 풍경 속에서 발견하는 우주의 질서. 혹시 방 안 여행을 즐기는 사람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나만의 그윽하고 고요한 소쇄원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