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日 통화정책 디커플링 영향
34년만에 1달러당 158엔 추락
전문가 '시장개입 무용론' 언급
엔화의 추락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일본 간의 통화정책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강화하고 있는 탓이다. 여전히 견조한 미국 경제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매파적(통화 긴축) 성향은 짙어지고 있다. 반면 일본은행(BOJ)의 비둘기적(통화 완화) 정책이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 대 엔화 환율은 지난 26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서 1달러당 158.4엔까지 치솟았다. 엔화 가치가 1달러당 158엔대로 추락한 것은 1990년 5월 이후 34년만에 처음이다. 심리적 마지노선이던 155엔이 깨지면서 160엔대 추락 가능성까지 나온다. 시장은 이같은 엔저가 언제, 어느 수준까지 이어질 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슈퍼 엔저, 기름 부은 일본은행
일본은행은 지난 26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금리 동결 등 기존 금융정책 유지를 결정했다. 우에다 가즈오(사진) 총재는 "현재는 엔화 약세가 기조적인 물가 상승률에 큰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다"며 "당분간은 완화적인 금융환경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리동결과 양적완화 정책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확고히한 것이다.
미·일 양국 금리차가 부각되면서 엔을 팔고 달러를 사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온 이같은 발언은 일본은행의 조기 금리 인상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에 한층 더 무게를 실어줘 엔저를 가속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NHK는 "일본은행의 금융정책결정회의 결과 발표 이후 엔저가 한층 더 가속화됐다"고 전했다.
미국의 3고(고성장·고물가·고금리) 현상은 강달러에 더욱 힘을 보태고 있다. 미 연준 내부에서는 스멀스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물가를 잡기 위해 매파적 기류가 짙어지고 있다.
지난 25일(현지 시간) 미 상무부가 발표한 1분기 국내총생산(GDP)에서 개인소비와 설비투자의 견조함이 재확인됐다. 지난 26일(현지 시간) 나온 3월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지수는 전달 대비 0.3%, 전년동기대비 2.8% 상승했다. 월가 예상치는 각각 0.3%, 2.7%였다. 근원PCE 상승률은 지난해 줄곧 하향 추세를 이어오다, 2% 후반대에서 고착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연준 목표치 2%까지 가기에는 아직 한계를 보이고 있어 올해 금리인하 시점은 연말로 미뤄졌고, 인하폭도 한두차례 정도로 축소된 상황이다. 이에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정부, 시장 개입?
시장에서는 최근 엔화 약세의 속도가 빠르다는 데 이견이 없다. 이에 일본 당국이 언제 시장에 개입할 지 주목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22년 9월과 10월 3차례 시장 개입을 통해 9조2000억엔을 쏟아부었다. 당시 시장 개입을 통해 일본 정부는 엔화 몸값을 어느 정도 반등시키는 데 성공했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는 "엔화 가치가 지난 주 1달러당 3엔 이상 떨어져 드문 낙폭을 보였다"며 "일본 당국이 시장에 개입한 2022년 9월과 10월도 한 주간 3엔 전후의 엔저가 나타났던 시기"라고 전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시장 개입에 신중한 입장이다. 스즈키 쥰이치 재무상은 "언제라도 준비돼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 행동에는 나서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시장 개입 무용론'까지 나온다. 미국과 일본의 통화정책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일본 당국이 외환 시장에 뛰어들더라도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죠셉 트레비사티 FX스트리트 수석 애널리스트는 아사히신문에 "지금은 일본 정부가 개입을 해도 시장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면서 "일본 정부도 그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60엔도 깨지나
일각에서는 달러 대 엔화 환율이 160엔까지 하락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일본 집권 자민당의 경제통 오치 다카오 의원은 "환율이 160엔, 170엔이 되면 당국이 추가적인 엔저 대책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닛케이는 이를 두고 일본 정부의 환율 방어선이 160엔선까지 밀린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슈퍼엔저에 대한 우려도 크다. 엔화가치 하락으로 일본 내 수입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는 데 따른 부작용을 지적하고 있다. 올해 초 일본 기업들이 물가 인상에 맞춰 임금을 대폭 인상했지만, 수입물가가 급격히 오른다면 물가수준을 반영한 실질임금이 여전히 뒷걸음질 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 기업들도 경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엔화 약세는 원자재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수익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에 당초 10월로 예상된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시기가 오는 6~7월로 앞당겨 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금리 인상이 기조적 엔화약세를 되돌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김남석기자 kns@dt.co.kr
엔화 약세가 지속하는 가운데 28일 서울 중구 명동의 환전소 달러· 엔 등 등 각국 통화 환율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