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타임스

 


[DT컬처] “조경은 땅에 쓴 시”…1세대 조경가 정영선 ‘삶과 예술’

프린트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DT컬처] “조경은 땅에 쓴 시”…1세대 조경가 정영선 ‘삶과 예술’
정영선 조경가가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에 조성된 '전시마당 정원'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박은희 기자



"오늘의 저를 만들어주신 분은 박목월 시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시를 좋아했고, 조경을 하면서 대부분의 영감을 시에서 얻고 있습니다."

한국 1세대 조경가이자 최초의 여성 국토개발기술사인 정영선(83) 씨는 학창시절 백일장에서 상을 휩쓸어 모두가 시인이 될 거라고 믿었지만, 존 옴스비 싸이몬즈의 '조경'(1961)을 읽으며 조경가를 꿈꿨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과수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식물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만 16세에 국어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사택으로 이사하면서 생애 첫 정원 조성을 했고, 학교 온실관리도 담당했다.

박목월 시인은 정 조경가 아버지의 지인으로 자주 왕래하며 지냈다. 정 조경가가 한 대학교 영문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특차 합격한 뒤 농대로 진로를 바꾸려 하자 그의 어머니는 강하게 반대했다. 아버지는 박 시인에게 조언을 구했고 믿고 보내라는 박 시인의 한 마디가 부모의 마음을 열었다.

결국 서울대 농대에 진학한 정 조경가는 조경학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1970년대 초 같은 대학 환경계획연구소의 1호 대학원생이 돼 불국사 등 국가 주도의 유적지 복원 사업에 참여했다. 졸업 후엔 청주대 교수로 재직하며 '서양조경사'를 집필하는 등 학문적 연구에 매진했다. 이와 함께 국토개발기술사로서 조경설계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87년 조경설계 회사 서안을 창립하며 지금까지 공공 및 민간의 크고 작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맡아 하고 있다.

[DT컬처] “조경은 땅에 쓴 시”…1세대 조경가 정영선 ‘삶과 예술’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설치 전경. 사진=박은희 기자



국립현대미술관은 반세기 동안 성실하게 펼쳐온 정 조경가의 활동을 총망라한 전시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지난 5일부터 선보이고 있다. 전시 제목은 신경림의 시에서 착안했다. 정 조경가에게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 삼는 종합과학예술이다. 그는 50여 년 조경인생 동안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유 자생종의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파스텔, 연필, 수채화 그림, 청사진, 설계도면, 모형, 사진, 영상 등 각종 기록자료 5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조망한다. 또 60여 개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대한 조경가의 아카이브 대부분을 최초로 공개한다.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와 민간 기업이 의뢰한 정원과 리조트, 역사 쓰기의 방법론으로서 기념비적 조경과 식물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등 작업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재구성했다.

지난 4일 전시장에서 만난 정 조경가는 "건축의 뒷전 정도로만 알려진 조경 분야의 전시를 한다는 게 저에게는 황홀하고 기적"이라며 "창피하고 부끄럽지반 후학을 위해 길을 마련하고 조경 분야을 알리기 위해 기꺼이 응했다"고 밝혔다.

[DT컬처] “조경은 땅에 쓴 시”…1세대 조경가 정영선 ‘삶과 예술’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전시를 기획한 이지회 학예연구사가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희 기자



전시는 크게 7개의 '묶음'으로 나뉜다. 첫 번째 묶음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가능한 역사 쓰기'에서는 '장소 만들기'의 현장이 된 조경의 사례를 살펴본다. 탑골공원 개선사업(2002)과 광화문광장 재정비(2009), 경춘선숲길(2015~2017) 등 수직에서 수평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인식을 전환하고 공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방법론으로서 조경의 역할을 소개한다.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은 주요 국제 행사 개최와 더불어 한국을 찾는 세계인에게 선진화된 도시 경관의 인상을 주기 위해 동원된 사업을 다룬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및 아시아공원(1986), 올림픽선수촌아파트(1988), 대전엑스포(1993) 등 한국의 경제·문화·기술적 도약의 기회였던 대형 국가 주도 프로젝트들을 볼 수 있다.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생활' 묶음에는 경제 성장이 동반한 생활양식의 변화로 수요가 생긴 가족단위 여가활동의 장소들이 있다. 예술의전당(1988)의 조경 구상도와 모형 사진, 휘닉스파크(1995)의 식재계획도와 피칭 자료 등을 공개한다.

'정원의 재발견'은 선조로부터 향유돼 온 우리 고유의 식재와 경관, 공간 구성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정원을 들여다본다. 호암미술관의 '희원'(1997)으로 시작해 경기도와 중국 광저우 사이의 교류 정원으로 조성된 광동성 월수공원의 '해동경기원'(2005),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개인 정원 '포항 별서 정원'(2008) 등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조경과 건축의 대화'는 건축과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해 탄생한 조경 작업을 살펴본다.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은 강이 흐르는 곳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습지를 보호하고 도심 속 물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다룬다. '식물, 삶의 토양'은 다양한 식생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자연의 치유적 속성이 강조된 명상과 사색의 장소들을 조명한다.

[DT컬처] “조경은 땅에 쓴 시”…1세대 조경가 정영선 ‘삶과 예술’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설치 전경. 사진=박은희 기자



서울관의 야외 종친부마당과 전시마당에는 이번 전시를 위한 새로운 정원을 조성했다. 석산인 인왕산의 아름다움을 미술관 내·외부에 재현하고 계절감을 더하는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을 식재했다. 500여 점의 조경 디자인 기록 자료의 다차원적인 연출을 위해 조경의 시간성에 주목한 정다운 감독의 영상과 사진작가 정지현·양해남·김용관, 신경섭 등의 경관 사진도 함께 소개한다.

정 조경가는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며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박은희기자 ehpark@dt.co.kr

[DT컬처] “조경은 땅에 쓴 시”…1세대 조경가 정영선 ‘삶과 예술’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에 조성된 '전시마당 정원'. 사진=박은희 기자




[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